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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타 Jul 24. 2017

나는 언제부터 남자가 되었는가 1

시계를 가장 뒤로 돌려서

나는 언제부터 남자라는 성을 인지하게 된 것일까? 그러니까 생물학적 '남성'이 아니라 가부장제의 권력자 역할을 수행하는 남성 말이다. 가부장제에서의 권력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은 나는 내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몇 가지 문제를 경험했다. 남고와 공대, 군대라는 집단을 거치면서 수많은 여성혐오적인 편견들을 접하고 일부는 인터넷에 떠도는 기사 혹은 친구의 친구 이야기 등으로 확증편향을 가지게 되는 문제를 경험했다. 성적 대상화, 김치녀, 김여사, 꽃뱀... 익숙한 레퍼토리다. 내가 경험하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존재에 앞서 여성이라는 존재만으로 그들은 수없이 혐오당하고 또, 어떤 집단에서는 더 강하게 혐오를 표현하는 자가 권력을 가지거나 다른 이들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나는 이런 혐오표현에 지쳤지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몰랐다. 여성의 경우는 가부장제 하에서는 절대 평등해질 수 없었다. 당시의 나는 절대 화장은 하지 않지만 상대방은 왜 그렇게 화장과 머리 말리는 일, 집에서 나오는 일이 오래 걸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연인 사이의 문제는 더욱 심각했다.  앞선 혐오표현들에 지친 나는 나도 그런 혐오표현에서 자유로운 줄 알았다. 오만했다. 그러기에 더욱 누군가의 마음에 상처를 주었을 것이다. 남성과 여성의 관계가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평등의 부르짖음은 또 다른 혐오발언에 불과했다. 


시계를 거꾸로 돌려서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시작점으로 가 보자. 그 시절 내가 구분할 수 있는 차이는 1차 성징의 여부였다. 정확히 성별에 대해 어떤 말을 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사실은, 유치원에서 남자애들을 레고를 가지고 놀고 여자애들은 인형을 가지고 노는 것이었다. 또한, 남자친구와 여자친구라는 개념. 이성애 중심적인 관념도 이때부터 키워졌다. 내 기억에 엄마는 내가 레고, 로봇을 가지고 놀든 인형을 가지고 놀든 내가 선호를 수정할 만큼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는 일부터 놀이터에서 나가서 몸으로 뛰어노는 일까지 거의 모든 방면에 재미를 느꼈다. 그렇지만 성별의 분리가 확실해졌던 것은 아마 유치원에 다니면서였을 것이다. 집에선 하나인 화장실이 유치원에선 남자/여자화장실로. 여자아이들은 엄마들이 머리를 길게, 나는 남자애같이. 입는 옷부터가 달랐다. 문득 무의식을 지나치는 말이 있는데 "남자애가 그렇게 울면 돼, 안돼?" 잘 우는 나에게 누군가 화살처럼 던진 말이다. 그렇다. 맨박스의 시작이었다. 덧붙여서 첫째라는 역할은 나에게 또 짐을 지웠다. 나에게는 두 명이 동생이 있다. 여동생, 남동생 둘이다. 남동생이 태어나기 전 나는 그렇게 졸랐다고 한다. "남동생을 한 명 낳아 달라"고 말이다. 왜였을까? 그때부터 나는 생물학적이든 사회적이든 '성별'이라는 것을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관련해서 좋은 기사가 있어서 가져왔다. 

[소년 여혐]유아기부터 파랑ㆍ분홍 ‘두 세계’ 격리… 다양한 빛깔로 키워야


초등학교에 들어선 나는 '여자애 같이 ~하지 마라' 너무나 익숙한 이 말. 어디서부터 온 것일까? 나는 집에서 무언가 표현하는 데 크게 제약을 느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같이 사는 할머니의 존재는 무시하기가 힘들었다. 나는 가끔 힘을 써야 하는 일이 있으면 할머니를 도왔다. 그러면 용돈이 쉽게 따라왔다. 할머니는 첫째고 남자라고 그렇게 좋아하셨다. 또 계속해서 맨박스를 씌웠다. "집안을 책임져야 한다. 동생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 그렇지만 그런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거나, 그런 말을 질색하는 엄마의 방어 덕인지 모르겠지만 나에겐 할머니가 바라는 책임감은 없다. 나중에 대화를 해서 알았지만 우리 집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 것 역시 큰 오만이었다. 여성혐오는 여동생을 계속해서 고통스럽게 하는 식으로 작동했다. 여자애가 ~하냐, 여자애는 쓸데가 없다, 중학생이 된 여동생에게 나 때는 그 나이 때 시집가야 했다, 여동생이 오빠 라면 안끓여다주나. 이것을 적으면서 깨달았다. 나는 '오빠'라는 권력을 인지했다. 나는 착한 오빠이지만 동생에게 심부름을 시킬 수 있었다. 별 것 아니지만 나는 동생한테 무언가 해오라고 할 수 있었고, 동생보다 많은 시간 컴퓨터를 만질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쉽게 다툼으로 이어졌다. 가부장제 하에서 첫째에 남성이라는 위치는 그저 먼저 태어나고 고추가 달린 것만으로도 이런 권위를 획득하는 것이었다. 그런 걸 누가 따끔하게 가르쳐 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매번 든다.


