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7월 15일
여름사냥 – 1976년 발간-1976년 7월 15일
단편-여름사냥-1969년 11월(월간문학 13호)
새벽 안개를 뚫고 학교(분교장)를 접수한 국군기병대. 마을 어린이들은 학교로 등교하지 못하고, 윗마을 향교를 빌려 공부하게 된다. 선생님을 따라 향교로 가는 길에 누군가 뱀을 발견한다.
뱀은 ‘아침의 정색(正色)한 햇볕 속에 대담하게 전라를 노출시키고’ 있었고, 뱀이 스르르 움직이자 아이들도 뱀을 따라 갔다. 흔한 물뱀이었지만 ‘유연한 움직임과 날렵한 혀끝에는 참을 수 없는 조롱의 시위’가 있었고, 소년들을 ‘전의(戰意)의 긴장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한 아이가 뱀을 향해 돌을 던졌고, 뒤이어 다른 아이들도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기습을 당한 뱀은 그만 절제를 잃고, 혀를 날름거리며’ 소년들을 향해 ‘저주를 퍼붓기 시작했다.’ 그리고 뱀이 숲을 향해 도망치자 소년들은 살기를 띄며 뱀을 쫓았다.
뱀은 수로를 지나 둑을 기어 넘어 밭이랑을 내달았지만, 누군가 던지 돌에 맞아 경련을 일으키며 죽어갔다. 소년들은 그 장면을 보면서 오싹한 공포를 느꼈지만, 다시 학교 가는 행렬로 돌아오면서 저마다 뱀을 죽인 것을 떠벌리며 자랑했다.
향교에서 오전 공부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소년들은 죽인 뱀을 나뭇가지에 걸거나 태워버리지 않으면 뱀이 다시 살아나거나 그 뱀의 짝이 복수를 한다는 말을 듣고 모두들 풀이 죽는다.
소년들은 다시 학교가 보이는 둔덕까지 와서 학교 마당에 보이는 말들과 건초와 여물들을 바라보았다. 햇볕은 눈이 부셨고, 말똥 냄새가 풍겨왔다. 기병대는 그날 서두르는 기색 없이 낮을 보내고 초저녁이 되어 마을을 떠났다가 새벽이 되자 다시 돌아왔다.
기병대가 학교를 점령하고 사흘이 지났을 때, 향교에서 하던 수업도 선생님이 나오지 않아 중단되고 말았다. 아이들은 선생님이 없어도 학교에 나오는 것처럼 향교에 모였고, 공부를 하는 대신 향교 마룻장 밑을 뒤지며 시간을 보냈다.
향교에서 아이들이 모이기 시작한 지 일주일이 되던 날, 아이들은 향교 앞을 지나가는 강아지를 발견하고, 올가미를 만들어 강아지 목에 걸고, 돌멩이를 던지기 시작했다. 피를 흘리는 강아지는 필사적으로 탈출하려고 버둥댔고, 마침내 올가미를 벗어나 도망했다.
강아지를 놓친 아이들은 다시 뛰어서 학교가 보이는 둔덕까지 뛰어 왔고, 말이 보이는 학교 운동장을 바라보다 한 아이가 학교의 종을 떼자는 제안을 한다.
밤이 되고, 기병대가 다시 학교를 떠난 다음, 아이들은 학교 근처에 모여 도둑처럼 교실 안으로 들어가지만, 학교는 텅 비어 있었다. 기병대는 완전히 철수한 것이다. 아이들은 종을 울리고, 맞은편 산자락에서는 총소리가 들려왔다.
이 작품은 1969년 ‘월간문학’에 가작으로 선정되었다. 김주영이 문예지에 공식 데뷔한 작품이기도 하다.
시골에서 한국전쟁을 겪은 소년들의 일상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이 작품 역시 작가의 자전적 체험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작품 속에 작가의 고향과 관련된 내용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 소설의 무대인 1950년대 초의 진보면에는 진보국민학교와 가까운 곳에 ‘광덕분교장’, ‘시량분교장’이 있었다. 소설 시작에 작가가 ‘분교장’이라고 일부러 밝혀 놓은 것을 보면, 진보면 소재지에 있는 진보국민학교는 아닌 것이 확실하다.
먼저, 작품 속에 나오는 ‘향교’는 지금도 진보면에 있는 ‘진보 향교’를 말한다. 진보 향교에 관한 정보를 찾아보니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嶺南邑誌(영남읍지)』「眞寶縣邑誌(진보현읍지)」에 의하면 진보향교는‘縣(현)의 북쪽 2리에 있다'고 하였으니 현재의 청송군 진보면 광덕리 이며 광덕산(廣德山)의 남쪽 기슭이다.
진보는 신라 경덕왕 2년(743)에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하여 고려조에 진안(眞安), 보성(甫城)으로 명명하기도 하였다. 조선조에 들어와 태조 시에 보성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세종 때에 일시적으로 청보군(淸保郡)으로 불렀으나, 곧 지금의 명칭으로 고치고 현(縣)으로 하였다. 그 후 성종 5년(1474)에 현인(縣人) 금맹성(琴孟誠)이 현감 신석동(申石同)을 구타한 사건으로 청송부에 이속(移屬)하였다가, 동왕 9년 복구되었다.
