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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마루 Oct 19. 2021

정신과 의사지만 엄마는 처음입니다

엄마 가방이 항상 무거운 이유

  한참 출산 준비를 할 때, 출산 준비 품목 중에 '기저귀 가방'이 있었다. 기저귀 가방을 따로 사야 하는 건지, 사야 한다면 어떤 걸 사야 하는지 한참 고민했다. 숱한 검색과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일단 사지 말자'였다. 마침 조금 큰 조카가 쓰던 백팩 형태의 기저귀 가방을 물려받았고, 사회생활하며 쓰던 큰 가방들을 써 보면서 결정하기로 했다. 


  출산 후 첫 외출은 병원이다. 머릿속에서는 비상 상황에 대한 다양한 시뮬레이션이 돌아간다. 혹시 응아라도 하면, 대기 시간이 길어져 밥 먹일 때가 되면, 울면 달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챙겨보았다. 초반에는 모유수유를 했기에 수유 관련 용품이 필요 없었지만, 수유실을 이용할 수 없는 상황을 대비해 수유 용품까지 모두 챙겼다. 예방 접종하러 잠깐 나가지만 내 가방에는 기저귀 3장, 가제수건 5장, 물티슈, 젖병, 얼린 유축 모유, 유축 모유 해동을 위한 보온병, 여분의 내복, 얇은 블랭킷, 슬링형 아기띠, 딸랑이 1개, 쪽쪽이를 챙겨 넣었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 갑자기 천재지변이 일어나도 하루 정도는 버틸 수 있는 물건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외출에서 무엇을 썼을까? 가제수건 2장 쓴 것이 전부였다. 수유와 낮잠 텀을 맞춰 외출 계획을 세웠기에 예상 밖의 엄청난 진료 지체가 아니면 사실 대부분의 물건은 쓸모가 없기는 하다. 유모차 태워 간단히 동네 산책을 하러 갈 때는 대개 기저귀 1장과 물티슈만 챙긴다. 이는 예상 밖의 응아 상황에 대비하여 챙기는 것이기에 쓰지 않고 귀가할 때가 많다. 하지만 정말 응아를 하면 길에서 기저귀를 교체할 수 없기에 결국은 집으로 신속 귀가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필요 없는 물건들을 이고 지고 다닌 셈이다. 


  하지만 매번의 외출이 이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별생각 없이, 정말 간단히 준비해서 가면 반드시 예상 밖의 일이 생긴다. 기분에 따라 산책이 길어지는 날이 있다. 그럴 때는 수유 때문에 고민이 많아진다. 모유수유할 때는 마트에 있는 유아휴게실이라도 들르면 되지만, 분유 수유를 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어떤 날은 유모차에서 보채기 시작했는데 잘 달래지지 않아 안아줬어야 했는데 아기띠를 가져가지 않아서 진땀을 뻘뻘 흘리며 귀가하기도 했다. 이런저런 시행착오 끝에 간단한 산책에도 기저귀와 물티슈, 쪽쪽이, 딸랑이 하나, 슬링형 아기띠를 꼭 챙겨서 나가게 되었다. 


  대체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깜빡했거나 평소 잘 쓰지 않아 두고 나왔던 물건이 그날따라 절실히 필요해지는 경우가 꼭 있다. 아기띠가 무거워서 두고 나온 날 유난히 안아달라고 하거나, 장난감을 챙기지 않은 날 유난히 아기가 볼거리가 없는 곳에 가게 된다. 이유식을 한 끼밖에 챙기지 않은 날 꼭 급하게 누구를 만날 일이 생기기도 한다. 그러면 가까운 마트에 들러 급한 것을 사거나 결국 집으로 돌아간다. 그렇게 고생한 다음 외출에는 그 물건을 꼭 챙기는데, 신기하게도 챙겨간 날은 쓰지 않고 지나간다. 해도 해도 너무한 머피의 법칙이다.


  기저귀 가방은 결국 샀을까? 물려받은 백팩은 한 번 썼고, 직장 생활할 때 들고 다니던 가방이 마지막까지 기저귀 가방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결국 각자의 스타일에 따라 기저귀 가방도 결정되는 것인가 보다. 다만 '이너백'이라는 물건은 돌이 한참 지난 지금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기저귀 두 장, 물티슈, 가제수건, 휴대용 수저 세트와 가위 세트, 소분된 간식 등이 항상 들어있는데, 언제든 갑자기 나가야 할 때는 그 가방만 집어 들면 된다. 이너백은 짧은 외출에서는 거의 불필요하지만 없으면 치명타를 안기는 물건들로 구성되어 있다. 먹고, 놀고, 자고, 싸고, 급할 때는 씻기기까지 해야 하는 엄마의 기저귀 가방은 휴대용 아기방이기 때문에 항상 크고 무겁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물리적으로 그 짐은 무겁지만, 심리적으로는 든든한 아군이기에 엄마는 오늘도 무거운 가방을 이고 지고 아기와 함께 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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