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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건우 Aug 27. 2023

동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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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기 시작하는 독자는 곧바로 당황한다. 줄바꿈 없이 무작정 이어지는 길고 긴 문장은 독자의 시각과 심리를 답답하게 만든다. 이 형식을 견디지 못하고 포기하는 독자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까지 드는데, 소설의 뒷부분에 가서야 작가의 의도를 이해하게 되고, 작가가 그럴 수밖에 없는 선택을 한 것으로 판단하게 된다.

680페이지 소설에 여백과 단락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니, 일반 소설로는 거의 1천페이지에 가까운 분량으로 보인다. 작가(비엣 타인 응우옌)는 자신이 모을 수 있는 정보를 최대한 많이 모아서 1975년 베트남 패망(북베트남의 남북 통일)부터 주인공인 '나'가 다시 베트남으로 돌아와 포로수용소에 갇히면서 1년 동안 쓴 자술서의 형태로 소설을 완성했다.

따라서, 이 소설은 그 자체로 주인공 '나'의 자술서이며, '나'가 살아온 과정을 기술한 내용이다. 이때 독자는 '나'가 기술한 내용을 읽고 '나'에 관해 알아가지만, '나'의 진짜 모습은 모른다. 그건 자술서에서 '나'가 진실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나'의 자술서를 믿지 못하는 포로수용소장은 '나'에게 말하지 않은 '사실'을 털어놓으라고 강요(?)한다. '나'가 쓴 자술서를 읽어보면,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나'는 매우 솔직하게 남베트남군이 패퇴하는 과정과 미국대사관을 통해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오는 과정, 미국에 정착하는 과정을 시시콜콜한 내용까지 모두 기술한다.

'나'는 남베트남군 장군의 부관으로 대위이며, 영어를 잘 한다. 그는 프랑스-베트남 혼혈로, 그의 출생은 매우 비극적인 사실이 숨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나'는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공산주의자로 남베트남 군부에 침투한 간첩이다. 그는 남베트남 군부의 정보를 비롯해 내부 정보를 수집한 다음, 점조직으로 연결되어 있는 동료 첩자에게 정보를 넘기고 있었다.

남베트남이 붕괴하고, '나'가 모시던 장군 일가와 함께 미국으로 와서도 여전히 민간인이 된 장군의 운전사 노릇을 하며 지내는데, 장군은 미국에 사는 베트남 사람들을 규합해 '반베트남 전선'을 만들어 태국을 통해 사회주의 베트남으로 쳐들어가 내전을 일으키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나'는 미국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수집한 정보를 프랑스에 있는 '당고모'에게 편지로 보내는데, 장군은 자신의 부관이자 비서인 '나'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오히려 밀정 또는 간첩의 혐의가 있다고 판단한 대령과 기자를 살해하는데 '나'를 보낸다.


'나'는 미국에서 다시 베트남으로 돌아오려 하지만, '당고모'는 계속 미국에 남아 있으라고 말한다. 조직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베트남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이 죽고, '나'는 간신히 살아남는다.

'나'를 관리하는 조직이 '나'를 의심하는 건 당연하다. 오지 말라고 명령했는데도 궂이 베트남으로 돌아온 이유가 무얼까? 자신이 '고정간첩'이라는 정체가 탄로나기 직전이어서는 아니다. 미국에 있으면서 공산주의자로서의 정체성이 흔들려서였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자신을 비롯해 세상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렇게보면 '나'는 철저한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아니면, 베트남 공산주의가 다른 모든 공산주의처럼 너무 경직되고, 비인간적이라서 그럴 수 있다. 공산주의는 나라에 따라 다른 형태를 보이는데, 공통점은 독재와 공포정치를 한다는 점이다. 베트남 공산당의 상징인 '호치민'의 이미지는 스탈린이나 모택동과는 다르게 '호아저씨'로 친근한 이미지인데, 그렇더라도, 공산주의 조직의 경직성은 여전하다.