진보향교는 태종 4년(1404)에 건립되었다. 현재 초창지로 추측되고 있는 옥천면 관동의 명칭을‘향교들'이라고 하는 점으로 미뤄 볼 때, 이곳에 향교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또 권일암(權一庵)의 『一庵集(일암집)』에 의하면 고려말에 비봉산 시창(始創)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 후 영조 38년(1762) 광덕산 서쪽 기슭으로 이건했다가, 고종 18년(1882)에 구읍으로 또 이건하였다.
현재의 위치로 향교가 이건된 것은 고종23년(1886)이다. 그 후 1896년 진보현이 폐읍되고 청송군으로 합병될 때에 향교도 청송군 관할로 들어갔다. 광무 2년(1898)에는 명륜당을 중수하였다.2) 1976년에 대성전을 보수하고 단청을 새로 하였고, 1983년에 외삼문을 번와보수 하였다. 1984년에 대성전을 보수하였고,3) 1990년에 서재를 보수하였으며,4) 1992년에 동재를 중건하였다.5) 1993년에 교직사를 보수하였으며, 1994년에 재사(齋舍)를 중수하였다.6) 2003년에 대성전, 명륜당, 내삼문 등을 해체보수 하였다. 청송군지(靑松郡誌)에 의하면 본래에는 전사청(典祀廳)이 있었다고 한다.
그 외에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麟, 1658-1737)의「眞寶鄕校移建上樑文(진보향교이건상량문)」과 방산(舫山) 허훈(許薰, 1836-1907)의「眞寶明倫堂重建上樑文(진보명륜당중건상량문)」이 있다. 이외의 소장자료로는『遞任錄(체임록)』몇 권과『儒案(유안)』등이 있으며, ‘勸學記(권학기)'7) 등 다수의 기문이 명륜당 내부에 걸려 있다.
창건 이후의 연혁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404 창건
1762 이건
1882 이건
1886 이건
1898 명륜당 중수
1976 대성전 보수, 단청
1983 외삼문 번와보수
1984 대성전 보수
1990 서재 보수
1992 동재 중건
1993 교직사 보수
1994 재사(齋舍) 중수
2003 대성전, 명륜당, 내삼문 해체보수
이상과 같은 과정을 거쳐 현재는 대성전, 내삼문, 명륜당, 동재, 서재, 외삼문, 교직사, 화장
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상북도의 향교건축>에서 인용
진보 향교는 진보면 소재지에서 북쪽으로 약 1km 정도 떨어진 산자락에 있다. 향교 바로 뒤로는 산자락이 시작되는 남향에 자리하고 있으며 주위는 논밭이다.
주인공이 다닌 학교가 본교 즉 국민학교가 아닌, ‘분교장’으로 밝히고 있는데, 진보면의 진보국민학교 외에 면소재지에서 가까운 곳에 ‘분교장’이 두 곳 있다. 광덕분교장과 시량분교장이 그곳인데, 두 학교는 모두 폐교되었지만, 지금도 그 건물은 남아 있다. ‘광덕분교장’은 학교사택으로 지금도 쓰이고 있으며, ‘시량분교장’은 청송교육청에서 임대를 준 상태이다.
‘광덕분교장’과 ‘진보 향교’는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으며, 광덕분교장은 마당이 거의 없어서 이 작품의 무대로는 적합하지 않다. 작품 속에서도 ‘우리들은 제법 먼 학교까지의 들길을 뛰어서 왔고’라는 문장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시량분교장’이 거의 확실하다고 본다.
‘진보 향교’에서 ‘시량분교장’까지의 거리는 약 10리(4km)가 조금 넘는 거리여서, 아이들이 쉬지 않고 달리면 숨을 헐떡거리면서 도달할 수 있는 거리이다.
단편-무동타기-1974년 1월(한국문학 3호)
한국전쟁을 겪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월전면 막곡동에 조만간 미군부대가 들어온다는 소문으로 마을은 뒤숭숭하다. 소문의 근거는 누구도 알 수 없지만, 한편으로는 안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을 하는데, 박지발은 이 마을에서 거의 유일하게 서울 생활을 조금 했던 사람이라, 미군 주둔이 한몫 잡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정작 박지발은 서울에 올라가 술집에서 탕진하고 사기를 당해 가진 돈을 모두 잃고 귀향한 처지였다.
박지발은 그래도 여전히 다시 도시로 갈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그는 시골이 싫고, 자기만 바라보는 시골뜨기 아내도 싫었다. 그가 서울에서 돈을 다 잃고 배운 것은 사기치는 법이었다. 없어도 있는 척, 몰라도 아는 척, 이간질 하기, 자신의 배경에 권력이 있는 척 하는 것 등 온갖 치졸한 짓만 배운 것이다.
박지발은 미군 부대가 주둔하게 되면, 그 위치가 어디쯤일까를 고민하다 우연히 마을에 들어 온 랜드로버를 발견한다. 랜드로버는 금곡동과 막곡동의 중간 쯤 섰고, 양코배기와 통역이 차에서 내려 일대를 둘러봤다.
