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백건우 Jul 15. 2024

더 스퀘어

더 스퀘어 


어떤 영화인지 모르고 보다, 어디선가 본 느낌이 들었다. 감독 이름을 확인하고 검색하니 작년에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영화 '슬픔의 삼각형'을 연출한 감독 작품이었다. 어쩐지 느낌이 비슷했다. '슬픔의 삼각형'보다 더 지독하게 불편한 영화로, 영화 내내 전혀 웃음이 없고, 짜증과 씁쓸함만 묻어난다. 이건 명백히 감독의 의도이며, 이런 불편한 영화를 깐영화제 심사위원들이 좋아한다.

'정치적 올바름'을 지향하는 영화인데, 이때 개념은 켄 로치 감독의 작품과는 '정치적 올바름'이 질적으로 다르다. 켄 로치는 노동계급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자본주의 영국 사회의 모순을 구체적인 노동자의 삶을 통해 들여다 본다. 특히 대처 수상이 '신자유주의'를 선언하면서, 영국 노동자의 삶이 어떻게 추락하고 망가지는가를 노동자 개인, 가족, 이웃의 삶을 깊이 들여다 보는 영화를 만들어 '신자본주의'가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어떻게 바꾸고 있는지, 노동자의 삶이 얼마나 더 착취와 경쟁으로 망가지는가를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드러낸다.

반면 루벤 외스툴룬드 감독의 작품은 부르주아와 지식인의 허위의식과 추악한 내면을 까발리기는 하지만, 그것이 계급적 시각에 기반하지 않았기에, 그의 영화는 본질을 건드린다기 보다 표피적이고 현상적인 면을 보인다. 


주인공 크리스티앙은 현대미술관 큐레이터다. 그는 중요한 전시를 앞두고 언론과 인터뷰를 하고, 홍보 기획을 하고, 후원을 받으려 기업과 돈 많은 개인 후원자를 찾아다녀야 한다. 그가 기획한 현대미술은 '개념 미술'이라는 분야로, 캔버스에 그리는 페인팅 회화와는 완전히 다른 장르이면서 매우 난해한 현대 미술 분야다.

이때, 크리스티앙이 말하는 '개념 미술'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아무 의미 없다. 영화에서는 '개념 미술'이라는 장치 또한 관객과 미술관을 찾는 관객을 기만하는 하나의 장치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개념 미술'이야말로 부르주아의 허위 의식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장치다.

'개념 미술'은 일종의 설치 미술이기도 하면서, 해석이 필요한 미술이기도 하다. 이 장면은 영화 시작하면서 세바스티앙이 언론사 기자와 인터뷰 할 때, 기자의 질문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전시 기획 의도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세바스티앙은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기자는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했음에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누구도 이해할 수 없고, 심지어 작가 조차도 자기 작품을 미학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작품을 '개념 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전시한다.


크리스티앙은 미술관에 거리의 벽돌을 깔고, 그 위에 정사각형을 만든 다음, 조명으로 두른다. 바닥에 정사각형이 생기고, 그 사각형에 의미를 부여한다. 사각형 안에서는 누구나 선의와 믿음, 친절, 사랑을 베푸는 것으로 설정한다. 이건 크리스티앙의 개념 미술에 관한 아이디어이고, 이 아이디어를 실물로 재현해 미술관에서 전시하며, 대중에게 현대사회에서 사라진 공동체의 믿음, 친절, 사랑에 관해 다시 생각할 기회를 마련할 의도였다.

하지만 크리스티앙의 의도와 다르게, 크리스티앙 개인의 삶은 반대의 모습을 보인다. 그는 거리의 거지에게 적선하지 않으며, 가난한 사람에 대해 편견을 가졌으며, 하룻밤을 보낸 여성의 친절을 끝내 의심한다. 또한 자기 지갑과 아이폰을 소매치기한 사람들이 사는 아파트를 알아내고 - 아이폰의 위치 추적으로 맥북에서 확인할 수 있다 - 경찰에 알리지 않고, 그 아파트 모든 가구에 익명의 편지를 써 개별 우편함에 넣는다. 그리고 놀랍게도 지갑과 아이폰이 돌아온다.

하지만 그 익명의 편지로 인해 그 아파트에 사는 소년이 부모에게 도둑으로 오해 받고, 소년은 크리스티앙을 찾아와 자기와 부모에게 사과하라고 강력하게 주장하지만, 크리스티앙은 사과하지 않다가 마지못해 사과하는데, 그것도 동영상으로 찍어 유튜브에 올리는 방식이었다. 즉, 그는 소년 앞에 떳떳하게 설 자신이 없는 인간이고, 가난한 동네에 사는 소년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었다.

이런 장면은 미카엘 하네케 감독 작품인 '히든'에서 중산층 백인이 드러내는 이민자와 다른 민족(인종)에게 드러내는 노골적 편견 장면과 같다. 유럽에서 백인들이 다른 나라, 다른 민족, 다른 인종에게 드러내는 혐오를 비판하는 방식은 비슷해 보이지만, 루벤 외스툴룬드 감독과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의도는 또 다르다.

