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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건우 Jul 18. 2024

킬 룸

개념미술에 관하여

킬 룸


감독은 누군지 모르지만, 우마 서먼과 사무엘 잭슨이 나와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영화가 진행하면서, 코미디 영화의 형식이지만, 결코 가볍게만 볼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형식은 코미디로, 흐름은 가볍고, 심각한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영화의 배경은 묵직하다. 패트리스(우마 서먼)는 작은 갤러리를 운영하며 작가들 작품을 전시, 판매한다. 그의 세계는 비싼 그림을 소장하는 콜렉터들, 즉 부자, 상류층을 상대로 하는 '부르주아적' 세계를 기본으로 한다. 하지만 그는 한편으로 마약을 구입하는 통로를 통해 사회의 어두운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과도 접점이 있다.

패트리스에게 마약을 공급하는 사람은, 여성이 입었던 속옷을 온라인으로 판매하는 사업을 겸하고 있는데, 이 사업이 꽤 잘 된다고 말한다. 빵집을 운영하면서 마피아 조직의 돈 세탁을 맡고 있는 고든(사무엘 잭슨)은 돈 세탁 때문에 고심하다, 자기 부하인 마약 판매상에게 패트리스 이야기를 듣는다. 갤러리에서 그림이 비싸게 팔리고, 그 돈은 합법적 경로를 통해 지급되므로 돈 세탁을 하기에 좋은 경로라는 걸 찾아낸다.

여기서 '고든'은 흑인이면서 자칭 유대인이다. 물론 그는 '진짜' 유대인은 아닌데, 유대인을 상대로 사업을 하는 것으로 보아, 자신의 정체성을 유대인으로 설정하고 살아간다. 그는 마피아 조직이 돈 세탁을 하지만, 빵을 만드는 가게에서 일하는 걸 진심으로 여기고 열심히, 맛있게 빵을 만든다.

'고든'의 정체성은 어디에 있을까. 그는 흑인이면서 유대인이고, 범죄 조직의 돈 세탁을 하면서 빵 장사를 하는, 매우 복잡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자신은 전혀 불편하지 않고, 이 모든 삶이 자연스럽다. 그런 점에서 그는 다중인격을 가진 사람과 같다.

고든은 패트리스를 찾아가 자신과 함께 돈 세탁을 하자고 솔직하게 말한다. 명백히 범죄를 공모하자는 말에 패트리스는 당연히 거절하지만, 패트리스가 경제적으로 곤란한 상황에 놓이고, 어쩔 수 없이 고든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여기까지는 영화가 진행해야 하는 필연적 과정이다.

패트리스는 작가의 작품을 콜렉터에게 판매하고 중간에 수수료를 받는 처지여서, 10만 달러짜리 그림을 판매하려면 실물의 '작품'과 '작가'가 있어야 한다. 존재하지 않는 '작가'를 내세웠다가 나중에 국세청에 적발되면 막대한 벌금과 감옥살이가 기다린다는 걸 패트리스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패트리스는 고든을 찾아가 '작품'을 만들어 내라고 말한다. 작품 거래를 통해 돈 세탁을 할 수 있지만, 실물 작품은 고든이 책임지고 만들어야 한다는 게 패트리스의 주장이다. 고든은 마침 그 자리에 있던 '레지'에게 그림을 그리라고 명령하면서, 영화는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간다.


영화에서 '레지'가 만든 작품을 소개하면서 패트리스는 '개념 미술'이라고 말하고, 콜렉터들에게 작품을 설명한다. 현대 문명의 복잡함을 단순화 하고, 문명 비판적이며, 도시인의 고뇌를 상징하는 등... 사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만들어 내 아무렇게나 떠드는 말이지만, 그게 '개념 미술'을 설명하는 하나의 방법론이라고 말한다.

다른 영화 '더 스퀘어'에서도 주인공 크리스티앙은 현대미술관 큐레이터로 현대미술을 기획, 전시하면서 '개념 미술'이라고 말한다. 이때 크리스티앙이나 패트리스가 말하는 '개념 미술'은 실체가 있으며, 가장 급진적인 현대 미술의 한 장르다.

'개념 미술'은 20세기 초반까지 이어지던 전통 회화의 틀이 깨지면서, 평면에 머물던 '미술' 또는 '회화'의 영역이 입체, 설치로 확장하고, 미술의 개념이 건축, 공간, 디자인, 산업, 패션 등 현대 산업 거의 모든 분야로 확산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장르다.

다른 한편으로 미학(예술 철학)이 제시하는 '미학'의 관점이 과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중세까지 변하지 않던 주관적 미학에서 벗어나 사물과 현상의 본질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단계에 이르면서, '개념 미술'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따라서 개념 미술은 21세기 현대의 복잡한 사회 현상을 '미학적'으로 표현한 기법이며, 개념 미술 작품에는 현대 미학의 관점이 포함되었고, 그 미학의 관점을 관객은 즉물적, 즉각적으로 알아채지 못하기 때문에, 큐레이터의 설명을 통해 이해하게 된다.

