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나는 죽음을 상상하는 데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눈을 닫고, 귀를 닫고, 피부를 닫고… 모든 감각기관을 하나씩 닫고, 끝내는 죽음을 상상하는 생각의 전원마저 끄면. 이 세계를 정의할 수 있는 모든 단서가 사라지는 공허의 결말이 나는 그렇게나 무서웠다. 감각하고 느끼고 생각한다는 것,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것이 그렇게나 안심이 되었다. 아마 삶을 그렇게나 사랑했다. 거실의 엄마를 걱정시키기 싫어서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고 숨죽여 울던 밤이, 오만하게도 그 모든 것이 당연한 보통의 낮 사이에 있었다.
김현식의 <내 사랑 내곁에>를 들을 때. 간경화로 세상을 뜨기 직전, 복수가 가득 찬 채로 자신을 그 지경으로 몰아간 알코올에 다시금 의존하며 5집과 (사후 발매될) 6집을 완성하는 그를 상상할 때. 완전히 쉬어버린 걸걸한 목소리가 꼭 죽음의 목소리 같아 어린 나는 그의 유작을 무서워했다. 그러면서도 왠지 모르게 잠 못 들 것 같은 밤이면 이불속에서 김현식을 듣는 일을 멈추지 않았는데, 돌아보면 그건 임종의 순간 마지막으로 소멸한다는 청각으로 공포를 흡수하며 잠에 드는 일 - 임사체험이었다.
마지막 피아노곡인 <유령 변주곡>을 쓰며 로베르트 슈만은 천사가 속삭여준 멜로디를 받아 적고 있다 주장한다. 자신의 바이올린 협주곡 2악장에 이미 사용했던 멜로디인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차디찬 라인 강에 몸을 던진 다음날 로베르트는 <유령 변주곡>을 완성하고 클라라에게 보낸다. 그가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기 2년 전의 일이다.
발 없는 유령의 궤적과도 같이, 변주들은 그 어떤 자기주장도 없이 그 어디로도 향하지 않는다. 멀어지고자, 이뤄내고자 하는 의지를 제거한 채 한없이 테마 주위만을 맴돈다. 어쩌면 맴돌지도 않고, 그저 가만히 어깨를 흔들며. 바이올린 협주곡의, 그마저도 그리 산뜻하지 않은 환희의 드라마를 고쳐 쓰려는 듯이. 자신에게 노래를 불러준 유령이, 온기가 있고 살결이 있고 이름이 있는, 여전히 곁에 머물고 싶은 변치 않는 사랑인 것처럼. 클라라.
같은 테마에서 태어난 두 곡은 로베르트의 마지막 연가다. 돌아갈 집이 없는 영혼이 혼돈 그 자체가 되는 것으로 방황을 마무리하고자 할 때, 자아와 사랑과 꿈과 현실은 하나의 이름 없는 개체가 된다. 무질서한 소용돌이 속에서, 누군가의 목소리로 노래를 짓다, 이내 소음 속으로 흡수된다. 결국 죽음 앞에서 사랑 또한 불완전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슬픔. 이는 클라라의 로망스에서 로베르트의 바이올린 소나타의 멜로디가 스쳐 지나가는 것과 같은 슬픔이다.
이즈음 나는 <내 사랑 내곁에>를 들으며 비슷한 슬픔을 느꼈다. 최후의 순간 함께 소멸할 가치를 어떻게든 예술 속에 박제하려는 지독한 낭만주의자들을 나는 순교자라 불렀던 것도 같다. 이즈음 나는 죽음이 무섭지 않았다.
그냥 살았을 뿐이라고, 이제는 생각한다. 말보다 음악이 익숙하고 생각보다 멜로디가 빨랐던 사람들이라, 그게 삶의 방식이라 그저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공포는 죽기 전까지는 살아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잊게 만들어, 때로 누군가는 죽음보다 일찍 죽는다. 내 공포가 로베르트를 이 년 일찍 죽였다. 그 누구도 타인의 죄를 대속하게 두지 마라 - 죽음조차도. 이 규율 아래 나는 여태 무종교인이다. 나는 여전히 죽음을 두려워한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
김현식의 마지막 작품들을 들을 때마다 기형도가 떠오른다. 기형도의 시 안에 어린 죽음의 향을 맡을 때마다 생각한다. 파고다극장 객석에 파묻힌 변사체가 되기 직전 순간,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을까. 그 또한 죽음을 예감하면서 그저 자신의 할 일을 하고 있었을까. 나는 그의 죽음을 어디까지 유예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