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께서 요양병원에서 지내신 지 1년이 되어간다. 몇 주 전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왔던 창원으로 겨우 내려왔다. 부모님도 볼 수 있지만 할머니가 잘 계신지 걱정하는 마음도 컸다. 이런 감정은 거의 느껴본 적이 없어서 설명하기가 힘들지만 피와 시간을 나눈 가족이 계속 생각나는 자석 같은 마음. 보통 이런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을 퉁쳐서 사랑이라고 이름 붙인다면 할머니에 대한 사랑이라고 해도 될까?
집에 내려갔을 때 나는 더 늦기 전에 할머니와 수다를 두런두런 떨며 할머니의 자서전을 만들어야지 생각했다. 요양병원에 계시지만 내가 알던 누구보다 날카로웠던 할머니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렇지만 그런 안일한 기대는 시간이라는 중력에 처참히 무너졌다. 할머니는 예전 같지 않았고 내 얼굴을 알아보는 데도 몇 초 걸렸다. 옛날 일이고 뭐고 대화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미 할머니의 시계는 거꾸로 흐르기 시작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대화는 간단한 일상, 그냥 손을 잡고 눈을 맞추는 것 정도였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할머니 보는 걸 미뤄왔던 나 자신이 정말 부끄러웠다. 또, 내가 시간이 여유 있어질 때 할머니가 언제까지나 건강할 것이라고 믿었던 어리석음을 후회했다.
며칠 전 허스토리를 보고 왔다. 오후에 보러 다녀왔는데 너무 울어서 저녁에 아예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기운이 빠져 버렸다. 그렇게 울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계속 고민했는데 답은 어렵지 않았다. 그냥 내 할머니의 이야기여서 그랬다. 할머니는 무용담처럼 고무신 공장 이야기를 하셨다. 일제의 만행이 극에 달했던 항복 직전, 이제 10대 소녀가 된 할머니는 일본군 순사를 피해서 고무신 공장에 숨었고 겨우 잡혀가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몇십 년이 지났는지도 모를 지금 그때의 기억이 생생한 할머니는 허스토리에 나오는 주인공과 똑같았다. 영화는 띄엄띄엄 이어지는 우리 할머니의 이야기를 조금 더 이어 붙인 완성된 퍼즐 같았다. 영화를 보고 나서 지금 우리는 할머니를 어떤 존재로 보고 있을까 다시 고민이 머리 한쪽에 자리 앉아 떠날 줄을 몰랐다. 어릴 때 날 키워줬던 고마운 존재? 태극기 부대? 명절날 만나는 반가운 얼굴? 성차별 구조의 피해자이면서 가해자?
할머니는 내가 어릴 때부터 특별한 직업이랄 것은 없었다. 이미 나이가 많으시기도 했고 지금과 같은 직업 개념이 없는 세계에서 누구보다도 잘 살아남으신 분이었기에 그녀에게는 그냥 동네 전체가 일터였다. 내가 기억이 있던 유치원 때부터 할머니는 파지를 주워 모으셨다. 당시 돈으로 최저임금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밥값은 할 정도로 버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창 뛰어놀던 나에게 할머니의 박스 더미 (집 앞에 큰 공터가 있었다)는 놀이터와는 다른 놀이의 장소였고 또 일을 배우는 공간이기도 했다. 할머니는 나에게 용돈을 미끼로 협업을 제안했고 집에서 딱히 할 일이 없는 날에는 할머니와 함께 박스를 접고 펴고 해서 차곡차곡 쌓았다. 그 공터에 집이 들어서기 전까지 나는 할머니의 박스를 빈틈없이 차곡차곡 쌓는 실력에 매번 감탄하며 용돈도 벌고 몸 쓰는 즐거움도 느꼈다. 물론 엄마는 공부는 안 시키고 무슨 박스나 개고 있냐며 매번 화를 냈다. 중학생이 되고 학원에 갇혀 살며 집에 있는 시간이 없게 되자 할머니가 좀 아쉬워했던 기억이 난다. 할머니는 박스 전문가였고 나는 주니어 박스 빌더였다.