박지발은 막소주집에 마을 주민들을 모아 놓고, 미군부대가 들어오게 될 경우, 마을에 생길 일을 조목조목 제시했다. 미군이 주둔하면 ‘양갈보’가 집결하게 되어 마을의 안녕과 질서가 무너지고, 아이들의 정서 교육도 해치게 된다는 것과 ‘도깨비상인’이 드나들면 사회적 문제가 된다고 너스레를 떤 다음, 낮에 양키들이 왔다 간 곳에 건물을 하나 짓고 ‘막곡동 정화추진위회’를 구성하면 자기가 책임지고 미군부대의 주둔으로 발생할 위험을 방지하겠다고 설득했다.
마을 사람들은 박지발의 말이 그럴 듯 하다고 여겨, 다음 날부터 집을 짓기 시작한다. 박지발은 새로 지어진 집을 ‘정화추진위원회’로 삼기는 하지만, 실제 속셈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도깨비 물건을 암거래하는 전진기지로 삼을 생각이었고, 설령 그 집을 철거한다 해도 상당한 보상금을 받을 수 있어, 그 돈을 가지고 이곳을 떠나 서울로 갈 생각을 했던 것이다.
새 집이 지어지고, 박지발 가족은 새 집으로 이사했다. 박지발의 아내는, 백수건달 남편이 이런 재주를 피워 새 집을 마련한 것이 기쁘고 행복할 따름이었다.
그렇게 스무 날이 지나고, 박지발은 미군부대가 나타나지 않아 안달이 날 즈음, 자재를 가득 실은 트럭이 나타났다. 박지발은 자재를 싣고 온 사람에게 미군부대가 언제 오느냐고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미군부대가 아니라 예배당을 짓는다는 거였다.
단편-비행기타기-1974년 2월 (현대문학 230호)
월전면 막곡동에 예배당이 생기고, 사람들이 교회에도 다니기 시작하게 된 이후, 막곡동에는 또 다른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을 주변에 비행장이 생긴다는 소문이었다.
사람들은 소문을 믿지 않았고, 그런 소문을 물고 다니는 사람에게 지청구를 해댔다. 하지만, 소문은 사실이었다. 월전면의 산간지방에서는 아직도 무장공비들이 나타나 화전민을 위협해 식량을 빼앗아 가는 일이 벌어졌다.
군부대에서는 이 일대에 경비행기를 이착륙할 수 있는 비행장을 만들어 주면, 정찰기를 띄워 공비 잔당을 소탕하겠노라고 하달했고, 군청에서는 이 문제를 두고 면장 회의를 소집했다.
비행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마을 주민의 부역이 필요했기 때문에 다른 면장들은 모두 나서지 않았지만 월전면장 최억돌이 자진해서 나섰다. 최면장은 자신의 출세를 위해 군수에게 잘 보여야 할 필요가 있었고, 면장을 벗어나 더 높은 지위까지 오르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그렇게 비행장 공사는 시작되었고, 마을 주민들은 부역을 나왔다. 추운 겨울날 사람들은 화톳불을 쬐지도 못하고 추위에 떨며 일을 했다. 불 옆에는 군청과 면에서 나온 공무원들이 서서 감독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민들은 지레 짐작으로 가까이 가지 않았다.
면장은 군부대에서 화약을 얻어와 발파 작업을 시도했고, 발파가 끝나자 절벽 아래 쪽에서 두석이라는 사내가 피칠갑을 하고 올라왔다. 발파 작업을 하는 줄 모르고 대변을 보러 내려갔다 변을 당한 것이다. 최면장은 작업 감독을 하던 면서기를 불러 세워 소리를 질렀다. 다행히 두석은 크게 다치지 않았다.
그런 사고를 겪고 한 달이 지나 비행장이 완성되었다. 군수를 비롯해 지역 유지들이 준공 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비행기가 나타났고, 군인이 비행기에서 내리자 군수, 경찰서장, 면장들이 군인에게 달려가 악수를 하느라 요란했다.
군인들은 군수를 비롯해 면장들을 비행기에 태워 시승식을 했다. 최억돌 면장도 난생 처음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는 높이 떠올라 산과 도로가 작게 보이고, 자신이 마치 하늘을 나는 새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비행기가 다시 땅에 내려앉고, 최억돌 면장이 바깥으로 나왔을 때, 자기도 모르게 멀미를 하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런 최면장을 보며 비웃었고, 비행을 마친 두 군인은 군수에게 비행장의 위치가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을 말했다.
그러나 군수는 비행장 폐쇄가 오히려 반가웠다. 그 땅은 군수가 불하를 받아 과수원을 만들기 위해 생각했던 땅이었고, 비행장을 핑계로 정지 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단편-묻힌 이야기-1974년 9월(문학사상 24호)
1) 마부 이야기
박허술이 마을에 들어 온 것은 다른 피난민들이 몰려 들어올 때였다. 다른 피난민들은 길어야 며칠 묵고 떠나갔지만 박허술의 가족은 마을의 빈집에 눌러 앉았는데, 마을 사람과의 교류는 거의 없었다.
