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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타 Dec 11. 2016

삶과 확률

도구의 발전과 선택의 확실성

우리가 내 삶의 통제권을 가진다는 말은 어쩌면 나의 행동과 그에 대해 가져올 결과를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기에 가능하다. 나는 과거에 비해 현재 사람들이 수많은 일을 할 수 있는 이유는 기술의 발전에 의해 특정 행동에 대한 확률이 비약적으로 상승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내가 A라는 공간에서 B라는 공간으로 이동할 때, 길찾기 어플리케이션을 사용하는 데, 이것은 현재 내가 사용가능한 자원들을 모두 나열해 줄 뿐만 아니라, 이성적으로 가장 빠른 경로를 제시한다. 물론 단지 수치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그 과정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 지는 모른다. 예를 들면 버스로 최단경로로 나와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퇴근시간에는 적용되는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조금 더 걸리더라도 지하철을 활용한 경로가 퇴근시간에는 더 빠를 수 있다는 일이다. 아직은 이런 수치화되지 않은 지식들이 있다. 그렇지만 이것들이 모두 통계화되고 수치화된다면 우리는 특정 행동을 수행할 때 미리 관찰된 높은 확률의 방법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위험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가장 빠르거나, 가장 비용이 작은 행동만을 선호한다면, 우리의 선택권은 거꾸로 제한되는 일들이 발생한다. 이것을 주관적 이성이라고 말한다. 흔히 말하는 '가성비'와 인터넷 쇼핑몰의 특정 상품의 열풍이 그것의 좋은 예이다. 도구들의 발전은 철학적으로도 상당한 변화를 가져온다. 과거에는 '행동을 먼저 하고' 그 다음 결과가 따라오는 식의 삶의 방법론이 통했다면 이제는 먼저 생각하고 도구를 잘 사용하고 확률이 높은 선택지를 고르는 방법이 내가 원하는 목표를 이루는 데에 훨씬 가능성이 높은 방법이다. 이것은 근대를 관통하는 '이성'의 물결의 연장이다. 이성과 자신의 의도로 많은 것을 정복하는 일에 익숙해진 현대인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자신의 의도대로 할 수 없는 자신 밖의 '타인'과의 소통에 점점 더 어려움을 겪는다. 사용하는 도구, 교육이 우리의 사고 회로를 이성적인 방법으로 발달시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직 그런 '이성'의 영역이 침투하지 못한 영역은 남아있고 이런 분야에 종사하거나 도구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이제 점점 더 사회적인 소수자로 취급받게 된다. 반대로, 나는 이런 이성적 확률을 꿰뚫는 '인간의 가능성'을 믿는다. 어떤 확률로도 설명이 불가능한 인간의 선택, 그리고 그 과정의 아름다움. 과연 여태까지의 나의 삶은 나 자신의 이성이 얼마나 이끌어 왔을까? 나는 도구에 이끌려 지금의 선택들을 계속해서 해오지 않았나? 나는 사람이라는 가치를 외면하고 계속해서 더 이성적임을 요구해오지 않았을까?


나는 정말로 얼마만큼 생각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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