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가 좋아요, 둘이 좋아요?
‘아이가 하나일 때가 좋아요, 둘일 때가 좋아요?’
‘아이가 둘이어서 더 힘들지 않나요?’
아이가 하나일 때와 둘일 때의 삶을 비교하는 질문은 제일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이다.
하나일 때는 모든 것이 간결하다. 외출 준비도 간결하고, 시간도 그리 많이 걸리지 않으며, 외식 메뉴를 고르는 것도 쉽다. 이동도 용이하고, 좀 더 다양한 곳에 갈 수 있다. 둘일 때는 모든 것이 좀 더 복잡하다. 외출 가방도 더 커지고, 시간도 훨씬 많이 걸리며, 외식 메뉴를 고를 때도 고민이 더 많아진다 (식당의 분위기까지 고려해야 하므로). 당연히 이동이 번거롭고 (차에는 항상 두 대의 카시트가 있으므로 다른 어른을 태울 수가 없고, 짐을 넣는 것도 불편하다. 유모차도 항상 두 대가 필요하다.) 이동의 제한이 생긴다.
아이가 둘이어서 더 힘든 때는 이렇다. 서로 다른 반찬으로 밥을 차려야 할 때, 서로 다른 욕구로 나를 찾을 때 (한쪽은 응아를 했는데 한쪽은 밥을 먹고 있다던지), 둘이 너무 싸우므로 같은 장난감을 두 개씩 사야 할 때, 서로 다른 기관에 등원시키느라 아침이 훨씬 분주한 것, 훨씬 많은 설거지거리, 빨랫감, 정돈해야 할 온갖 종류의 물건까지. 좀 더 정신없고, 좀 더 바쁘고, 좀 더 소란스럽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잘 정돈되어 있기를 바라고 간결한 삶을 원한다면 아이가 한 명인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럼에도 둘이어서 정말 좋은 것이 있으니 바로 <아이들의 시간>이다. 첫째를 보니, 동생만 있으면 특별한 장난감이 필요 없다. 둘째도 마찬가지다. 누나만 있으면 대단한 놀잇감이 필요 없다. 아침에 찌뿌둥한 몸으로 일어나도 동생이 있으면, 누나가 있으면 자동으로 웃음이 터지는 게 학령전기 아이들인 것 같다. 바쁜 아침, 아이들이 알아서 놀게 하고 집안일을 마무리할 수 있다니, 아이가 하나만 있을 때는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아이가 하나일 때는, ‘엄마 놀아주세요’에 항상 나의 모든 필요와 욕구가 뒷전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 둘이 온 집안을 돌아다니며 저지레 해놓은 것을 정리해야 하는 가욋일은 생긴다.) 글씨를 읽지 못하는 첫째가 둘째에게 책을 읽어주고, ‘동생아 이거하고 놀자’ ‘난 이거 할게’ ‘우리 이거 같이 할래?’라고 말할 때, 동생이 장난감을 들고 누나를 쫓아다니며 ‘어’ ‘어‘라고 말하는 게 들리면 멀리서 일하면서도 마음이 따뜻해진다. 물론 항상 좋지는 않다. 한 개의 장난감을 갖고 둘이 피 터지게 싸우거나 (우리 집은 남매이므로 피 터지게 싸우기보다는 한쪽이 울고 끝나는 경우가 많다) 둘이 위험한 행동을 공모하면 골머리가 아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이라는 것은 부모의 육아 노동을 훨씬 경감시켜 준다. ‘모든 것을 채워줘야 한다’는 부모의 압박도 줄여준다.
아이들이 좀 더 크면 아마 많은 것이 달라질 것이다. 사춘기가 되면 각자의 방문을 닫고 들어가고, 형제가 있는 것을 성가시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나의 사춘기를 돌이켜보면 동생을 어릴 때만큼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때는 형제나 가족보다 친구가 훨씬 소중했다. 그럼에도 동생이 있다는 것이 위로가 될 때가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어른이 되어 보니, 자주 만나지 않더라도 형제가 있다는 것은 이 세상에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을 준다. 나와 비슷한 유전자와 경험을 공유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 주는 든든함이랄까. 그 사람의 행복을 진심으로 응원하게 된다. 한편 외동으로 자란 친구는 그 나름대로 ‘온전히 나만의 것’을 경험하며 자라며 갖는 특별한 장점이 있는 것 같았다.
나의 경우, 항상 모든 것을 스스로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삶을 살아왔다. 도움을 청하는 것도, 도움을 받는 것도 서툰 사람이다. 누군가의 도움이나 호의를 받으면 그 이상으로 갚아야 마음이 편했다. 불확실한 것을 싫어하고, '통제 욕구'가 강한, 완벽주의적인 사람인 나는 첫째를 낳은 후 '완벽한 엄마'가 되기 위해 몸부림치며 살아왔다. '진짜 완벽한 엄마'가 되기 위해 둘째를 계획하고 낳았는데, 그 둘째를 통해 '완벽할 수 없으며, 완벽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금 더 뻔뻔하게 도움을 청할 수 있게 되었고, 조금 덜 미안해하며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하나도 좋고, 둘도 좋다. 각자 다른 장점을 갖고, 각자 다른 어려움을 가진다. 그럼에도 이런 질문을 끊임없이 하고 듣는 이유는, 서로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궁금증과 후회가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언제나 가보지 않은 길은 생기기 마련이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후회보다, 가본 길에 대한 기쁨이 훨씬 많은 삶이 되기를. 완벽할 수도 없고, 완벽할 필요도 없는 단 한 번뿐인 삶에서, 지금 여기서 누리는 삶이 가장 기쁜 것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