미카엘 하네케 감독은 '히든'에서 이민자에 대한 혐오를 뿌리 깊은 역사적 맥락에서 들여다 보는데, 겉으로 전혀 언급하지 않은 알제리인 학살 사건이 배경에 깔려 있다. 한편 루벤 외스툴룬드 감독의 이 작품은 그런 역사적 배경은 없고, 단지 유럽에서 현상적으로 드러나는 백인들의 다른 민족(인종)에 대한 혐오 현상을 직접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주인공 크리스티앙은 자신이 마치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선량한 시민이며, 개방적이고 편견 없는 사람인 듯 말하고 행동하지만, 그는 알고 보면 편견과 독선으로 뭉친 '젊은 꼰대'에 불과하다. 그가 어떤 여성과 하룻밤을 보내고, 사용한 콘돔을 두고 벌이는 장면에서, 그가 여성도 혐오하고, 여성을 위험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심지어 크리스티앙에게는 이혼한 아내와 두 딸이 있고, 두 딸을 번갈아 가며 집에서 돌보는데, 그는 딸들이 집에 있을 때도 이민자인 외국인(아랍인) 소년의 항의를 대놓고 무시하다 마침내 그 소년을 협박하는 태도를 보인다. 딸들의 입장에서 보면, 위선과 폭력으로 소년을 대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어땠을까.

영화는, 이런 크리스티앙의 말과 행동을 통해 유럽의 백인이 만든 문명 자체가 끊임 없는 혐오와 배타성으로 성립되었음을 말하려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영화 말미에 가장 중요한 장면이 등장하는데, 넓은 식당에 사람들 - 거의 백인들 - 이 멋진 옷을 입고 앉아 있고, 이들은 곧 있을 만찬이나 파티를 기다리는 듯 보인다. 이때 벌거벗은 남자(백인이 아니다)가 등장하고, 이 남자는 마치 고릴라처럼 행동한다. 즉, 인간이 아닌 존재, 인간과 비슷하지만 말을 못하고, 인간의 상식과 예절, 도덕을 배우지 못한 존재가 등장하는데, 그는 이민자이고 백인이 아닌 인종이다.

비백인이 보여주는 행동은 점차 야만스럽고, 폭력성을 띄며 변해간다. 처음에는 사람의 몸을 슬쩍 건드려보다 사람이 반응하는 정도에 따라 뒤로 물러서거나 더 난폭하게 변한다. 그러다 마침내 어떤 여성을 쓰러뜨리고 옷을 벗기는 장면까지 연출(?)하는데, 이때까지 관객들은 그 '유인원'의 행동을 그저 연출된 행동으로만 인식하고,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난감한 표정을 짓다, 일부 관객이 불쾌한 말과 표정으로 퇴장하면서 상황은 불안과 공포로 바뀐다.

'유인원'이 여성을 성폭행하려는 순간 - 물론 실제 그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겠지만, 매우 심각한 상황까지 이른다 -  참지 못한 백인 남성들이 달려들어 '유인원'을 집단 폭행한다. 

여기까지가 크리스티앙이 의도한 '개념 미술'이다. 백인들의 위선을 폭로하고, 역사적으로 백인이 저지른 폭력이 어떤 모습인가를 반대로 드러내면서, 백인의 폭력성을 강조한 이 퍼포먼스는 잘못 읽으면 이민자(다른 민족, 다른 인종)들을 혐오하고, 배타하는 태도로 드러날 수 있다.


크리스티앙이 미술관에서 해고되는 과정에서도 비겁하고 졸렬한 태도를 보인다. 자신이 주도해 홍보 영상을 외부 제작팀에 의뢰했고, 그들이 만든 홍보 영상은 나쁜 쪽으로 매우 충격적이었다. 아동학대 논란이 일었고, 유튜브에 올라온 영상을 본 시민들이 한 목소리로 미술관을 비난하자, 미술관 이사진은 크리스티앙을 희생양으로 내놓는다.

크리스티앙은 자기도 억울하다고 항변하지만, 알고 보면 모두 자신의 책임이었고, 자신이 관리, 감독을 올바르게 하지 못해서 벌어진 사태였다. 그런 점에서 크리스티앙의 태도는 비겁하다. 이건 '크리스티앙' 개인의 자질을 비판하려는 것보다는, 부르주아, 지식인들이 갖는 일반적 비겁함, 야비함을 비판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크리스티앙은 두 딸을 데리고,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아파트를 찾아간다. 자신이 협박 편지를 써 넣었던 소년을 찾아 사과하려 하지만, 그 소년은 이미 아파트를 떠났다. 크리스티앙이 진심으로 소년에게 잘못을 빌었을지 알 수 없다. 독선과 아집, 편견으로 가득한 크리스티앙의 세계관이 하룻만에 갑자기 바뀔 수 없다고 확신하는데, 그의 태도는 자발적이라기 보다, 자신이 놓여 있는 현실 세계에서의 상태, 즉 미술관에서 해고되고, 사람들에게 비난받고, 자기가 한 행동이 올바르지 않다는 자책 등의 감정이 뒤섞여 심경에 변화를 일으킨 걸로 보인다.

개인이든 집단(국가)이든, 공존하는 상대를 혐오하고, 폭력으로 억압하고, 착취하고, 인종적, 계급적 우월감으로 무장해 다른 사람, 집단을 짓밟으려는 태도는 비난받아야 한다. 그동안 서구 유럽이 보였던 역사적 행위는 앞선 기술문명을 바탕으로 세계 수많은 나라, 민족, 인종을 억압, 탄압, 착취해 지금의 부를 쌓아올렸고, 그들의 박물관, 미술관 소장품을 가득 채웠으니, 중세 이후 유럽의 역사는 살육, 파괴, 착취, 약탈의 역사라고 말해도 전혀 틀리지 않을 정도다.

영화는 이런 유럽 문명의 위선과 가증스러움을 폭로하고, 자기 비판을 하지만, 내 눈에는 그런 태도조차도 위선적으로 보일 뿐이다. 이 영화가 백인 주류 사회에서 환호받는 건, 그들의 '정치적 올바름'이 진정한 역사적, 사회적 문제의식에 기반했다기 보다, 하나의 장식물로 기능한다는 걸 뜻한다고 봐도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참을 수 없는 사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