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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타 Aug 03. 2017

할머니

내가 커가는 만큼 작아지는

이번 여름은 이렇게 더웠나 싶을 정도로 덥다. 더운 것도 더운 것이지만 습도가 엄청나서 하루 종일 기분이 찝찝한 날이 한 주 내내 계속되니까 에어컨을 나도 모르게 찾게 된다. 어릴 때만 하더라도 에어컨이 있으면 좋았지만 못 견딜 만한 더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런 더위 탓일까, 할머니와 외할머니 모두 편찮으시다.

할머니는 강한 사람이었다. 친가를 박차고 나오셨고 아빠를 혼자 키우셨다. 백부님(큰아빠)을 일찍 잃으셨다. 악착같이 돈을 모으셨고 제 한 몸 건사할 집은 물론이거니와 건물도 가지고 계셨다. 그 사이의 아빠의 문제는 잠시 접어두자. 할머니는 일제시대부터 스마트폰으로 못 하는 게 없는 지금까지 살아내었다. 할머니에게 삶이란 무엇이었을까?


얼마 전,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읽었다. 이 책은 내가 가지고 있던 무지에서 근거한 이상적인 삶에 대한 망상을 송두리째 무너뜨렸다. 돌아보면 나에게는 어디서든지 안전장치들이 있었다. 양친이 다 살아계셨고 경제적으로도 크게 부족함이 없었다. 시련이라고 해 보았자 시험에 떨어지거나 군생활 정도였지 나에게 앞으로 살아야 할 삶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까? 남은 생에 대한 끝없는 막연함. 나는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다.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하시고 점점 더 작아지는 모습을 보면서 갑작스레 책의 구절들이 생각났다. 로자 할머니가 유태인 수용소 이야기를 하는 부분은, 할머니가 일제시대 때 성노동자로 끌려갈 뻔 한 무용담과 겹친다. 그 이야기는 끝없이 끝없이 되풀이된다. 


나는 대학에 진학하기 전까지 친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내가 의식을 하기 전부터 그녀는 계속 같이 살았고 나에게 할머니가 없는 집이란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렇지만 할머니와 소통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녀는 내가 어린 시절엔 집 밖에 많이 계셨고, 내가 학원을 다니고 입시를 준비하게 되면서 낮 시간에 할머니와 마주하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그나마 어릴 때 내가 할머니와 함께했던 추억은, 딱히 할 일이 없을 때 할머니의 박스 정리를 돕는 일이었다. 집 옆의 공터에 1층짜리 집만큼 박스를 차곡차곡 쌓아서, 층층이 물을 뿌려서 무게를 늘린다. 그리고는 무게를 잘 쳐주는 고물상에 가서 판다. 내 기억에 잘 버실 때는 한 달에 30만원 가까이 수입을 얻으시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 치열해진 폐지 수집 경쟁과 조금씩 고장 나곤 하는 몸에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는 폐지를 모으셨다. 그때 이미 70대셨던 할머니에게 노동이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일이었다. 집 앞이 항상 더러워져서 가족끼리 마찰이 있었지만, 폐지를 주우러 동네를 돌아다니기만 하여도 산책도 되고 돈도 모이니 그만한 소일거리가 없었다. 나에게 할머니는 손자, 그중에 남자이고 첫째였던 나에게 큰 애정을 보였다. 여동생에겐 쉴 새 없이 듣기 힘든 말을 쏟아냈고 그간의 가부장제에서 받은 상처를 똑같이 전수했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고 할머니도 점점 더 활기를 잃어가심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에겐 폐지와 고물을 줍는 일은 일상이었다. 언제부턴가는 주로 동네 노인정에 나가셨는데, 친구들도 있고 '약쟁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잡다한 물건들을 팔고 할머니들을 즐겁게 해주는 모양이었다. 할머니에겐 생활비란 매달 20만원 남짓 들어오는 연금이 전부였다.