영화에서 패트리스가 '개념 미술'을 언급하게 되는 배경에는 '레지'가 그린 '작품'을 보고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레지'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그림을 그려본 적 없는 사람이고, 무엇보다 그는 현재 '수금원'이라는 이름으로 청부살인을 하는 살인자, 범죄자다.

살인자 그것도 청부살인으로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 그리는 '작품'이 어떤 형태로 드러나는가도 궁금하지만, 그걸 바라보고 해석하는 패트리스의 태도 역시 의미심장하다. 심리학에서 '그림'은 개인의 심리, 성격, 내면을 들여다 보는 중요한 수단으로 작동한다.

패트리스는 '레지'의 작품을 보면서 깊은 어둠을 느낀다. 추상 회화의 난해함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잭슨 폴록의 작품이 무수히 복제되어 팔릴 만큼, 추상 회화는 난해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속이기 쉬운 작품에 해당한다. 추상 회화의 과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작가가 피카소인데, 피카소는 어릴 때 그린 작품부터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림이 변하는 과정을 또렷이 볼 수 있다. 사실주의 회화에서 점차 추상으로 변하는 과정은 피카소 예술 세계의 변화이면서 동시에 피카소라는 '인간'의 변화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또한 피카소의 추상화는 최근 현대 추상 회화의 난해함과는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분명하고, 그림을 보는 사람 역시 스스로 그림을 해석할 수 있을 만큼의 추상성에 머무르고 있으므로, '개념 미술'과 같은 주관적 난해함과는 또 다르다.


패트리스가 '레지'의 처지를 알게 되고, 레지가 더 이상 범죄를 저지르고 싶지 않다는 말을 듣게 되면서, 패트리스는 돈 세탁을 맡긴 마피아 두목을 찾아간다. 이때는 이미 패트리스의 갤러리에서 레지의 작품 전시회를 하고, 레지의 가명인 '수금원'의 이름이 미술계에서 '혜성같이 등장한 신인'으로 알려진 다음이다. 현대 미술 작품을 모으는 콜렉터들은 돈 많은 단체이거나 개인인데, 이들이 '수금원'의 작품을 구하려 패트리스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마피아 두목은 레지가 빚 때문에 청부살인을 계속해야 하며, 풀려나고 싶다면 가장 위험한 인물을 죽여야 한다고 말한다. 러시아의 갑부이자 조직폭력 두목은 매우 조심스럽고 은밀하게 행동하는 사람이라 만나기 어려운데, 그가 미술 작품을 수집하는 콜렉터라는 걸 알게 된 패트리스는 레지와 자신을 위한 작전을 짠다.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영화 말미에 나오는 '개념 미술' 전시회인데, 패트리스는 '수금원'의 마지막 작품이라고 설명하며 많은 콜렉터를 전시회에 오도록 유도한다. 한창 인기 있는 신예 작가 '수금원'의 마지막 전시라는 입소문을 타고 여러 나라에서 부르주아들이 모이고, 그 가운데 러시아의 조폭 두목도 나타난다.

전시관 내부에는 작은 직사각형 텐트가 있고, 내부에 조명이 있어 내부에서 사람의 행위가 그림자로 드러난다. 관객은 밖에서 내부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그림자를 보게 되는데, 이게 패트리스가 말하는 '개념 미술' 작품의 하나다. 일종의 행위 예술이면서 개념 미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개념 미술'의 정점은 레지가 러시아 조폭 두목을 살해하는 장면이다. 직사각형 텐트 안에서 레지가 러시아 조폭 두목의 머리에 비닐봉지를 씌워 살해하는 과정이 실루엣으로 비치고, 바깥에 있는 콜렉터들은 그 장면을 바라본다. 이때, 내부에서 벌어지는 '실제' 살인과 바깥에서 바라보는 '예술'로써의 장면은 현대 미술의 추상성, 상징성, 이중성, 심지어 현대 미술이 갖는 노골적인 사기를 비판하는 장면으로 보인다.

레지가 러시아 조폭 두목을 살해하자 밖에서 그림자로 바라보던 콜렉터들은 박수를 치며 환호한다. 즉, 밖에 있는 사람들, 콜렉터들은 현대 미술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다. 현대 미술이 난해하다고 말하지만, 그 난해함이라는 건 작가 또는 갤러리 또는 미술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허위이며, 사기라고 말하는 것이다.


영화는 코미디답게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현대 미술, '개념 미술'이 소재로 쓰이면서, 이야기보다 현대 예술에 관한 담론을 만들어 내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영화에서는 '개념 미술'을 이야기의 소재로 가볍게 다루려 했을 수 있지만, 현대 미술이나 미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에서 말하는 소재들이 흥미롭게 다가온다.

청부살인을 하는 레지가 단숨에 그린 회화가 비싸게 팔리고, 레지가 살인할 때 썼던 비닐봉지들이 '개념 미술' 작품으로 전시되고, 레지가 살인하는 장면이 '개념 미술'로 '행위 예술'로 갤러리에서 당당하게 전시되는 장면은 충격적이면서, 현대 미술의 허위 의식을 날카롭게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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