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관계 속에서 산다
나의 아버지는 5남 3녀 중 막내이다. 팔 남매가 흔하다면 흔하던 시절이지만, 팔 남매가 모두 장성하고 각자의 가정을 꾸리며 사는 것은 어쩌면 보기 드문 일이리라. 나의 아버지는 막내아들임에도 결혼하고 10년 넘게 부모님을 모셨는데, 그마저도 중간에 주재원 발령으로 출국하지 않았더라면 더 오래 모셨으리라 어렵지 않게 추정할 수 있을 정도인 진성 효자다. 아버지의 가족 사랑은 아주 특별해서, 부모님 (나의 조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도 지금까지 아버지는 가족 모임을 주도해 왔다. 명절마다 함께 성묘를 가고, 기일마다 모였으며,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가족들을 모두 모았다. 아버지 시대의 내부 사정을 나는 잘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볼 때는 가족의 그 모임이 끈끈하게 유지되도록 하는 데 아버지의 몫이 분명히 있다.
한편 팔 남매의 막내인 아버지의 자식인 나와 내 동생은 사촌 언니오빠들보다 한참 어렸다. 한 살 차이도 어마어마하게 느껴지는 어린 시절, 언니 오빠들은 왜 그렇게 커 보이기만 했는지, 항상 어딘지 뒤쳐지고 끼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그 느낌이 어떻게 되기도 전에 아버지의 외국 발령으로 우리 가족은 10년 간 외국에서 살게 되었다. 할아버지, 아버지의 형제 부부, 사촌 언니오빠들이 자주 놀러 오셨고, 그럴 때마다 우리 집에서 모셨던 것 같다. 나 역시 가끔 한국에 들어오면 언니오빠들이 챙겨주기도 하고 고모 집에서 기거하기도 하며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한국에서 함께 부대끼고 살지 않아서인지, 친해지는 데 오래 걸리는 나의 성격 때문인지, 모든 배려가 감사했지만 어딘가 거리가 느껴졌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 살면서 결혼할 때까지 가족 모임에 종종 참석했지만, 이 거리감이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아버지의 형제들이 나와 나의 동생을 예뻐하고 사랑해 준다는 것은 알았지만, 때로는 부담스러웠고 때로는 '막내'라는 이름으로 몰이해당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결혼을 하자 자연스럽게 나의 본가 (남편에게는 처가) 부모님을 뵙는 것 외의 친척 모임에는 이런 핑계, 저런 이유로 가지 못했다. 둘째의 돌잔치 바로 다음 날에 친할머니의 추도식으로 모이기로 했는데, 당연히 못 갈 것이라고 생각했고 갈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못 갈 이유도 없을 것 같았다. 돌잔치로 체력이 방전된 둘째는 다음 기회에 가기로 하고 첫째만 데리고 길을 나섰다. 이런 결심을 한 이유는 외국에 사는 사촌언니가 오랜만에 한국에 온다는 것과, 좀처럼 만날 기회가 없던 다른 사촌 언니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 첫째 딸에게 사촌 언니를 만나게 해 줄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첫째에게는 비교적 자주 만나는 (그래봐야 1년에 4-5번이지만) 한 살 터울인 사촌 언니가 있다. 하지만 다른 사촌 언니도 있고, 사촌 오빠들도 있다고, 너의 가족은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아버지의 형제들이 10명 (이들을 1대라고 부른다), 나의 사촌들이 9명 (2대), 그리고 우리 딸과 그 사촌들이 6명 (3대), 총 25명이 모여 있었다. 내가 어릴 때도 이 모임에서 막내였는데, 나의 딸이 이 모임에서 또 막내다. 낯가림이 심한 첫째가 낯가릴 틈 없이 사촌 언니들이 놀아주고, 이모할머니 (나의 고모들)이 끊임없이 칭찬해 주니 기분이 좋았던 모양이다. 다시 이모할머니 집에 가고 싶다고 하고, 몇 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종종 '이모할머니 집에 가고 싶다'라고 하는 것을 보니 아이에게는 꽤나 즐거운 시간이었던 것 같다. 아이가 무엇을 어떻게 느꼈는지는 앞으로 찬찬히 펼쳐지겠지만, 가까운 길은 아니었지만 데리고 다녀오길 잘한 것 같다.
나에게도 뜻깊은 시간이었다. 나 역시 이 가족의 존재를 잊고 살았다. 사촌 언니 오빠들과 한 자리에 앉아보니, 어렸을 때는 그렇게 크고 영영 끼지 못할 것 같았던 하늘 같은 언니 오빠들도 이제는 함께 나이 들어가는 친구 같았다. 언니 오빠들에게 나는 여전히 '세상 물정 잘 모를 것 같은' 막내 동생이겠지만, 나는 이제야 이 자리가 어색하지 않다. 내가 이렇게 느낄 수 있게 끊임없이 배려해 준 언니 오빠들이 없었더라면 이런 느낌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1대 어른들을 거실로 내쫓고, 2대끼리 주방에 모여 커피와 와인에 별 것 아닌 이야기를 한다. 어른께서 들어오면 '여기 낄 나이 아니에요, 얼른 나가세요~' 하며 돌려보내고, 아이들이 들어오면 '엄마 잠깐 이야기하고 금방 갈게'라고 하지만 엉덩이를 뗄 생각은 없다. 수년에 한 번을 보기 어려운 사이인데, 언제 만나도 반가운 사람이 있다는 것이 참 신기했다. 짧은 시간이 훌쩍 지나고 헤어질 때는 어찌나 아쉬운지. 그래서 사람들이 밤새 이야기하려고 그렇게 여행들을 떠나는구나, 처음으로 생각했다.
우리는 모두 관계 속에서 산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대가족의 해체'로 인한 '핵가족화'가 공공연한 문제처럼 제기되었는데, 이제는 그마저의 가족도 점차 해체되는 것 같다. 초연결시대가 되어갈수록, 사람들은 더 외로워지고 정신과 진료의 수요는 더 늘어나고 있다. 첫째를 데리고 간 이유는 우리가 이런 관계 속에 존재함을 말해주고 싶어서였다. 우리가 스스로의 힘만으로 서 있는 것 같아도, 이런 관계 안에서, 이런저런 무게 속에서 나름의 균형을 찾아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알려주고 싶어서였다. 아이들이 노는 데 일부러 끼지 않은 것도 아이들끼리 균형을 찾아보라고 한 것이고, 아이가 어른들 사이에서 놀게 둔 것도 아이가 어른들 안에서 관계성과 존재감을 느껴보라고 한 것이었다. 첫째는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해 주는 아이도 아니지만 나 역시 캐묻지도 않는데, 이는 아이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몸으로 터득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묻다 보면 자꾸 이론으로 돌아가게 된다.) 아이들은 그림책으로 관계의 이론을 배웠고, 물어보면 정답은 모두 알고 있다. 정답을 현실에서 적용하는 것이 관건이다. 관계 속에서 자신을 관찰하고 역할을 찾아내며 서로 소통이 되는 의사소통을 하는 것은 과거와 지금과 미래 언제나 인간의 인간됨에 중요한 일이다.
다음에는 둘째도 함께 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