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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타 Apr 28. 2018

정체성에 관하여

시민, 국민, 계급 그리고

오늘 남북정상회담이 있었다. 김정은 위원장과 문재인 대통령이 남과 북의 경계를 웃으면서 넘나드는 장면은 아마 영영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회담이 끝나고 올해 안에 종전선언을 하겠다는 회담의 결과를 보며 울컥하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누굴까? 내가 모르는 나의 정체성은 무엇일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수업 시간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다양한 정체성을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가 있고 크게 시민, 국민, 계급 이렇게 나눌 수 있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는 이 모든 정체성을 다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고 하나의 정체성만 부각해서 특정한 사건을 설명하려고 하는 모든 시도들은 '이데올로기'다. 어떤 생각에 옳고 그름의 논리를 부여한 것이 이데올로기고 우리는 이미 수많은 이데올로기에 빠져서 살아간다. 그리고 결국 많은 이들이 그렇게 믿으니 실제 사회도 그렇게 작동하기도 한다. 


나는 시민일까? 그렇다. 나는 내 이익에 민감하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정치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살아내려고 발버둥 친다. 그리고 최근에는 정말 많은 시간을 시민의 정체성으로 보낸다. 학교에서 하는 공부, 일터에서 하는 일, 취미생활,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 주체적인 시민이 되려고 노력한다.


국민의 정체성은 자주 주입되어서 거부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흥민 선수를 응원한다던지,  A매치를 가끔 찾아보는, 가끔은 일본과 중국의 역사왜곡에 분노하는 내 모습에 나는 국민의 정체성을 본다. 그리고 국민의 정체성은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정체성이기 때문에, 쉽게 무너지기 쉽고 그렇기에 계속해서 주입을 요구한다. 집/학교에서 수도 없이 듣는다. 그리고 나에게 그것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는 반 강제적으로 자유를 빼앗겼던 군인이었던 시절이 아닐까 싶다. 입대하기 전만 하더라도 이 경험들이 살면서 두고두고 내가 국민적 정체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국가가 나에게 진 2년짜리 빚이라는 사실은 몰랐지. 전보다는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내가 이제 막 20대 초반이 되자마자 2년을 통째로 군대에서 보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며 그 이유는 단지 내가 대한민국의 국민이어서 밖에 없다. 그렇다면 과연 남북정상회담을 보고 느끼는 감정은 무엇일까? 분명 단순히 내가 '국민'이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피스모모에서 주최한 남북정상회담 계기 2030 타운홀 미팅에 참석했었다.

어쩌면 나는 '민족'이라는 정체성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고 태어나서 보고 듣고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한국이라는 지리적 위치, 분단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상황 앞에서 자라난 민족적 정체성이다. 그리고 이 정체성은  다른 어떤 정체성보다도 강하게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자리 잡고 있음이 명백하다. 같은 말, 생김새, 음식.. 우리가 분단되어 있는 이유도 명백하다. 사실은 굳이 표현하지 않을 뿐이지 다들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를 분단시킨 세력들이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 계속해서 여러 이데올로기를 우리에게 덧씌우고 있음을. 그리고 이명박근혜 10년 동안 우리는 그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철저히 학습했다. 북한을 계속해서 적으로 돌리고 긴장을 조성하면 누군가는 이득을 본다. 확실한 것은 민족적으로는 퇴보적인 일이라는 사실이다.

남자 여자 소리 좀 안 들리게 해라

성별적인 정체성 또한 누군가를 만날 때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이다. 대한민국에서 생물학적 남성으로 태어나 자각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당신은 이미 권력을 누리고 있다. 한쪽 성별의 권력이 지나치게 비대한 우리나라에서는 '남성' 혹은 '여성'이라는 사실이 꽤나 큰 정체성으로 작용한다. 나는 의식적으로 이것을 떼내려고 하는 중인데 쉽지 않다. 가끔씩 들려오는 '남자가 ~', '여자가~' 따위의 말들이 쉽게 찾을 수 있는 예이다. 이 정체성이 나한테 상당히 많은 역할을 요구하고 또 내가 거기서 고통을 받고 혹은 권력을 누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뒤부터는 보다 더 예민하게 내 행동을 자각하려고 노력한다. 운이 좋게도 페미니즘이라는 렌즈를 얻었고 개인적으로는 성별 정체성을 해체하려고 노력 중이다.


계급적인 정체성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제 막 노동시장에 진입한 하나의 개인으로써 나의 정체성은 '노동자'다. 매 달 들어오는 급여가 중요하다. 교수님께서 매번 말씀하시기를, "과연 우리나라에서 계급적 모순이 해결되었을까?"라고 우리에게 질문하신다. 통계적으로 열악하다는 사실이 명백한 우리나라의 노동 환경에서 우리는 '노동자' 정체성으로 뭉치지 못하고 있다. 대부분이 노동자인 상황에서 노조 = '빨갱이'와 같은 자본가의 이데올로기가 우리를 지배해 왔다. 심지어 우리가 다양한 시민적 정체성으로  쪼개져서 마치 '계급적 모순'이 해결된 것처럼 보이게 하는 시도들도 일어나고 있다. 나는 이 비판에 적극 동의한다.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좋지 '노동자'로써 제대로 된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있고 여태까지 국가가 그러한 현실을 주도했다.


다른 소소한 정체성들이라면 '엔지니어' 라던지 '첫째' 라던지 '자취생' 정도의 정체성이 있을까. 아, '대학생'의 정체성도 꽤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아. 신체적인 특징으로는 변하지 않는 '키 큰 사람'의 정체성도 있을 것이다. 외모에 특정한 역할을 요구하는 한국 사회에서 '키'는 사소한 것 같지만 나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선명하게 느끼고 있다. 같은 장소에서 편함/불편함을 느낀다던지, 기본적인 의/식/주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의 차이라던지. 그 사실에서 오는 과도한 자신감은 인지하지 않으면 남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은 잊지 말아야 할 부분이다.  전보다는 조금 나아졌지만 이전에는 내 나이 또래와 대학생을 동의어로 생각하는 큰 오류를 저지르기도 했다. 학교에서 만날 수 있는 친구들은 대부분 '대학생' 정체성을 많이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사회에서 그만큼 무게를 잔뜩 짊어지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어떤 정체성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는 계속 변한다. 나는 내가 어떤 이데올로기에 반응하는지를 관찰하면서 내가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지 깨닫는다. 정체성을 탐구하면 할수록 좋은 일은 예민하게 관찰할수록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 보다 피해를 덜 주면서 관계를 맺을 수 있음을 느낀다. 거꾸로 상대방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충돌하는 부분을 쉽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이유나 정체성이 어찌 되었든, 종전 선언에 가슴이 뛰고 눈물이 울컥하는 것은 진심이고 이것도 나 자신이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관찰을 마무리해 본다. 또 당신이 느끼는 이런 감정들이 '북한은 거짓말할 거야', '정치 쇼야'라는 식으로 당신 안에서 폄하되지 않기를 바란다. 어떤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있던 우리의 감정은 진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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