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타 Jan 03. 2019

정치적 올바름과 행동에 대한 반성

신념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면 어느새 아주 어릴 적 까지 되짚어 올라가게 된다. 초등학생 때 나는 때때로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벌컥 폭력을 저지르는 사람이었다. 학교의 규정이나 선생님의 '명령'은 내가 이해가 될 때까지 되묻고는 했고 중학생 때부터는 내 욕망과 학교의 규칙이 부딪치면 무시하거나 저항하기 시작했다. 속시원히 답해주는 선생님은 없었다. 나는 친구들과 혹은 선생님과 무엇이 정의로운가 따지곤 했고 항상 정답은 없었다. 학교가 그 자체로 정치적인 곳이라고 누가 좋은 책이라도 던져줬으면 좋으련만, 화만 쌓은 때였다.


이후로 학교에서, 군대에서, 광장에서, 회사에서의 경험으로 나름의 세계관을 정립해 나가던 나는 어느샌가 정답을 찾았다는 오만한 세계관을 지었다. 그리고 너무나도 쉽게 내 세계에 반하는 사람, 적합한 사람 이렇게 나누곤 했던 것 같다. 그들을 이해하지 않고 적으로 돌리는 순간 동시에 내 세계관의 성장도 멈췄고 사실은 나 자체로 이미 정치적이라는 사실을 잊고 말았다. 그 사실을 2018년의 끝무렵에 아주 쓴 약처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무리 나보다 경제적으로 낮은 계급의 삶을 이해하려 한들, 내가 아무리 여성으로 태어난 이의 서사를 읽어도 나의 조그만 몸짓 하나가 그들에게는 기득권이니까 할 수 있는 행동일 수 있다. 나는 누군가 비밀번호를 몰래 알아내 집에 집에 침입할까봐 늘상 걱정하는 20대 여성의 주거환경을 몸으로 체감하고 있지 않다. 그래서 나는 여성이 아닌 이들의 페미니즘을 조롱하는 이들의 의견에는 일말의 사실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폭력이 페미니즘이 만들고자 하는 세상에서 용인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20대 건강한 (사회적 남성) 대졸자라는 정체성은 내가 살아온 궤적, 나의 생각의 방향과 합쳐져 그 자체로도 어떤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는 정치적 시선이다. 가지 말아야 될 방향은 분명 존재하지만, 지금 누군가의 방향이 나와 맞지 않다고 해서 쉽게 배제해버리는 것은 그 자체로 폭력이며 또 권력일 수 있다. 


연말이라 집으로 내려갔고 가족들과 대화를 나눴다. 이런 고통스러움이 머릿속에 가득 차서 있는 상황에서 가족들 개개인의 정치적 목적이 너무 선명히 보여 대화하기가 힘들었다. 삶의 방향에 있어서 정답을 정해 놓고 타인에게 강요하는 이와의 대화는 힘이 든다. 특히, 가까운 이라면. 그리고 그 모습이 거울처럼 나의 모습이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더 힘들었다. 


'사실' 자체가 조작되는 가짜뉴스가 범람하는 시대가 왔다. 아니, 과학과 기술은 이미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수없이 이용되어 왔다. 지금에서야 이름표가 붙었을 뿐. 전제하고 있는 사실 자체가 다르면 다른 이와 대화는 시작하기도 힘들다. 최근 시도되는 공론화의 장에서도 확실한 과학적 '사실'을 전제해 놓고 대화를 시작한다. (신고리 5,6호에서는 애매했다고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강한 신념을 가지는 일이 주저된다. 나 또한 기득권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자기검열이 앞선다. 그렇다고 해서 나와 내 주변 사람들, 크게는 지구를 위하는 방향이 바뀌진 않겠지만. 그 방향 또한 정치적이라는 사실을 문득 문득 느낄 때마다 전보다 말수가 줄고 조심하게 된다. 


나는 정치적 올바름은 여전히 포기할 수 없지만 앞으로 타인의 정치적 올바름을 쉽게 판단하는 오만함은 저지르지 않으려고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할머니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