박허술 가족이 들어온 지 한 달이 흘러 피난민들의 발길도 끊긴 어느 날 밤에 마을에 인민군 기병대가 나타나 하루를 보내고 사라졌다. 인민군이 사라지고 군마 한 필이 박허술이 머물던 집 앞에서 어슬렁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박허술은 말을 소유하게 되었고, 마을에 짐 나를 일이 있을 때마다 박허술은 말을 끌고 나타나 짐을 날라 주었다. 소달구지는 전쟁통에 징발을 당해 짐 나를 때마다 마을 주민들은 박허술에게 부탁을 했고, 박허술도 마다하지 않고 선선히 부탁을 들어주었다.
게다가 마을 사람들의 부탁에는 돈도 받지 않았고, 장터에서 장돌뱅이를 대상으로 짐을 날라주고 삯전을 받아 생활할 뿐만 아니라 돈도 조금씩 모으게 되었다.
박허술의 아내에게는 속병이 있었는데, 마누라 속병을 고쳐보겠다고 읍내 돌팔이 의사 공영감을 알게 되었다. 공영감은 박허술에게 돈이 있다는 사실을 알자 돈을 빌려달라고 했고, 차용증을 쓰기는 했지만 글을 모르는 박허술에게 사기를 쳤다.
그즈음, 북한군 패잔병들이 다시 나타난다는 소문이 돌고, 그들이 양민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는다는 흉흉한 소문이 들리자 박허술은 말짐을 나르는 것보다 땅을 사서 농사를 좀 지어볼 생각으로 돈을 빌려 준 공영감에게 찾아가 빌린 돈을 달라고 했지만, 공영감은 적반하장으로 박허술에게 차용증에 쓴 돈을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박허술은 기가 막혔지만 공영감에게 사기를 당했다는 것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날 새벽에 마을에 북한군 잔당이 나타나 박허술의 말을 끌고 가려하고 있었다. 박허술이 항의하자 그들 가운데 한 명이 총을 쏘았고, 박허술은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2) 군수 이야기
박독불 군수가 우리 마을에 부임했을 때, 군청 직원들과 군의 유지들은 한 눈에 그가 별 볼일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눈치 챘다. 먼지를 뒤집어쓴 군수의 차가 도착해서 박독불 군수가 내렸을 때, 그의 외모는 형편없었다.
구두에는 먼지가 앉았고, 양복은 빌려 입은 듯 컸으며, 한쪽 다리도 절었던 것이다. 부임 인사도 그저 한 마디 인사만 하고 곧바로 군수실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군청 직원들과 면장들, 군내 유지들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비웃었다.
그러나 박독불 군수는 그리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군수로는 특이하게 운전사, 요리사, 전기배선 면허를 갖고 있었으며, 토목 공사에 관해서도 전문 지식이 있어 토건업자의 비리를 캐내기도 했다.
지방 유지들이 이권을 노리고 군수에게 접근하면 가차없이 욕을 퍼붓고 상대하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가난한 살림을 살았다. 여느 군수들이라면 공금도 쓰고, 업자들에게 돈도 받아서 부귀영화를 누릴 생각에 눈이 멀었지만, 박독불 군수는 심지어 자기 집도 없었다.
늙으신 어머니를 모시고 무려 여덟 명이나 되는 자식을 거느리고 살아가는 박독불 군수의 아내 역시 시골 아낙들이 입는 낡은 옷을 입고 사교를 위한 나들이는 꿈도 꾸지 못하며 살고 있었다.
군수의 자동차 운전수인 김계동이 군수의 집안 일까지 돌봐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군수의 여덟 아이들은 학교에서 무슨 일이 생기면 아버지인 박독불 군수보다는 운전수인 김계동에게 고자질을 하곤 했다.
그러면 김계동은 군수의 아이를 괴롭힌 학교 녀석들을 쫓아가 알밤을 먹이며 아이들의 복수를 대신 해주었던 것이다.
비록 군수의 운전수이긴 했지만, 김계동의 집은 군수보다 훨씬 잘 살았다. 그 돈이 어디에서 생긴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자기의 운전수가 비싼 담배를 꺼내 피우는 것을 보면서 군수 박독불 씨는 어딘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이 나타나 박독불 군수에게 동행할 것은 요구했다. 군수의 자동차 운전수인 김계동이 각 면에서 돈을 받았고, 군수가 시킨 일이라고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박독불 군수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옆에 선 사람의 뺨을 후려치며, 자신이 교도소에 가야 하느냐고 물었다. 군 직원은 당연히 아니라고 했고, 박독불 군수는 자신의 짚차로 가서 운전수 김계동을 내리라고 말하고, 혼자 차를 몰고 사라졌다.
그 날 저녁, 마을 밖 인적 드문 낭떠러지 아래에서 굴러 떨어진 차와 숨져 있는 박독불 군수를 발견했다.
단편-달밤-1975년 12월(문학과 지성 22호)
제재소 숙소에서 술을 마시던 황가와 최영감이 시비가 붙었다. 최영감이 황가를 보고 ‘소 밑구멍으로 빠진 놈’이라는 말을 내뱉는 순간, 예전에 정육점에서 칼질을 했던 황가는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해 최영감을 두드려 팼다.
