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계적 망각, 기억으로 연결한 역사 by 이룸
어릴 때 어른들이 몇 가지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는 것들이 있다. 왜 전쟁은 일어나는지? 왜 누군가는 굶주리는지 말이다. 그리고 분명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홍등가의 불빛 또한 어른들은 설명해 주지 않는다. 지금은 왜 그들이 나에게 설명해주지 않는지 안다. 그들도 모르기 때문이다. 국가가 성매매를 다루는 방식 또한 모순적이다. 원칙적으로 불법이지만 특별한 구역을 정해서 '관리'한다. 사는 이들은 엄청나게 많지만 항상 처벌과 비난은 몸을 파는 여성의 몫이다. 이 책은 한창 재개발이 진행 중인 청량리 성매매 집결지에 대한 기억의 조각이다. 지난 12월 10일 마감된 텀블벅 프로젝트다.
잘 더듬어 보니 나에게도 청량리에 대한 기억이 있다. 청량리 역에 내려 별생각 없이 골목을 걸어가다 보면 어느새 '거울방'이 나온다. 나 또한 그곳을 '대체 뭐하는 곳이지?'라는 생각으로 대낮에 지나쳤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유럽 여행 중 암스테르담의 홍등가를 지나치면서 갑작스레 살아났다. 유럽에도 네덜란드와 독일같이 성매매가 합법인 나라가 많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동유럽의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나라의 여성들의 높은 이주율이 존재한다. 남성 중심적인 자본주의의 민낯인 성매매는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다. 우리는 성매매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매매를 이야기할 때마다 우리 사회의 권력구조가 너무나도 쉽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책은 크게 세 부분. 1부 청량리 성매매 집결지의 역사, 2부 이룸, 청량리 집결지와 연을 만들다, 3부 청량리 집결지 폐쇄 그 이후 이렇게 구성된다. 1부는 조선 왕실 대한제국 말기부터 발전한 청량리 일대를 역사를 다룬다. 이어서 집결지의 규모와 그곳을 관리하던 수많은 정책들. 그리고 현재 재개발에 이르기까지 사실들을 나열한다. 그리고 2부는 이룸이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청량리에서 활동했던 이야기다. 이룸은 자활프로그램의 일부로 탈성매매를 위해 의료/법률지원, 직업훈련을 지원했다. 이 역시 국가의 '탈성매매' 위주의 정책에 의해서 진행됐다. 그렇지만 결국에 국가의 과도한 통제, 여성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 관리를 위한 정책이었다는 것을 인식한 이룸은 국가 지원사업을 그만둔다. 그 이후에 1년 정도 더 자력으로 운영하려고 노력하지만 역시 자원의 부족으로 마무리된다. 다음으로는 '불량언니작업장' 이라는 중년 성판매자 여성을 중심으로 한 모임을 운영하고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3부에는 성판매 여성들의 청량리 일대에 대한 감정과 불량언니작업장에 관한 이야기로 책을 마무리한다.
책을 읽는 일은 쉽지 않았다. 역사 부분은 그저 사실일 뿐인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도 심호흡이 필요했다. 더욱 충격적이었던 것은 국가는 성매매를 아주 오래되고 체계적이며 의도적으로 감시와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어지는 성판매 여성들의 '일'에 대한 기억과 청량리 588 지역에 대한 기억들 또한 며칠을 쉬어가며 읽어야 했다. 손님과 업주들의 만연한 폭력. 그리고 헤어 나올 수 없게 만드는 구조. 업주와 여성의 분배 비율, 펨푸가 낄 때 바뀌는 비율 등등. 이 차가운 숫자들은 정말 읽기 힘들었다. 토착 조폭/업주세력이 만들어낸 집결지의 봉건적인 지배구조에 대한 기억은 신문에서 쉽게 쓰이는 의견들과는 무게가 달랐다.
아직 이 책을 서점에서 팔지는 않는 것 같다. 주변의 페미니즘 서점이나 지인들에게 문의해서 읽는 법 밖에는 없을 것 같다. 아직 이룸에서 개별적으로 판매한다고 들은 것 같기도 하다. 물리적인 공간은 이제 사라지지만, 제2, 제3의 청량리 588은 이미 전국 여기저기에 존재한다. 이 책을 통해 그 구조에 대해서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이것은 성매매 찬/반의 문제가 아니다. 어차피 그런다고 사라지지도 않는다. 어느 편에 설 지는 읽는 사람들의 선택이다.
마지막으로 이룸과 관련된 링크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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