지하생활자는 심리에 집중한다. 그의 요란한 내면을 설명해주는 학술적 연구가 있다는 믿음에서 시작한다. 인간을 연구한 심리학을 깨우치면 그의 고민은 해결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런 믿음은 프로이트나 융이나 아들러나 그 시절 심리학의 선배들이, 당시 한가롭게 심리상담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유복한 사람을 대상으로 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계속된다.
나는 심리상담이나 정신병원에 가기를 마지막까지 미루었다. 지독한 우울과 불안을 앓으면서도 십 년 넘도록 그 문턱을 넘지 못했다. 실제 정신병을 앓았던 나의 큰누나가 어떤 취급을 받았는지, 내가 그녀에게 어떻게 대했는지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문턱을 넘으려면 가난하고 갈길 바쁜 내게는 부담스러운 돈이 필요했다.
필요를 느꼈다. 그것은 수백 번의 좌절을 경험하고 몇 번의 자살을 생각하고 난 뒤였다. 죽음을 생각하던 시간의 끝에 이르러 이제는 마지막이라는 느낌이 들고 나서야 나는 움직일 수 있었다. 정신병원보다는 조금 부드러워 보이는 심리상담센터를 찾았다. 그곳에서도 나는 내가 문제가 없다는 것을 최대한 꾸미며 상담에 임했다. 이것은 오랜 지하생활동안 내가 터득한 삶의 지혜였다. 문제가 없는 사람들도 가볍게 임하는 지능검사를 받았다. 그 결과를 설명하는 상담사는 혹시 어린 시절, 행동이 과하지 않았었는지 주의집중에 문제가 있었는지 물었다.
내 바깥에 있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는 병이 있다. 그것을 상담사는 ADHD라고 했고 군대 선임은 멍청함이라고 했고 옛 애인은 변심이라고 했고 나는 우울이라고 말한다. 나름의 지옥을 거쳐온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신이 당신의 운명을 조각할 때 인간답지 못하게 충분히 잔인했다. 당신의 삶이 보잘것없다는 것이 충분히 증명되었다. 그럼에도 삶에 집중할 수 있었는가.
수치스러움과 결핍으로 가득 찬 성장기 동안 내 생각의 우물도 만들어졌다. 그 우물은 지저분한 왜곡으로 가득 차 있다. 세상을 지옥으로 바라보는 렌즈는 시간이 지나자 동공에 박혀 세상에 전해주는 조그마한 친절도 자주로 바꿔 읽는다. 내 안에서 올라오는 고약한 냄새는 바깥에서 어떤 향기가 풍겨와도 그것을 덮어 버린다. 내 안에서 울리는 지독한 소음은 아름다운 노레가 들려도 그것을 듣지 못하게 감춰버린다. 요란한 마음은 내가 겪어야 했던 좌절과 결핍과 소외와 수치를 끝없이 반추하며 여전히 나아진 것 없는 현재에의 관심을 하나도 남김없이 거두어 버리게 한다.
내가 그토록 걱정하던 미래의 모습은 한 치 벗어나지도 못한 채 현재가 되었다. 내가 그토록 마음 졸여가며 바라던 희망의 단서들은 결국 나의 삶은 좌절을 위한 것임을 강조하며 조용히 사그라들고 만다. 삶의 결정적 순간들마다 이러한 일은 반복되었다. 결국 누나는 미쳤고 집은 망했다. 학교에서는 같은 반 아이에게 뺨을 맞았고 모두가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무와도 대화를 나누지 못했다. 성적은 떨어질 대로 떨어졌다. 성격은 꼬일 대로 꼬여있었다. 대학을 갈 돈이 없었다. 군대를 다녀와도 바뀐 것은 없었다. 가난한 나의 삶을 가난하게나마 이어가기 위해 죽도록 노력해야 했다. 나의 조건을 보지 않고 내게 온 애인들은 나의 조건을 경험하고 떠나갔다. 부도난 희망을 붙들고 좌절에 주저앉아 있을 때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럴 때 제 삶에 지쳐 시들어있는 나의 가난하고 늙은 부모는 하루 종일 집에 누워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언제나 부족함을 느끼던 나는 자기계발의 한 방향으로 악기를 배워볼까 했다. 연주법을 익히고 코드를 잡는 법을 외우는 순간마다 내가 당면한 문제들은 생각 속에서 기지개를 켰다. 악기를 배우는 일이 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런 작용도 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다시 집중하지 못했다. 악기를 서툴게 배우고 집으로 돌아와도 여전히 낡고 좁은 집에 혼자 있었다. 그리고 자꾸 돈은 들었다. 그렇게 소소한 자기 계발의 테두리 안에 있는 악기며 운동이며 자격증이며 공부며 하는 것들은 내게 다가오지도 못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걱정을 계발해 나갔다.
걱정하던 미래는 또 멍청한 현재가 되었고 여전히 미래가 보이지 앉았다. 그 현재에 서툴게 얹힌 활동들에 나는 집중할 수 없었다. 집중력이란 내게 원래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 마음은 고통스러운 과거와 초라한 미래 사이를 오고 가다가 울지도 못하고 화도 못 내고 힘 없이 스러지고 말았다. 그것을 누군가는 ADHD라고, 누군가는 얼빠진 놈이라고, 누군가는 마음이 떠나갔다고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은 진득진득한 우울이다. 가난이 망상과 걱정 사이에서 낳은 사생아 같은 것이다. 20여 년을 그렇게 살았다. 가난도 망상도 걱정도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끊임없이 번식해서 내 안에 충만하게 기생한다. 이제는 우울이 나인지 내가 우울인지 알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것을 진단에서는 성인ADHD라고 명했다. 나는 억울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