초등학교를 지나 중학생이 되며 학교와 학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나에게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집과 놀이터를 반복하던 생활과는 다른 사회에서 살게 되었다. 점점 뉴스에 나오는 내용을 이해하게 되고 예전보다 어려운 책을 읽었다. 그런 '사회화'의 결과는 무서웠다. 중학교 언제일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처음으로 거리에서 박스를 줍는 할머니가 창피해서 인사하면 볼 수 있는 거리였는데 그냥 지나쳤던 기억이 난다. 그 감정은 당시에는 언어로 표현하지 못했지만 이상했다. 할머니가 창피하게 느껴졌던 기분과 같은 집에 사는 할머니에게 거리에서 반갑게 인사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 함께 느껴졌다. 그 뒤로 몇 달을 그런 상태로 보냈다. 지금 돌아보면 나는 학교와 미디어에 의해 사회에 존재하는 계급을 자연스럽게 학습했고 가족 구성원이 빈민과 같은 계급처럼 파지를 줍는 것이 일인 것이 마치 부끄럽게끔 학습한 것이었다. 근데 돌아보면 놀라운 점은 어느 순간 나는 그것이 하나도 창피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부모님이 가르쳐준 것도 아니었고 대단한 책을 읽은 것도 아니었다. 내 할머니는 내 할머니였다. 학교를 학원을 친구를 만나러 오고 갈 때 파지를 줍는 할머니를 보고 나는 항상 환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할머니는 정말이지 좋아하셨고 항상 나를 꽉 안아주며 밥 먹었냐고 묻고는 했다. 항상 많이 먹었다고 그랬다. 나는 이미 그때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낮은 계급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왜곡되어 있고 가난하거나 먹고살기 위해 일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렇지만 국가가 혹은 사회가 할머니에게 해 준 것이 무엇이 있는지 고민했다. 동네 계신 어르신들을 모두 수용하기엔 턱없이 모자란 노인정? 노인정에서는 '약쟁이'라는 사람(들?)이 자주 찾아오는 듯했다. 어르신들에게 소소한 물건이나 약재 등을 광고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하고 그걸 팔았다. 또 절에 관광을 가서 수십만 원 공양하게 하고 손자/아들 이름이 적힌 상패를 제공하는 관광 콘텐츠. 이것 또한 그저 수익을 위한 사업에 불과했지 정책의 범위 안에 있는 일들은 아니었다. 그런데 유독 대통령, 지방선거, 국회의원 선거철만 다가오면 노인당엔 먹을거리와 사람들이 넘쳤다. 우리에게 '노인'이란 그런 존재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그 노인은 곧 내 엄마 아빠의 모습이고, 영원히 안 늙을 것 같은 내 모습이기도 하다. 그네들에게 한 달에 기초노령연금이라고 10만 원에서 20만 원을 쥐어주고 많지도 않은 노인정에 모셔다 놓고 시간을 보내게 하기. 조금 더 기력이 쇠해서 몸이 아프면 사람을 사람처럼 대하지도 않는 요양병원에 집어넣고 죽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 당신 어머니, 당신 아버지, 그리고 곧 내 차례다. 이번 여름 나도 더워서 죽겠다 외치고 다녔지만 어르신들이 어떻게 지내셨을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작년 여름에 날씨가 더웠던 이후로 갑자기 건강이 나빠지신 할머니를 보면서 올해 온열질환 사망자 통계와 뉴스를 본다. 나도 이걸 아는데, 대통령과 행정부라고 이 현실을 모를 리 없다. 그리고 내놓은 정책이라고는 전기세 많이 나오는 사람들의 전기세를 그것도 잠깐 깎아주는 정책이다. 저소득층, 빈민, 노인 가구에 에어컨을 설치해주는 게 아니고 이미 에어컨이 있어서 전기세 부담이 있는 사람들의 부담을 줄여주는 정책이다. 그리고 한 언론은 김포공항에 지하철을 공짜로 타고 와서 죽치고 있는 어르신들이 많다고 승객이 불편을 겪고 있다는 이상한 기사를 낸다. 그 밑에는 지하철 무임승차 제도를 조롱하고 노인을 혐오하는 댓글이 넘쳐난다. 착잡한 마음으로 창을 닫는다.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이제 본격적으로 노인 인구가 많아지면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요양병원 비즈니스'에 관한 것이었다. 치매 판정을 받으면 국가에서 보조금이 꽤 많이 나오는데, 어르신들을 많이 유치해서 이 보조금으로 수익모델을 만들어서 돈을 꽤 많이 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 수많은 요양병원들은 암암리에 비싼 가격으로 거래된다고 한다. 사람을 죽기 전까지 요양병원에 가둬놓는 것도 모자라 이제 사람 취급도 하질 않는다. 모르겠다. 이제. 다음은 내 차례일까? 그런 생각도 든다. 이런 이야길 나누던 중에 나에게 동료가 물었다. "그럼 당신은 어떻게 나이를 먹고 싶어요?" 나는 우습게도 "리눅스 토발즈 같이, 퍼거슨 할아버지처럼" 살고 싶다고 했다. 다시 돌아보니 또 대답이 참 건방지다. 그냥 보통 사람처럼 사회의 구성원으로 취급받으면서 내가 기여할 수 있는 곳에 기여하면서 행복하게 지내고 싶다. 우리 엄마, 아빠가 사회에서 할머니같이 취급당하지 않으면 좋겠다. 물론 나도.
이렇게 마음이 무거워질 때 생각많은 둘째언니의 유투브 채널을 본다.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이 노래가 참 좋다. 가사 일부를 가져오면서 글을 마친다.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죽임당하지 않고 죽이지도 않고서
굶어죽지도 굶기지도 않으며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