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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마루 Mar 15. 2023

정신과 진료실에서 전하는 이야기

55. 관계가 어려울 때

 관계는 언제 어려워질까요? 많은 시간 동안 관계는 비교적 안정적입니다. 하지만 내가 힘든 일을 당했을 때, 상대방이 힘든 일을 당했을 때, 둘 다 힘든 일을 당했을 때 관계에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힘든 일을 당한다는 것은 주관적이지만, 공통적으로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스트레스 요인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신체의 질병, 고통, 심리적 압박, 갑작스러운 외적 상황의 변화, 맡은 역할의 변화 (부부에서 부모가 된다던지, 그냥 부모에서 학부모가 된다던지요), 새로운 업무 등, 나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일이 스트레스의 원인이 됩니다. 관계에서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닌데, 이런 외부 스트레스 상황에서 관계가 어려워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스트레스 호르몬 때문'입니다. 인류는 스트레스 상황에서 싸우거나(fight) 도망치는(flight) 반응을 하도록 진화했습니다. 우리의 몸은 싸우거나 도망치는 데 온 정신을 집중하도록 변화합니다. 이때 분비되는 것이 스트레스 호르몬이고, 스트레스 호르몬은 우리를 '생존'하게 돕지만, 상황을 조망하는 능력은 떨어뜨립니다. 그래서 평소라면 '맞아, 그럴 수 있어'라고 생각하고 넘길 수 있는 상황에서 욱하고 화를 내게 됩니다. 또는 '이런저런 가능성이 있을 수 있지'하고 이해했던 상황을 '분명히 이럴 거야'라고 미리 단정 짓고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이는 생존을 위해 급박한 결정을 내리는 데는 도움이 되지만, 복잡 미묘한 관계에서 조급한 판단을 내리고 실수를 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길을 가다가 모르는 사람과 눈이 마주칩니다. 눈이 마주친 이유는 다양해요.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다가 우연히 눈이 마주쳤을지도 모르고, 각자가 아는 사람과 닮아서 유심히 쳐다봤을 수도 있으며, 상대방의 인상착의가 눈에 띄거나 마음에 들거나 혹은 이상하다고 생각해서 마주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스트레스 상황에 있다면 우리의 마음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이 상황을 대개 '나에 대해 적대적인 감정을 갖고 쳐다봤다'라고 해석하기 쉽고, 그렇게 생각하면 상대방이 나를 째려보고 있다고 인지하기도 합니다. 


  다시 정리해 보자면 스트레스 호르몬 자체가 직접 관계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스트레스 호르몬이 우리의 시야를 좁게 하고, 이로 인해 우리는 복잡 미묘한 관계를 적대적, 위협적인 것으로 해석하기 쉬워진다는 것입니다. 둘 중 한 명이 스트레스 상황에 있다면 상황을 '생존 본능'으로 대처하기 쉽고, 쉽게 피로하고 쉽게 짜증을 낼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트레스가 없는 다른 쪽도 어쩔 수 없이 영향을 받게 됩니다. '왜 나한테만 저래,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하는 짜증과 서운함이 밀려옵니다. 이것은 상대방에게 스트레스 반응을 유발합니다. 상대방이 힘들다고 머리로는 알아서 이해하려고 해도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상대방의 기분을 풀어주려다가 되레 속상한 말을 듣고 마음의 상처를 입기도 하지요. 


  관계가 어려울수록 우리에게는 각자 쉬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일단 내가 잘 쉬고 컨디션이 좋아야 상대방을 이해하는 마음 그릇이 넓어집니다. 상대방을 돕고 싶다면 '이러면 좋아할 거야'를 지레짐작하지 말고, '내가 어떻게 해주면 좋겠어?'라고 물어봅시다. 관계가 어려울 때일수록 시간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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