할머니와의 기억에 남는 대화는 "게임하지 마!!! 뭐가 좋다고 그것만 쳐다보고 있냐", "성화야 서울대 가야 한다", "성화야 서울대도 가야 하지만 죽으면 안 된다", "성화야 배워서 남주지 말고 니껄 단디 챙기라", "착하게 살아야 한다 성화야". 90년이란 생을 살아낸 할머니의 말은 달콤했던 적은 없었다. 그리고 주로 몇 마디 티격태격하거나 또 주로 만나는 시간이 새벽이다 보니 잠을 설치는 엄마의 짜증에 우리의 대화는 금세 잦아들었다. 귀가 잘 들리지 않으시던 할머니는 큰 소리로 이야기하신다. 잠귀가 밝은 엄마에겐 고통스러운 일이다. 내가 처음으로 할머니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할머니가 "성화야 죽으면 안 된다"는 말이었다. 내가 수능을 치고 며칠 되지 않아서 한창 언론에서 성적에 비관에서 자살한 학생들 이야기가 보도되었고 TV를 전폭적으로 신뢰하는 할머니는 수능이 끝나 날아갈 것 같던 나에게 말했다. 죽지 말라고. 할머니는 높은 학력이 곧 출세의 지름길이 되는 시대를 사셨다. 새벽에 게임을 하던 내 등짝을 후려칠 만큼 나를 다른 학교도 아닌 서울대에 보내고 싶었지만 할머니도 알았던 거다. 사실, 살아 보니까 서울대에 가는 방법만이 있지 않다는 것을. 가끔은 그저 건강히 살아내어 주기만 해서 고맙다고 말했다. 그 뒤로 나의 귀에 박힌 말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릴 땐 그저 코웃음치곤 했다.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 이들이 많은데, 착해져 봤자 뭐해' 이러곤 했다. 그렇지만 스무 살, 스물한 살 나이를 먹어 가면서 그 말은 알 수 없을 때 내 몸으로 튀어나왔다. 사소한 일에도 쉽게 투덜거리는 나에게 할머니는 지는 게 이기는 거라며 싸우지 말라고 도망치라고 했다. 이제 나는 그런 말을 쉽게 넘기지는 않는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생각했는지 되묻기도 한다. 


할머니와 내가 대화다운 대화를 하게 된 것은 내가 군인이 되어 휴가를 나온 어느 낮이었다. 창원에서의 특별한 약속이 없는 나는 집에서 누워서 늦잠을 즐기고 있으면, 노인당에서 일찍 집에 돌아오시거나 주무시던 할머니는 나에게 말을 걸었다. 우리의 시간은 아주 어릴 때로 갔다가 내가 막 태어났을 때로 갔다가 할머니가 결혼했을 때로 갔다가 그랬다. 아주 먼 친척에게로 갔다가 옆집 할머니 이야기로도 갔다. 시간의 압박에 쫓기지 않는 그때 비로소 나는 사람 대 사람으로 할머니와 대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 세대가 과연 얼마나 할머니, 할아버지와 대화하고 있을까. 그들은 태극기 부대이기도 하지만 그저 누구보다도 작은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이기도 했다. 나는 그들이 바라는 세상을 지지하지 않지만 그들이 살아낸 삶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낮 시간이 지나고 나 저녁에 아빠와 술을 마시고 있을 때면 방에서 나오셔서 아빠와 나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곤 했다. 때때로 와서 할머니의 이야기를 풀어놓곤 했다.


과연 우리 사회는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를 얼마나 존중하고 있을까? 나는 이번 여름을 나면서 느꼈다. 더위는 나에겐 그저 몸이 힘들지만, 어린이나 어르신들께는 생존과 관련된 위험일 수 있다. 한 달에 20~30만원 남짓 되는 연금으로 과연 제대로 된 밥 한 끼, 여가, 에어컨을 쐴 수 있을까?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삶을 책임질 만큼 돈을 모으지 못한 것이 그들의 능력이 부족한 탓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어르신들과 더 많이 대화하지 못하고 더 시원한 집을 제공하지 못하고 왜 밥을 제대로 챙겨드리지 못하나. 국가라는 것은 국민의 최소한의 삶을 책임질 의무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 나와 부모님과 조부모님은 수없이 세금을 냈고 또, 국가가 부르면 군인으로 복무하고 또 자신의 의사를 투표로 표시하기도 했다. 또 국민의 권력이 사유화될 때면 피를 흘려 가면서 민주주의를 부르짖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현실은 왜 이런 것일까? 오늘도 노년층 일자리, 빈곤 문제가 제기된다. 그렇지만 나는 실질적인 대책(부양의무제 이슈)이나 복지의 향상을 들어본 적이 없다. 왜?


나는 우리나라의 극단적 성장의 근거에는 탁월한 국민성, 지도자의 선견지명보다는 행주처럼 짜낸 국민 개개인의 삶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사회적으로 감당해야 될 책임을 모두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고 남은 부를 경제지표를 올리는 데에, 정확히 말하면 그 경제지표를 올려주는 대기업에게 몰아주는 형태로 발전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렇게도 1번을 찍으시던 할머니에게 남은 생이 이렇게 가혹한 것은 설명할 수 없다. 나는 몸 멀쩡하고 셈도 빠르게 하시는 할머니가 일할 만한 일자리가 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없다. (최근 들어서는 조금씩 보인다 조선;;) 나는 청년 실업은 나의 문제고 매우 중요한 문제이지만, 어르신들이 능력이 없으셔서 그저 더위에서 죽어만 가게 방치하는 국가는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또, 세대별로 대화를 할 수 있는 공간과 도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저 그들은 젊은 층에게 '태극기 부대'로만 남을지도 모른다.


부디 할머니가 쾌유하기를. 남은 생에 내가 조금이나마 행복이 되기를. 할머니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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