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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육아휴직 중입니다.

공감 과잉

by 마루마루

정신과 의사인 나에게 언제나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공감'이다. 공감의 국어사전적 정의는 '남의 의견, 감정, 주장 따위에 자기도 그러하다고 느낌, 또는 그렇게 느끼는 기분'이다. 영어 관용구로 'put one's shoes on'라고 한다. 가끔 엄마의 신발을 바꿔 신어보면, 발 사이즈가 같은데도 이렇게 다르구나 싶을 때가 있다. 신발을 바꿔 신어 보지 않으면 그 사람의 발을 절대 알 수 없다. 진료실에서 나는 상대방의 마음의 신발을 신어보는 마음을 가지려고 항상 노력했던 것 같다.


그런 내가 출산을 하고 아이와 시간을 보낼 때 항상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아이의 감정의 흐름에 공감하는 것이었다. 아이의 마음의 신발을 신어보려 끊임없이 노력하던 나의 육아는 진료실의 확장판이었다. 그렇게 생각했구나, 그렇게 느꼈구나, 그랬구나, 를 입에 달고 살았다. 그런 나를 보며 사람들은 자상하다고 했고, 역시 정신과 의사 엄마라 다르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아이는 공감을 많이 받는 것 같은데, 어딘가 항상 부족한 느낌이었다. 공감의 기능에는 자신의 감정을 타인이 인지해줌으로써 스스로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감정을 조절하도록 돕는 것이 있다. 아이는 '어떻게 느끼니?'라는 질문에 '모르겠어요'라고 자주 답했고, 말로 뭔가를 표현하기도 전에 눈물이 먼저 펑 터져버리는 편이었다. 어린이집과 유치원 선생님들도 아이의 특성으로 가장 먼저 '눈물'을 꼽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내가 워킹맘이어서 그랬을까? 유전적으로 나를 닮아서 그랬을까? 아직 말이 서툴러서 그런 걸까?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종종 자책하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두 번째 육아휴직에 들어오면서 이 부분을 파헤쳐보겠느라 마음먹었다.




둘째를 낳고 조리원에 다녀오며 아이의 '모르겠어요'가 부쩍 늘고 눈 맞춤도 눈에 띄게 떨어졌다. 아무리 오래 말해주고 이해시켜 주며 좋은 어른들이 주변에 있다고 하더라도, 엄마의 부재는 아이에게 보통 이상의 충격을 준 모양이었다. 아이의 마음을 최대한 알아주고 단둘이 지내는 시간을 늘려보고자 애쓰자 아주 천천히 '모르겠어요'가 줄었다. 목소리도 커지고 눈 맞춤도 나아졌다.


문제는 아이에게 맞춰주고 공감하려 노력할수록, 내가 소외된다는 것이었다. 나도 사람이기에 욕구가 있다. 피곤하면 쉬고 싶고 졸리면 자고 싶다. 화가 날 때도 있고, 이 정도는 알아서 해줬으면 하는 기대도 있다. 하지만 이런 감정들이 어디로도 발산되지 않고 내면에 꾹꾹 쌓이니, 감정이라는 에너지가 어디로라도 빠져나가고 싶어 하는 게 느껴졌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아이는 언어가 빨랐고 상대방의 눈치를 잘 보는 편이기 때문에, 내가 '이만저만해서 잠깐 쉬었다가 놀자'라고 하거나 '엄마는 잠깐 누워있을게'라고 했다면 서운하게 느꼈을 수는 있겠지만 이해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가 나와 놀고 싶어 하니까'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나의 욕구가 계속 무시당하고 나 스스로를 소외시킨 것이다. 나 역시 관계의 주체임에도 말이다.




이것을 알아차린 후, 나는 나의 욕구와 필요를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째가 아파 등원하지 못하던 때,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아 컴퓨터로 일을 해야 했다. 둘째가 낮잠을 잔 사이, 구글타이머로 45분을 맞추고 '엄마는 지금 일 해야 하거든. 이 시간 다 갈 때까지 00가 혼자 놀아야겠다.'라고 말했다. 아이는 '엄마 너무 길어요'라고 투정 부렸지만, 그 시간이 갈 때까지 혼자서 그림도 그리고 책도 꺼내 읽었다. 물론 종종 옆에 와서 '엄마 이거 내가 그렸어요. 뭐게요?'라고 물어보거나 '엄마 이것 좀 도와주세요'라고 하기는 했지만 나는 45분간 차분하게 일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45분이 지난 후, 노트북을 닫자 '엄마 일 다 끝났어요? 이제 놀아줄 수 있어요?'라고 물었다. '00가 혼자서도 재밌게 노니까 45분이 금방 갔네?'라고 말하자 내가 해냈다는 듯한 뿌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모든 것을 아이에게만 맞춰주는 엄마의 모습에서 첫째는 무엇을 배웠을까? 말로 하지 않아도, '내 욕구는 중요하지 않아, 상대방에게 맞춰주는 게 중요해'라는 것을 배운 게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이 드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네가 엄마와 놀고 싶은 건 이해했어. 하지만 엄마는 지금 좀 힘든데 30분만 누워있다가 놀면 어떨까?' 아이에게 이런 말을 한 번도 하지 못한 이유는 뭘까. 워킹맘이라는 죄책감, 둘째로 인해 함께 보내는 시간이 줄어든 것에 대한 미안함, 아이의 욕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걱정, 이런 것들이 아이에 대한 과도한 몰두와 과잉 공감을 불러일으켰던 것 같다. 그것이 일하는 내내 힘들었던 이유였던 것 같다.


아이와 나의 지속 가능하고 건강한 관계를 위해, 나에게도 충분히 공감해야 한다. 내 신발이라 내가 어디가 어떠한지 더 알기 어렵다. 그러니까 연습이 필요하다. 과유불급. 아이를 향한 공감도 과하면 탈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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