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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호 May 13. 2021

바다를 따라 걷는 이 길 끝에

5구간 (3.29)

해무가 끼여 수평선이 안 보인다. 남원포구에서 걷기를 시작했다. 해변을 따라 걷는 길이 해안 숲을 드나들며 파도소리가 걸음을 따라온다. 해변 숲 사이로 바다가 드러나면 어김없이 검은 기암괴석이 나타난다. 검은 화산암이 파도가 만든 하얀 포말을 뒤집어쓰고 있다.


해변길이 지루해질 만하면 바닷가 마을이 나타난다. 한 할머니가 일구었다는 동백나무 군락지를 지난다. 철 지난 동백꽃이 뚝뚝 떨어져 길바닥에 나뒹굴고 있다. 아름다운 동백이 철을 지나니 피를 토한 듯한 붉은 빛깔을 잃어버렸다. 우리도 나이를 먹으면 그렇다. 마을에서는 간혹 작고 이쁜 카페를 지나친다. 바다가 보이는 테이블에 앉아 커피 향을 음미하고 싶지만 이쁘다고 지나치는 카페마다 들를 수는 없다.


길은 위미리 어촌으로 이어진다. 예쁜 어촌이다. 어촌을 따라 해변 쪽으로 만든 야트막한 돌 둑에는 재미있는 글을 스테인리스 판에 새겨 장식해 놓았다. 돌 둑길에 붙여놓은 재미난 글들을 읽으면서 걷다가 건너편에 있는 카페에 들렀다. 카페의 탁 트인 창이 바다와 마주 앉게 해 준다.


 ‘왜 걷는가?’ 해변 카페서 쉽게 만날 수 없는 아포가토를 앞에 놓고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보았다. 해무가 여전히 바다와 하늘의 구분을 알 수 없게 하고 있다. 걷는 것은 살면서 생긴 마음의 앙금을 정화시켜준다면 답이 될까. 걷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주변의 경치에 빠져들게 되면 오감이 살아나며 마음이 가라앉는다. 에스프레소에 젖은 아이스크림을 한 스푼 입에 넣는다. 씁쓰레한 달콤함이 이 길을 걷는 내 마음과 같다.


 ‘우리 십 년 뒤에 뭐 하고 있을까.’ 카페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진에 한 커플이 이어폰을 나누어 끼고 속삭이고 있다. 이곳에서 촬영한 영화의 한 장면이다. 지금은 제주도의 바닷가를 걷고 있는데 십 년 후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달콤 씁쓰레한 아포가토 마지막 남은 한 모금을 삼키며 지금이나 십 년 후나 오늘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해 본다. 또 걷기 위해 카페를 나섰다. 음악을 들으려고 하니 이어폰이 없다. 아침에 충전시켜 놓고 그냥 나왔다.


길을 걸으며 음악을 들으면 즐겁기도 하지만 때로는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멜로디나 공감이 가는 가사에 울컥해지기도 한다. 누군가를 생각나게 하고  추억이 현재의 슬픔으로 다가오면 아릿한 감상이 솟아난다.  길은 걷기에 좋은 아름다운 길이다. 쇠소깍에 닿아 걷기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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