2차 성징이 발달할 때 즈음부터 이성과 연애라는 개념을 깨달았다. 초등학교 때에 많지는 않았지만 누구랑 누구랑 사귄다는 것은 학생들 사이의 소소한 가십거리였고 "~~가 깨졌대" 하는 식으로 놀림거리가 되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그때도 인터넷하고 게임하고 책 읽고 드라마 보고 예능 보고 다 했다. 너무나도 쉽게 대중문화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렇게 나는 이성애 중심적인, 남성으로서의 역할을 조금씩 부여받기 시작했다.


중학생이 되자 남녀공학이었지만 남성/여성 반이 나뉘었다. 그 이유는 어느 누구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공부와 성적이라는 압박을 받던 나에게 여자애들이 공부를 잘해서 남자애들 내신이 좋지 않아진다는 여성혐오는 수없이 귀에 들려왔는데, 이것은 학부모들의 생각이라고 한다. 사실, 중학교에 들어서 가장 성별의 격차를 크게 느낀 것은 '야동'의 출현일 것이다. 남자 반에서는 쉬지 않고 교실에 있는 컴퓨터로 야동을 보았고 이것은 바로 남성이라는 권력을 인지했다는 사실과 같을 것이다. 요즈음 여교사 성추행 논란이 한창이다. 슬프게도 이것은 나의 중학교 때에도 일어났다. 물론 지금 기사화된 사건만큼은 아니었지만 쉽게 성적 대상화, 그리고 수업거부가 일어났다. 이것 역시 명백히 중학생 때부터 남성이라는 권력을 인지했다는 증명일 것이다. 이런 문제들의 선봉에는 학교에서 '날라리', '양아치'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선봉에 섰고, 나머지 학생들은 그것을 방관하면서 즐기거나 그저 외면했다. 나는 방관자였다. 종종 문제제기를 하거나 동참하지 않는 친구들이 존재했지만 그들은 쉽게 '여자애 같은', '힘이 약해서 그렇다'거나 '선비다'는 식의 조롱을 당했다.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고등학교 1, 2학년 때까지 내가 겪었던 남성 집단은 '정글'이었고 '주먹'을 잘 쓰는 사람이 큰 목소리와 지위를 획득했다. 신체적으로 키가 크고 공부를 잘했던 나는 무시받지 않을 정도의 지위를 가졌다. 나에게 남성성은 이렇게 다른 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식으로 주로 발현되었다. 성인이 되어 부딪치는 '성'에 대한 편견의 근거는 중학교 때부터 쌓아졌음이 확실하다.


고등학생이 된 나는 높은 모의고사 성적을 받고 문학 작품을 읽고 사회 문제를 인지하고 토론할 수 있을 정도의 이성을 갖추었다. 남고에 진학한 나는 전형적인 가부장적 체제에 익숙해 갔다. 심지어 말을 듣지 않는 학생 또한 '폭력'으로 해결하는 선생님들 앞에서 우리는 잠재적 가해자로써 길러졌다. 여성은 조각조각 나뉘어 부위별로 '먹을 수 있는 대상'이 되었고 제대로 된 성교육과 이성에 대한 이해가 없는 우리는 간접적인 정보들을 통해 여성혐오를 강화시켜 나갔다. '야동'이나 '자위'에 대한 시시콜콜한 수다나 누군가의 '여자친구'에 대한 모욕은 일상이었다. 이런 여성혐오는 잊을 만하면 나오는 선생들의 여성혐오적 발언들로 강력한 힘을 가졌다. 어떤 젊은 선생은 '여자 따라가서 학교 선생이나 하고 있다'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며 '너네는 여자 따라가지 마라'라는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쉽게 웃음거리가 되었다. 과연 그것이 여성과 남성의 문제인가?


성인이 되어 대학에 진학한 나는 가부장제에 대한 큰 문제의식이 없었다. 드디어 나는 학업과 대학 진학이라는 절대적인 목표에서 벗어났고 나의 신체의 자유를 획득했다. (이것은 성의 문제보다는 청소년 인권의 영역으로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나는 이 자유에 너무나도 큰 행복을 느꼈다. 당연히 다른 이들의 부정적인 감정에는 쉽게 귀를 기울이지 못했고 왜 그들이 나처럼 '행복'하지 못한 지 이해하지 못했다. 입대하기 전까지는.


입대하고 나서의 '남성성'에 대한 이야기는 2편에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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