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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건우 Jan 18. 2016

'상징'을 대하는 태도

취중진담을 말하다

'상징'을 대하는 태도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박유하의 저서로 촉발된 일본군 성노예 할머니들의 상황은 현재 일본의 아베 정권의 본질과 정체를 더욱 확실하게 드러내고 있다. 여기에 무능한 정권이 아베 정권과 작당해 국제법에 어긋한 행위를 하면서, 일본대사관 앞에 있는 '소녀상'이 뉴스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그저 하나의 '작품'이자 '상징'에 불과한(?) '소녀상'을 일본은 왜 두려워하는 걸까? 말할 것도 없이 '소녀상'이 일본군 성노예로 고통받은 우리 할머니들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진실이 담긴 서류는 많은 사람들이 못볼 수도 있지만, 성노예 할머니를 상징하는 '소녀상'은 누구나 볼 수 있고, 그 상징을 볼 때마다 '성노예 할머니'를 떠올리고, 자연스럽게 일본의 악행과 야만성을 기억하게 된다. '상징'은 매우 강력한 기억의 응집임에 분명하다.


'소녀상'을 보면서 떠오른 생각은, '소녀상'과 '예수상' 모두 각기 다른 '사건'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소녀상'이 일본군 성노예 할머니를 상징한 것이라면, '예수상'은 특정한 종교의 지도자를 상징한 것이다. 절에 있는 '불상' 역시 석가모니를 상징한 것이다.

시대와 상징은 다르지만, 사람들이 상징을 대하는 태도는 어떨까? '소녀상'은 사람들이 찾아와 모자를 씌워주고, 목도리를 둘러주며, 양말을 신기고, 꽃을 바친다. 작고 여린 소녀상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고통당한 여성들을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소녀상'은 단지 고통받는 여성이 아니라, 자신의 육체와 역사를 하나로 만들고, 억압과 착취와 고통을 극복하려는 강한 의지를 가진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

고통을 받기로는 '예수상'도 마찬가지지만, 예수를 '신'으로 믿는 사람들은 십자가에 매달려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가시면류관을 쓰고, 옆구리를 창에 찔려 피를 흘리는 '예수'라는 인간을 바라보며 돈과 건강과 행운을 달라며 빈다.


두 상징을 대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모두 자발적이지만, '소녀상'은 사람들이 측은하고 가엽고, 애틋하게 생각해서 모자며 목도리며 양말이며 신발 등을 가져와 입히고 신기고 꽃을 바치는데 반해, '예수상'은 그 참혹한 모습을 바라보며 불쌍함을 느끼기는 커녕, 오히려 가학적 취미를 즐기는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참혹한 예수상을 소비한다.

'소녀상'은 우리 민족의 역사와 직접 관련이 있는 사건에서 비롯한 것이고, 현대사는 여전히 우리 민족의 역사와 인민에게 직접 영향을 끼치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감정이 훨씬 즉각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그래서 비록 '소녀상'이 금속으로 만든 물체이긴 해도, 우리의 마음과 감정을 담아 '소녀상'을 마치 인격체처럼 대하게 한다.

'인격체'처럼 대하는 것은 '예수상'도 마찬가지지만, 예수를 신으로 믿는 사람들은 매우 추상적으로 예수상을 대한다. 그것은 전혀 감정적이지 않을 뿐더러, 자신의 삶과 역사와는 전혀 관계 없는 중동의 한 부족에서 나온 우상을 섬기게 되면서, '신'을 믿는 것을 단지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투영하고, 이기심과 욕심을 충족하려는 대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신도들 가운데 예수를 불쌍하게 여기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십자가에 매달려 손과 발에 못이 박힌 고통스러운 한 인간을 보면서, 진심으로 슬퍼하고 애달파 하는 사람이 과연 있기는 할까? '예수상' 앞에서 엎드려 자기의 소원이나 실현할 수 없는 욕망을 빌어대는 사람들의 내면의 빈곤함과 추악함을 생각하면, 종교라는 것이 일종의 감정의 배설물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소녀상'은 우상화하거나 타자화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살아 있는 역사로서, 우리가 늘 되새기고 잊지 말아야 할 치욕의 시간과 피해자인 조선의 여성들-우리의 누이들-의 아픔을 큰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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