주인공 '나'는 베트남 공산당원으로 공산주의자이면서, 미국 정보기관 CIA를 위해 일하는 첩자로 의심받는다. '나'가 전투 중 체포되어 포로수용소에 감금되어 1년 동안 비교적 좋은 대우를 받으며 자술서를 쓸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와 형제같은 친구인 '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나'가 누군지 모르고 보고했던 '당고모'의 정체가 바로 형제같은 친구 '만'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나'는 배신감을 갖지만, '만'은 포로수용소장이 인정해야만 풀려날 수 있다고 말한다.

포로수용소장의 입장에서는, 포로들 대부분은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에 반대하는 반체제 인간들을 교화해야 하는 임무를 띄고 있으며, 그들 가운데 미국의 간첩이 있는가를 찾아내는 게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다. 따라서 포로로 잡힌 사람들의 자술서를 통해 그가 어떤 사상을 가졌는지, 그가 베트남에서 어떤 일을 했고, 그가 조국 베트남에게 도움이 될 지, 해로울 지를 판단해야 한다.

주인공 '나'가 아무리 사실을 말한다고 해도, 그걸 순순히 믿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꽤 강한 권력을 가진 정치위원 '만'이 친구라는 게 밝혀졌음에도, 수용소장은 순순히 물러서지 않는다. 


작가 비엣 타인 응우옌은 1971년생으로 그가 네 살 때 부모님과 함께 미국으로 왔다. 그들의 시각으로는 베트남이 패망했지만, 베트남은 오랜 내전을 끝내고 마침내 통일했다. 한국전쟁 때, 북쪽에 살던 사람 가운데 일부가 남쪽으로 내려온 것과 같은 성격이다. 사회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베트남을 떠나 다른 나라로 도망했는데, 미국으로 간 베트남 사람들은 비교적 좋은 환경에 자리 잡은 것이고, 이들의 성분이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가능했다.

베트남 전쟁은 미국 사회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미국 정부가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을 때는 군산복합체 즉 자본의 이익을 위한 행동이었지만, 미국 청년들 5만여 명이 사망하고, 그보다 더 많은 병사들이 PTSD를 겪고, 반전 시위, 마약의 확산 등 19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문화 전반을 뒤흔들었다.

비엣 타인 응우옌은 미국에서 성장하며, 소수 인종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시기를 겪는다. 백인, 흑인이 주류인 사회에서 아시아인은 크고 작은 차별을 당하며 산다. 더구나 베트남인은 베트남 내전에서 패한 쪽에 있다 쫓겨났다는 사실에 자괴감을 잊기 어렵다.

작가는 이런 자괴감을 주인공 '나'를 통해 경계인으로 표현한다. 공산주의자이면서 남베트남 군인으로 생활하고, 간첩이면서, 제국주의 미국 정보국의 첩자로 활동하는 인간이라면, 그의 정체성은 과연 무엇일까. 주인공 '나'도 자기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게 되는, 역사 속의 인간이란 자기 의지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는 걸 보여준다.


박찬욱 감독이 이 소설을 드라마로 만들고 있는데, 몇 가지 흥미로운 관점이 보인다. 이 소설이 2016년, 퓰리쳐상을 받는데, 비엣 타인 응우옌의 첫 소설이라는 점에서 놀랍고,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내용과 형식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영화로 만들고 싶은 요소가 많은데, 그 가운데서도 주인공 '나'가 갖고 있는 경계인으로의 위치가 박찬욱 감독의 관심을 끌었을 걸로 보인다. 동시에 여러 개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주인공 '나'는 여러 개의 정체성으로 살아가지만, 정작 자신의 진짜 모습을 잃어버린 건 아닐까. 

베트남 현대사의 한 가운데를 온몸으로 살아가는 '나'를 통해 남베트남의 부패와 비리, 탐욕의 인간들을 보여주고, 북베트남의 이념에 허덕이는 인간, 경직된 체제를 보여주면서, 인간 고유의 자유에 관해 질문하는 내용을 보여주지 않을까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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