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없었다면?
주말에는 남편이 있지만 더 힘든 건 우리 집만의 사정일까?
어린이집에 가지 않는 첫째와 출근하지 않는 남편 덕분이다. 남편을 사랑하지만, 남편의 정리 정돈하지 않는 습관은 사랑하지 않는다. 첫째 딸도 정리를 싫어한다. 놀잇감을 정리하려 하면 ‘그건 내가 아직 놀고 있던 건데’ 하며 울먹인다. 나는 모든 물건이 제 자리에 있어야 마음이 정돈된다.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하게 매일 청소하지는 못해도, 물건에는 각자 자리가 있다고 생각하므로 쓴 물건은 바로 제자리에 돌려놓는다. 주말이 되면 그런 나와는 정반대인 첫째 딸과 남편, 그리고 아직 그런 개념이 없는 둘째까지 총 세 명이 온 집안을 돌아다니며 어지럽힌다. 사방팔방 돌아다닐 수 있는 첫째는 이 방에서 하나, 저 방에서 하나씩 물건을 꺼내오고, 행동반경이 더 넓은 남편은 높은 곳에서도, 냉장고 안에서도 물건을 꺼내온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쓰고 그냥 그 자리에 둔다는 것이다. 아직 어린 둘째는 그리 많이 손이 가지 않지만, 둘째의 생활 흔적도 잠깐 마음을 놓으면 금세 혼돈 상태가 되므로 방심할 수 없다.
특히 주말이 고된 이유는 ’돌밥‘ 때문이다. 밥 차리고 먹고 정리하는 것이 별 일 아닌 것 같아도 항상 사람의 손길이 필요한 일이다. 식세기 이모님은 주말에 세끼를 열심히 일해주신다. 이에 더해 여기저기 쌓여있는 먼지들, 주말에 정리하려고 방치해 둔 물건들은 나의 정신을 사납게 한다. 주말에는 아침부터 세끼 밥을 해 먹이고 치우고 사이사이 둘째에게 수유하고 기저귀를 갈아준다. 외출 노래를 부르는 딸을 위해 잠깐 다 같이 나갔다 와서 청소기 돌리고 정리하다 보면 금세 잘 시간이다. 두 아이를 먼저 씻기고 뒤치다꺼리하다 보니 엄마는 씻기도 쉽지 않다. 겨우 세수만 하려고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 앞에 섰는데 한숨이 먼저 나온다. 에휴. 그리고 이를 닦는 짧은 시간 무제한 상상회로가 돌기 시작한다.
애들이 없었다면, 이 시간에 유유자적 목욕탕에 다녀오고 카페에 들러 커피 마시면서 책 읽고 노닥노닥했을 텐데. 주말에 산으로 들로 트래킹 다니고 자전거 타고 그림 그리고 서핑하고 듣고 싶은 워크숍 실컷 듣고 공부했을 텐데. 이런 장면이 떠오르고 웃고 있는 내 모습까지 단숨에 그려진다. 지금보다 훨씬 잘 관리된 몸과 건강, 지적 능력, 업무 능력, 깔끔한 생활환경까지 단번에 상상해 버렸다. 에휴. 그래서 사람들이 결혼을 안 하나 봐. 그래서 사람들이 애를 안 낳나 봐. 갑자기 모든 게 이해가 되네.
그런데 정말 아이들이 없었다면 내 삶은 어땠을까? 그래도 나는 잘 살았을 것이다. 호기심도 많고 취미도 많아 결혼하기 전에도 24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 밀려오는 공허감, 외로움도 함께 떠오른다.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고자 맥주 한 캔을 찾고, 이유 없이 쏘다니고 나중에 후회할 쇼핑을 하며 다닌 시간들이 떠오른다. 그 누구보다 유리멘털이었던 내가 결혼과 육아를 통해 얼마나 단단해졌는지, 마주하기 불편한 것들을 마주할 용기를 얻게 되었는지 떠오른다. 무엇보다 아이들과 남편이 있으며 복닥 복닥하고 소란스러운 일상이 즐겁다. 이 삶이 나에게 얼마나 잘 맞는지, 나에게 얼마나 큰 행복을 주는지 알아버린 지금, 머리로 아무리 상상해도 그 시절로 돌아가지는 못할 것 같다. 방금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이 찾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이 발칙한 상상에 버무려 피식 웃고 보내버렸다.
세상에 항상 즐겁고 행복하기만 한 일은 없다. 또 항상 괴롭고 아프기만 한 일도 없다. 행복하고 즐거운 일 가운데도 괴롭고 짜증 나는 시간이 있고, 괴롭고 슬퍼도 미소 지을 수 있는 일이 버무려져 있다. 전쟁 같은 주말이 지나면 첫째는 등원하고 남편은 직장에 출근할 것이며 둘째는 조용한 집에서 평온하게 낮잠을 자고 나는 한가롭게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올 것이다. 조금 더 지나면 복직하고 그야말로 ‘여유롭게’ 점심식사를 하는 날도 올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지나면 아이들이 자기 공부를 하고 나도 내 공부를 하는 그런 시간도 올 것이다. 언젠가는 아이들이 모두 떠나고 아무도 어지르지 않는 깔끔하고 정돈된 집에서 사는 날도 올 것이다. 그런 날이 오면, 오늘 같은 날들을 얼마나 그리워하게 될까. 아무리 힘들다고 징징대도, 지금이 내 삶의 가장 반짝이는 순간이다. 나는 가보지 않은 길을 아쉬워하지만, 내가 가는 길이 누군가에게는 '가보지 못해 아쉬운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