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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육아휴직 중입니다

당신은 요즘 무슨 생각하며 지내?

by 마루마루

남편과의 대화는 대략 이렇다.


'잘 잤어요?' '좀 더 자요.'

'잘 다녀와요.'

'잘 다녀왔어요?'

'점심 뭐 먹었어?'

'오늘 일 어땠어?'

'오늘 첫째가 / 둘째가 이랬어. 너무 귀엽지?'

'저녁 먹어요.'

'잠깐 뭐 할 테니 애들 좀 봐줘요.'

'다음 여행 어디 갈까?'

'먼저 잘게요.'

'(월급일) 이번 달도 고마워요. 수고했어요.'


다 써놓고 나니 단란한 가정의 모습 같다. 아쉬운 것은 저게 대화의 전부라는 것이다. 연애할 때는 밤새도록 문자를 보내고 전화를 했고, 만나면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신혼 시절에도 시시콜콜 일상을 공유하고 수다 떨었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나서 대화의 범위가 급격히 줄었다. 아이들 자라는 것만 봐도 재밌고 충분한 이야깃거리여서 그랬다고 좋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이야기를 해주고 싶을 만큼 재밌는 취미를 즐길 시간도 없고 아이를 보는 것 말고는 공통의 대화 주제가 사라지고 있다는 뜻이다. 때로는 이렇게 사는 건가 싶다가도 내 삶은 어디 갔나 한숨이 나온다.




대화가 피상적인 첫 번째 이유는 '서로의 가시 돋친 부분을 건드리지 말기 위함'이다. 우리 부부는 둘 다 갈등을 싫어하고 속으로 참고 넘어가는 게 많은 성격이어서 화가 날 것 같으면 차라리 말을 하지 않는다.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는 내 입장에서는 그저 스마트폰 화면만 들여다보며 수수방관하는 남편의 태도에 불같이 화가 날 때가 종종 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그래 지금은 내가 휴직 중이고, 맞벌이하다가 갑자기 외벌이가 된 지 벌써 수개월 됐으니 남편도 압박감이 상당하겠지. 그냥 두자. 시간이 지나가면 나아지겠지'라고 생각하지만 불쾌한 마음은 쉬이 가시지 않는다. 평소의 남편은 웬만한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어주고 유머러스하지만, 일이 힘들 때는 말수가 급격히 줄어든다. 결혼 6-7년 차 무렵이 되어서야 표정과 반응을 통해 '오늘 일이 괴로웠구나' '오늘은 말을 걸어도 본전도 못 뽑겠다'는 감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날은 억지로 이야기를 하려 해 봐야 좋은 답을 듣기 어려우므로 그냥 내버려 둔다.


두 번째 이유는 시간 부족이다. 남편이 퇴근하고 오면 밥 차려서 먹고 먹이고 정리하고 씻고 씻기고 나면 잘 시간까지 한 시간 남짓 남는다. 그 시간에는 아이들도 부모와 놀고 싶어 하므로 둘이서 단란하게 대화하기는 쉽지 않다. 남편이 칼퇴를 해도 이 정도고, 야근이나 회식이 있으면 대화할 시간이 전혀 없다 업무 시간에는 워낙 바빠서 전화하거나 문자로 시시콜콜 이야기할 시간이 없다. 함께 정해야 할 것과 전달 사항은 문자로 한다. 무엇보다 나는 아이들을 재울 때 함께 자고 새벽에 일어난다. 남편은 밤에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출근 시간에 맞춰 일어난다. 우리가 대화하기에는 생활 리듬이 맞지 않는다.


세 번째 이유는 간섭쟁이 첫째다. 관심을 독차지하고 싶고 대화에 끼고 싶은 첫째는 우리 부부가 자기가 잘 못 알아듣는 이야기를 하면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라고 꼭 묻는다. 대개는 사소한 주제 - 어떤 길로 목적지까지 갈까, 이번 주말 가족 모임에는 뭘 준비할까 등등 - 인데, 어른들은 주제가 갑자기 바뀌어도 상황과 맥락을 보고 이해하지만 아이들에게는 그게 쉽지 않은 모양이다. 우리의 이야기가 첫째가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한 범위에 한정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최근 모처럼 남편과 대화할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다. 한 번은 영화 '혹성탈출'을 보고 온 날이었다. 남편은 어려서부터 수많은 영화와 팝송을 섭렵하며 살아와서 혹성탈출, 스타워즈, 스타트렉 등 고전 영화 시리즈라면 모르는 게 없다. 모처럼 영화를 보고 왔더니 내용을 궁금해했다. 아이들을 케어하느라 대충 이야기했더니 서운한 눈치였다. 그런데 그날은 아이들을 재우고 눈이 번쩍 뜨여서 (이런 일은 거의 없다) 화이트보드에 관계도와 이벤트들을 그려가며 남편에게 설명해 줬다. 갓 개봉한 영화라 스포일러도 없고 본 사람마다 호평이 줄을 이어서 많이 궁금했단다. 내가 이런 설명을 하면 '그건 이거의 오마쥬야'라고 이야기하고, 저런 설명을 하면 '그건 전작에서 그랬던 거야'라고 맞장구를 쳐 줬다. 이야기를 다 하고 영화 관람 포인트를 찍어주는 유튜브 클립을 몇 개 같이 봤다. 별 일 아닌 것 같은데, 매우 따뜻하고 포근한 시간이었다.


두 번째는 당일치기로 시골에 다녀온 날이었다. 아이들은 모두 카시트에서 곯아떨어졌다. 남편이 어두운 길을 운전했다. 나는 옆에서 가만히 있었다. 딱히 뭐라고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남편이 '요즘 무슨 생각하면서 지내?'라고 묻는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했지만, 찬찬히 생각해 보고 이야기를 했다. 아이들 양육의 기준에 대한 고민, 나의 복직에 대한 고민, 다가올 세상의 모습과 삶의 모습에 대한 고민 등. 그리고 남편에게도 물었다.


'당신은 요즘 무슨 생각하면서 지내?'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남편은 남편의 방식으로 중년의 위기를 헤쳐나가는 중이었다. 아이들이 너무 예쁘고 사랑스럽지만, 아이들이 커가며 함께 늙어가는 자신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려 애쓰고 있었다. 남편은 스마트폰을 손에서 떼지 않고, (내가 보는 대부분의 시간) 영상을 보거나 듣고 있다. 나는 그 모습이 답답하고 때로는 한심하게 느껴졌고, 초반에는 잔소리도 하고 짜증도 냈으나 이제는 '자기 인생 자기가 알아서 해야지 뭐' 모드로 방관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편은 그 안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뭔가를 찾아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남편과는 반대로 활자 매체를 선호하고 영상물의 피상성과 말초 자극성을 싫어한다.) 아이들의 시간을 기다려주듯, 남편의 시간을 기다려줘야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너무 오랜만에 이야기를 해서 어색했지만, '그래, 우리가 부부가 맞네.'라고 생각했다. 언제 만나도 반가운 친구처럼, 한동안 각자의 일로 바빠 잠시 멀어진 것 같아도, 다시 만나면 누구보다 반갑고 소중하다. 아이들이 크는 것은 잠깐이다. 아이들이 엄마 품에서 자고 싶다고 하는 것도 길어야 10년이고, 20년만 지나면 성인이 되어 스스로 삶을 결정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다시 부부가 남는다. 나의 가장 가깝고 소중한 사람은 법적으로도 0촌으로 정해진 남편이다. 남편이 있음에 다시 한번 감사하고 더 많이 아끼고 사랑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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