함께 술을 마시던 달규가 뜯어 말렸지만, 오른손 손가락 네 개가 없는 몽당손 달규로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황가가 최영감을 멱살잡이해 술 상 위에 내동댕이쳤고, 달규가 최영감을 일으키려하자 최영감이 느닷없이 머리로 달규의 얼굴을 들이박아 달규의 코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피를 본 황가는 최영감의 머리를 문설주 기둥에 너댓 번을 개대가리 치듯 했다.
최영감이 사람 죽인다고 소리를 지르자 방문이 벌컥 열리고 조서기라는 자가 나타났다. 조서기는 윤사장 밑에 빌붙어 인부들의 수당을 떼먹는 악질이었다.
최영감이 공사장 야경꾼으로 남아 있는 것도 최영감의 퇴직금 4만원을 조서기가 처먹기로 하고 봐 준 것임을 황가나 달규 모두 알고 있었다.
조서기가 길길이 날뛰며 파출소에 신고하겠다는 걸 황가가 나서 겨우 말렸다. 조서기는 당장 이곳을 떠나라고 황가와 달규에게 말했고, 두 사람은 꼼짝 없이 한밤중에 정처 없이 길바닥에 나앉고 말았다.
그나마 달규에게는 작부로 먹고 사는 옥자가 있었지만 황가는 혈혈단신이었다. 기차를 타고 제천으로 가겠다는 황가를 기차역에서 배웅하고, 달규는 옥자가 있는 술집으로 들어섰다. 손님을 받고 있던 옥자는 달규가 온 것을 알고 서둘러 손님을 내보내고 달규를 맞이했다.
옥자는 이미 황가와 최영감이 싸운 것과 황가가 떠난 것까지 알고 있었다. 제재소와 담을 사이하고 있는 갈보집은 제재소 주인인 윤사장에게 눈앳가시였다. 윤사장은 제재소를 헐고, 그 자리에 관광호텔을 지을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바로 옆에 있는 갈보집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윤사장의 마름인 조서기가 낮에도 다녀갔고, 날마다 파출소와 보건소에서 임검을 나와 장사를 방해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갈보집 포주는 윤사장과 매매계약을 했고, 옥자는 포주에게 갚을 빚이 남아 있어 당분간 그곳에서 멀지 않은 판자집 동네에 방을 얻었다. 달규는 돈벌이를 위해 뱀을 잡으러 나섰다.
옥자는 달걀을 삶아 기차역 근처 여인숙을 다니며 달걀도 팔고 몸도 팔아 돈을 벌었다. 옥자가 밥을 짓고 있는 사이, 달규는 기가 막힌 생각을 해냈다. 달규는 옥자를 끌고 다시 여인숙으로 갔다. 잠을 자고 있던 남자를 두드려 깨운 뒤, 남의 유부녀와 간통을 했으니 가만두지 않겠노라고 했다.
사내는 조용히 해결하자며 2만원을 내놓았는데, 달규는 돈을 더 뜯어낼 심산으로 그 돈을 거절했다. 그 사이 누가 신고했는지 방범대원이 들어왔고, 사내와 옥자는 파출소로 끌려가고 말았다.
옥자는 오히려 매춘 행위로 구류를 살았고, 달규는 옥자와 혼인신고를 하지 않아, 법적으로 부부가 아니어서 간통죄는 성립이 안 된다고 했다. 옥자가 파출소에서 나오는 날, 달규는 사진관에 가서 둘이 사진을 찍었다. 혼례복을 입고 사진을 찍고 나와 달규는 옥자를 업고 집으로 향했다. 달빛이 찢어지게 밝았다.
단편-붉은 산-1972년 10월(월간문학 47호)
나는 소도시 병원 원장인 정치근 박사를 통해 ‘펄’이라는 소년을 알게 된다. 정 박사는 주민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고, 병원은 환자들로 붐볐다. 정 박사는 시를 쓰고 있는 나를 병원의 정원사로 채용해 주었고, 하루 두 시간만 정원 일을 시키고, 다소 과분한 월급을 주었다.
그즈음, 오후 여섯시 이후에 지프를 몰고 어딘가로 외출하는 정 박사. 나는 간호사에게 물어 정 박사가 도시 인근의 산에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나는 정 박사에게 정원 일을 하고 남는 시간은 산에서 보내게 해달라고 졸라 허락을 받는다.
산에는 정 박사의 먼 친척이 되는 사람이 관리를 하고 있었고, 나는 소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는 산을 찾아가 관리인을 찾았다. 산 속에 있는 관리인의 움막에서 불쾌한 냄새를 맡은 나는, 산에서 관리인을 만나지만, 관리인은 나를 반가워하지 않았다.
나는 그곳에서 처음 ‘펄’이라는 소년을 만난다. 세 사람은 소나무에서 송충이를 잡기 시작했고, 저녁이 되어 정 박사가 산으로 찾아왔다. ‘펄’은 정 박사를 향해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소리를 지르며 달려갔고, 자기가 잡은 송충이를 보여주었다.
관리인과 ‘펄’은 잡은 송충이를 웅덩이에 불을 피워 태웠는데, 정 박사가 송충이를 밀어 넣으며 은근한 쾌감을 느끼는 것을 본 나는 이상한 느낌을 갖는다.
