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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마루 Jan 20. 2023

정신과 진료실에서 전하는 이야기

10. 우리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누구에게나 하루 24시간, 일 년은 365일이 주어집니다.

  하지만 모두가 같은 24시간, 365일을 살지는 않습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어떤 기억들, 어떤 경험들을 시간이 더디게 흘러가게 합니다. 반대로 어떤 기억들, 어떤 경험들은 시간을 통째로 뺏어갑니다. 고통스러운 일을 겪은 사람에게 시간은 말도 안 되게 느리게 흐릅니다. 예를 들어 술을 좋아하지만 술만 마시면 사고가 나는 아버지가 있는 집에서는 아버지가 술을 마시는 날은 고통과 긴장의 연속입니다. 갑자기 연락이 두절되고 어디서 전화를 받을지 겁이 납니다. 따르르릉. 이번에는 파출소일까요, 아니면 병원일까요. 그러다가 아버지가 취해서 비틀거리며 집으로 귀가하는 것을 보면 그제야 안도합니다. 정작 아버지는 술 마시면서 쏜살같이 흘러간 시간을 아쉬워하고 있지만요. 이처럼 같은 시간을 살고 있어도 사람마다 느끼는 시간의 속도가 다릅니다.


  문제는 시간의 속도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데서 발생합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아버지는 결국 가족의 성화에 못 이겨 술을 마시지 않기로 약속합니다. 하루, 이틀.. 벌써 이틀이나 지났구나. 이제 오늘은 마셔도 되겠다. 퇴근길에 곧장 술집으로 향하고, 여느 때처럼 다시 연락이 두절됩니다. 가족의 마음은 어떨까요? 하루, 이틀.. 이제 겨우 이틀인데 벌써? 그간 우리가 고생한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닌데, 몰라줘도 너무 몰라주네. 이런 일이 반복된다면 아버지는 점차 가족의 신뢰를 잃게 됩니다. 이제는 어떤 말을 해도, 어떤 행동을 해도 지켜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지요.


  나에게는 별 것 아닌 시간이, 남에게는 억겁만큼 긴 시간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 주세요. 속도의 차이만큼 상대방에게 시간이 많이 필요하답니다. 그 시간을 허락하는 것이 관계 회복의 시작입니다.


  얼마 전 다녀가신 한 환자분의 말로 마무리할게요.

  "가족들이 고통받은 시간, 제게 속은 시간이 길었으니까요. 제가 그만큼 기다리며 믿을 만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신뢰를 회복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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