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토피아의 시대를 살지 않고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부적격자의 차트> by 연여름
인간이 초래한 재앙으로 인해 식수조차 구할 수 없는 미래 지구.
자신들이 만들어낸 '리누트'라는 반려동물로 인해 발생한 전염병으로 사람들은 죽어가고, 죽음을 피해 '인공지능' 모세가 제안한 '중재도시'의 삶을 선택한 사람들
이들은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해 자신들에게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소거하는데 그중에는 '허구'가 있다. 허구가 충동성과 맞닿아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충동성은 생존에 불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렇게 세대에 세대를 거듭해 생존하는 사람들.
(생존은 하지만 과연 이들의 삶은 인간다운 삶일까?)
하지만 조금씩 자신들의 삶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주인공 세인과 이폴은 '방벽'을 떠나 '백색의 땅'으로 들어간다는 줄거리이다.
스스로 초래한 재앙. 다섯 번의 세계대전이 허구가 아니라 진짜 나타날 수도 있겠다 싶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간에도 이란과 이스라엘의 폭격은 계속되고 있다)
연여름 작가는 조곤조곤 이 시대의 모순들을 이야기한다. 만들어진 반려동물 '리누트'로 인해 생겨난 신종 바이러스는 코로나 바이러스와 함께 급증하고 있는 반려동물 유기 문제들을 떠올리게 한다.
'최초의 제안' 이후 다른 제안이나 방안은 생각하지 않는 인류. 이들이 '방벽'을 나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것은 '허구'가 사라졌기 때문일까?
'균형제'라는 약물은 욕망과 감정을 통제하는데 이것이 '허구'를 상상하는 인간의 본능마저도 제어한 것일까?
그렇다면 왜 세인은 마음속에 챔버와의 공간이 있었을까?
사람들은 상상을 못한게 아니라 두려웠던 것은 아닐까?
이야기를 만들어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스스로의 규제에 갇혀 있었던 것이다.
이야기를 읽고 '리누트 바이러스'가 실제 나타날 것이 걱정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균형제를 먹고, 이야기를 잃어버리는 것에 대해서는 걱정이 되었다.
무서운 획일화의 모습이다.
아무도 '중재자'의 결정에 의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모두가 '워터드롭'이라는 통신기기를 착용하고 스스로 검열받으며 살아간다.
혹 지금 우리들의 삶에도 이러한 '균형제'와 '워터드롭'이 있는 것은 아닐까?
SNS를 보며 '다른 이들의 삶'을 지켜보며 그들처럼 살아가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고, 그들의 생각을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간이 인간답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단순 생명연장이 아니다. 인간이 인간답기 위해서는 생명 그 이상의 가치 추구가 필요하다.
그것이 예술이든, 인류애든 무엇이 되었든 그저 살기 위해서만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 불쌍하다.
마치 인간의 식탁에 오르기 위해 좁은 우리에 서 사육당하는 '닭'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문장수집)---
(첫 문장) 2692년 8월 23일. 생애한도가 연장될 수 있다는 소문이 병원을 도는 중이었다. 이번에는 41세였다.
(13) 개인의 기호나 욕망이 존재할 수 없는 이 도시에서는 누구나 추스름을 자연스럽게 체화한다. 40년의 삶을 대부분 규칙적이고 단조롭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17) 중재도시의 정의는 이러하다. '중재자'라는 인공지능의 보호 아래 8만 명의 '실무자'가 거주하는 도시로, 외부의 위험 및 오염물질을 돔형 방벽으로 보호한 70제곱킬로미터 면적의 땅
(18) 22세기 이래로 다섯 번의 새로운 세계대전과 이상 기후로 인해 멈추지 않는 먼지바람, 마지막으로 리누트 바이러스까지 대재난을 연이어 거치며 인류는 각 연방에 몇 개의 도시국가만을 간신히 유지할 만큼 규모가 위축되었다.
과거 많은 재앙이 그러했듯 리누트 바이러스 역시 인류가 제 손으로 창조해 낸 결과였다.
(40) 중재도시 실무자들은 존엄한 생존과 일정 기간의 안정을 얻는 대신, 중재자의 제안에 따라 잃어버려도 상관없다고 판단한 것들을 과감히 소거해 갔다. 생애한도 이상의 삶은 물론, 모든 종류의 사치, 유희, 쾌락을 비롯한 사사로운 감정들, 종교, 예술 등이 거기에 포함되었다. 그것들은 모순을 촉발하는 변수였고 모순은 분쟁을 부르며 분쟁은 공동체의 지속에 도움을 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42) 중재도시에서는 소문을 부풀리는 행위는 물론, 공상하건, 꾸며내거나, 창작하거나, 수면 중 꿈을 꾸거나,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까지 모든 종류의 허구 생산이 금지되어 있다. 허구는 충동성과 맞닿아 있으며 충동은 도시가 추구하는 안정과 지속성에 대치되는 개념이므로 중재자에게는 절대적인 모순 요소였다.
(66) 중재도시 내 모든 식수대 수도꼭지 위에는 어디든 같은 문장이 적혀 있다. '최초의 제안을 기억하라.' 6년 전부터 세인은 그 문장에 한 번도 눈을 맞추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운 생애한도 연장령이 시행되면서 세인이 매일 아기 배양센터에 가야 할 이유가 사라졌다. 그 탓에 요즘 챔버와 만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다는 것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낙담이었다.
(160) 백색의 땅은 중재도시처럼 한 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야생식물로 뒤덮인 빈집이나 대지에 일정 기간 머물다가, 철을 따라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를 반복한다. 그곳은 우리가 머무는 순간에만 잠시 백색의 땅이라는 이름을 가질 뿐, 영영 구속당하는 일이 없다
(마지막문장) 그래도 그것은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해야 세인의 머리카락이 파도를 타고 멀리 흩어져, 우리가 어느 백색의 땅에 있든 그의 꿈을 마음껏 꿀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선택하는 삶을 살자.
그저 생존하는 삶이 아니라 방벽 밖이 위험해 보일지라도, 단 하루를 살더라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내 가치를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