나는 ‘펄’에게 강렬한 인상을 받았고, 다음 날 다시 산을 찾았다. 두 사람은 이미 보이지 않았고, 나는 혼자 송충이를 잡았다. 몇 시간이 지나 내가 두 사람을 만나고, 내가 잡은 송충이를 ‘펄’에게 덜어주면서 ‘펄’과 이야기를 나누어 ‘펄’의 과거를 알게 된다.
‘펄’은 왜관의 어느 고아원에서 왔으며, 고아원에서 데리고 온 강아지가 있었는데, 강아지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정 박사는 송충이를 잡으면 돈을 줄테니, 그 돈으로 강아지를 다시 사라고 했고, ‘펄’은 강아지를 사기 위해 송충이를 열심히 잡고 있었다.
나는 ‘펄’과 함께 산을 돌아다녔다. ‘펄’은 산을 잘 알고 있었고, 뱀을 무서워했다. 나는 ‘펄’과 헤어져 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마을 입구에 있는 주막에서 산 관리인을 발견한다. 관리인은 막걸리를 마시고 동전을 내 놓았는데, 그 돈이 ‘펄’이 모으고 있는 동전을 훔쳐 낸 것임을 알게 된다.
정 박사는 ‘펄’이 웃는 모습을 보아야 하루 일과가 끝났다는 안도감을 느낀다고 했다. 병원에서 환자들에게 자신의 행동과 표정을 탐색당하고 있다는 피해 의식에 사로잡혀 있다고 느끼는 정 박사는, 그에 대한 보상심리로 다른 사람을 탐색하는 버릇이 생겼고, 그 대상이 바로 ‘펄’이었던 것이다.
장마가 시작되어 더 이상 송충이를 잡을 수 없게 되자 나는 다시 병원에만 있게 되고, 어느 날, 정 박사가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을 보게 된다.
비가 개인 날, 나는 산으로 올라갔다. 관리인 노인을 만났지만 노인은 술에 취해 있었고, ‘펄’이 산으로 송충이를 잡으러 갔다가 독사에 물려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단편-과외수업-1974년년 9월(월간중앙 78호)
나는 시골에서 서울로 무작정 상경했다. 기차를 몰래 타고 청량리역에 내렸지만, 서울은 기름 냄새가 역겹게 나는 곳이었다. 역 앞에 있는 골목으로 들어가 여인숙 문을 열고 들어가 잠시 눈을 붙이고 가겠다고 말하자, 여자가 5백원을 선불로 달라고 했다.
내가 꼬깃한 돈을 내밀자, 그 ‘조바’는 나를 ‘자라 콧구멍만 한 골방’에 데리고 가더니, 혼자 잘 거냐고 물었다. 돈을 더 내면 여자를 붙여 주겠다고 했다. 나는 거절하고 도둑이 무섭기도 했고, 옆방에서 들리는 이상한 소리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었다.
나는 ‘느즈막히’ 일어나 여인숙을 나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서울 거리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아침 식사는 설렁탕을 150원 주고 사 먹고, 동대문 쪽으로 간다고 방향을 잡았지만, 서울 지리를 몰라 엉뚱한 미아리 쪽으로 가고 말았다.
배가 고파 밥을 먹기 위해 찾아간 곳이 ‘영일반점’이라는 중국집이었고, 그곳에서 짜장면을 주문했다. 여주인이 종업원을 불렀는데, ‘난옥이’라고 했다.
나는 짜장면을 다 먹고도 일어나지 못했는데, 지친데다 배가 불러 쉽게 일어나지 못한 것도 있지만, 이런 식당이라면 혹시 일자리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여주인인 듯한 아주머니가 나와서 먼저 말을 걸었다. 시골에서 올라와 일자리를 구하는 것 같은데, 우리 집에서 일을 하면 어떻겠느냐는 말을 듣고, 나는 두 말 할 것도 없이 그렇게 하겠노라고 답했다.
그렇게 ‘영일반점’에서 일을 시작했는데, 알고 보니 여주인의 남편은 집수리를 하러 다니고, 식당은 아주머니와 난옥이 둘이 하고 있는데, 아주머니가 임신 5개월이 넘어가서 일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가게는 개천 위에 지어져 냄새가 올라오긴 했지만, 음식 값도 싸고 양도 많아서, 근처에 있는 예대와 고등학교에서 가난한 학생들이 많이 찾아왔다.
나는 열심히 일을 해서 보름이 지나지 않아 이 식당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공동 수도에서 물을 길어오고, 난옥이가 해야 할 일까지 알아서 하니 주인 아주머니나 난옥이나 모두 나를 좋아하게 되었다.
나는 난옥이와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난옥이를 사랑하게 되었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휴일에는 난옥이와 함께 서울 구경을 하러 다녔다. 김밥에 사이다까지 사 가지고 창경원 동물원에 가서 동물 구경도 하고 김밥도 맛있게 먹었다.
나는 난옥이 앞에서 남진, 나훈아의 히트곡을 줄줄이 불렀는데, 난옥이는 내 노래를 듣고 방송국에서 하는 노래자랑에 나가 보라고 했다. 나는 그런 곳은 아무나 갈 수 없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난옥이 말대로라면 나도 출세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난옥이에게 잘 간직하고 있었던 2만원을 보여주었고, 방송국에 나가려면 깨끗한 옷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 돈으로 양복을 한 벌 맞췄다.
내 실력을 인정 받아, 예선을 통과하고 주말에 출연하는 본선에 나가게 되었다. 주말에 난옥이와 둘이 방송국 스튜디오에 갔다. 나는 열심히 노래를 불렀지만 박자하고 음정이 불안했다는 이유로 탈락하고 말았다. 그래도 방송국에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시골 사는 촌닭들은 상상도 못할 일이어서, 나는 면장이 된 것 보다 더 우쭐해졌다. 하지만 난옥이는 그리 좋아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주인 아주머니의 배가 더 불러오면서 아주머니 남편의 주사는 심해지고, 난옥이에게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 설날에 내가 고향에 내려갔을 때, 동네 사람들은 나를 마치 연예인처럼 떠받들었다.
나는 난옥이가 보고 싶어 일주일을 다 채우지 못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청량리역 앞에 있는 대왕코너에서 난옥이에게 줄 스웨터 한 벌을 사 들고 식당에 도착했지만 문은 닫혀 있었다. 배가 많이 부른 아주머니가 문을 열어주었고, 아주머니는 나를 붙들고 울음을 터뜨렸다.
난옥이하고 아주머니 남편이 눈이 맞아서 도망을 갔다는 것이다. 울고 있는 아주머니를 보면서 나는 가게 문을 다시 열자고 말했다.
단편-이장동화-1974년 5월(한국문학 7호), 재수록-9월(문학과 지성 17호)
1)장손이 동화
황만돌은 집안의 장손으로, 시골에서 올라와 서울에서 회사에 다니고 있다. 그는 결혼, 그것도 꽤 훌륭한 규수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여자대학교 앞에서 하숙을 하고 있는데, 장손의 격에 맞는 며느리감을 구하기 위해 무려 3년이나 여자대학교 앞에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여대에서 축제를 하는 날, 황만돌은 회사에서 아프다고 엄살을 부려 조퇴를 하고, 집에 돌아와 스포티한 옷을 갈아입고 여자대학교의 정문을 들어섰다.
남녀 쌍쌍이 짝을 이룬 대학 캠퍼스에서 황만돌은 솜사탕 두 개를 들고 혼자 외로운 여대생을 찾아 나섰다. 한 시간이나 헤매다닌 끝에 연못가에 앉아 있는 공주 같은 여대생을 발견한 것이다.
선뜻 다가서지 못하는 황만돌을 보고, 여대생 옥자가 먼저 말을 걸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인사를 나누고, 황만돌이 점심을 사겠다고 해서 교정을 벗어나 택시를 타고 시청 앞까지 왔다. 학교 근처에서 짜장면을 먹어도 될 일이었지만, 황만돌은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해야 여자를 확실하게 꼬실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황만돌은 스카이라운지에 자주 온다고 허세를 부리고, 주문한 햄버거를 ‘야성미 넘치는 몸짓으로’ 먹어치운 뒤, 한참을 노닥거리다 다시 영화를 보러 갔다. 영화를 보고 다시 저녁 식사를 하고, 다방에서 커피를 마시니 밤 열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황만돌의 한달치 하숙비가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헤어질 때가 되었지만, 황만돌은 초조해졌고, 옥자를 끌고 골목으로 들어가 여관에 가자고 꼬드겼다. 옥자도 선선히 따랐다. 두 사람은 여관에서 하룻밤을 지냈지만, 황만돌은 옥자의 연락처를 물어보는 것을 잊고 있었다.
황만돌은 회사를 나흘씩이나 무단으로 결근하면서 여자대학 주변의 다방, 음악감상실 등을 헤매다녔다. 그리고 나흘째 되는 날 학교에서 나오는 옥자를 다방에서 발견하고, 그녀의 뒤를 밟았다. 옥자는 학교가 아닌,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학원 건물로 들어갔다. 그리고 대학진학반 교실에 앉아 있는 옥자를 발견하고는 눈에 안개가 끼는 것을 느꼈다.
2)한심이 동화
한심이는 3년 전,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 고향에 있을 때, 서울에서 내려 온 농촌근로봉사대의 한 대학생의 꼬임에 넘어가 몸을 바치고 말았는데, 서울가면 연락을 준다던 그 대학생은 끝내 소식이 없었고, 기다리다 지친 한심이는 서울에 올라와 공장에 다니며 그 대학생을 찾아볼 생각이었지만, 현실은 술집 접대부로 팔려가게 된 것이다.
영등포 버스 종점 근방에 있는 ‘영일옥’에서 작부로 일하게 된 한심이는 건너편 정육점 최씨가 좋아 죽는다고 달라붙는 바람에 쇠고기는 실컷 얻어먹었다.
하지만 최씨가 고기를 빼돌려 작부들에게 먹이는 것을 알게 된 주인이 최씨를 내쫓자, 최씨는 한심이가 일하는 술집에서 죽치기 시작했고, 그 꼴을 보다 못한 한심이는 ‘영일옥’을 떠나 중랑천 근방의 ‘옥돌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 다시 두 남자가 치근대기 시작했는데, 한 놈은 상수도 검침원이고, 다른 놈은 요식업조합 수금원이었다. 한심이는 이 삼각관계를 숨기고 있다가 들통나는 바람에 요식업 수금원에게 복날 개패듯이 맞아 들어눕고 말았다.
한심이는 몸져 앓는 동안, 작부 생활을 청산하고 돈 많은 집의 가정부로 들어가서 혼자 된 영감을 물고 늘어지자는 생각을 했다. 한심이는 직업소개소에 가서 낮은 임금을 불러 쉽게 가정부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한심이는 어느 양옥집의 가정부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돈 많은 사장님과 늘 자리에 누워 한약만 달여 먹는 박색의 사모님과 고등학생인 둘째 아들과 국민학교 2학년의 막내아들이 있었다.
집안 일은 전기제품이 다 자동으로 알아서 해주었고, 사모님은 늘 앓아누워 남편인 도상태 사장과 거리가 멀었고, 사장님은 한심이를 예쁘게 보는 것 같았다.
운전기사 오씨가 가끔 귀찮게 구는 것은 무시하면 그만이었지만, 고등학생인 둘째 아들은 한심이에게 늘 면박을 주고, 입맛도 까다롭게 굴었다.
한심이는 온갖 정성을 다해 집주인인 도상태 사장을 어떻게든 꾀어보려고 애를 썼다. 도 사장의 발을 닦아주면서 젖무덤도 보여주고, 치마를 걷어붙여 허벅지도 드러냈다. 얼굴이 반반하고 한창 피어오르는 한심이를 밤에 몰래 찾아올 것이라는 기대를 하면서.
그리고 그날 저녁, 누군가 한심이 방을 몰래 들어왔고, 도상태 사장으로 철썩같이 믿은 한심이는 그의 욕구를 소리내지 않고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는 도상태 사장이 아닌, 둘째 아들이었다.
단편-머저리에게 축배를-1975년 11월(한국문학 25호)
1) 한사코 기어들기
한겨울, 영하 20도를 오르내리는 강원도 화천의 전방 부대의 공휴일은 가난한 병사들에게 춥고 외로운 시간이었다. 그들은 외출한 장교들이 없는 병영의 사무실에서 난롯불을 쬐며 막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바깥에서는 찬바람이 살을 애이듯 날카롭게 불었고, 난롯불을 피웠지만 등짝은 추운 사무실에서 그들은 시시껄렁한 잡담을 하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 사무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야기에 팔려 노크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었고, 선임하사인 한중사가 노크 소리를 듣고 들어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천천히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역시나 신병이었다. 추위에 바짝 얼어붙은 채 들어 선 그 병사는 엉거주춤하게 서서 우리들을 바라보았다.
한중사가 왜 왔느냐고 물었고, 그는 인사과에서 이곳 작전과로 발령을 내서 왔다고 느리게 대답했다. 그는 한눈에도 고문관임을 알 수 있는, 눈치며 요령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답답한 친구였다.
한중사가 전입신고를 하라고 했으나, 겨우 자기 이름이 배팔만이라는 것만 말했을 정도였다. 화가 난 한중사는 배팔만을 업드려뻗쳐를 시키고 빠따를 다섯 때 때리는 것으로 전입신고식을 했다.
눈치도, 요령도 없는 배팔만은 부대의 ‘고문관’이 되어 온갖 심부름과 고참들의 스트레스 해소, 각종 작업의 사역병 등 힘들고 괴로운 일을 도맡아 했지만, 정작 그 자신은 불평도 하지 않고 묵묵히 그런 일들을 해냈다.
배팔만이 고문관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배팔만이 고참이나 장교들에게 경례도 바르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가끔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장교들에게 걸리면 따귀며 군화발로 쪼인트를 까이는 일이 발생하곤 했다.
그래도 배팔만의 행동은 달라지지 않았다. 거수 경례를 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느리고 서툰 행동으로 고문관으로 찍힌 다음부터 온갖 지청구와 애물단지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중사가 배팔만을 찾았다. 다들 배팔만이 또 사고를 쳤다고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배팔만에게 휴가 명령이 내려 온 것이다. 휴가 때는 아직 멀었는데, 연대장이 직접 휴가를 보내라고 명령했다니, 부대원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배팔만이 휴가를 떠난 다음 날이 되어서야 우리는 배팔만이 휴가를 얻게 된 이유를 알게 되었다. 영외 거주하는 장교 숙소의 연락을 배팔만이 맡고 있었는데, 장교들이 바둑을 두는 옆에서 훈수를 두다 얻어맞으면서도 훈수 두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다고 한다.
장교들 사이에서 배팔만이 ‘바둑 선생’으로 알려지시 시작했는데, 연대장이 그 소문을 듣고, 배팔만을 불러 바둑을 두게 되었다. 2급 실력의 배팔만은 6급의 연대장에게 바둑을 가르쳐 주다가 휴가가 가고 싶다고 말했고, 연대장은 무려 20일의 휴가증을 끊어주었던 것이다.
우리들은 배팔만의 두 얼굴에 충격을 받았고, 배신감으로 심하게 분노했다. 하지만 20일을 기다려야 배팔만이 돌아올텐데, 그때쯤에는 충격이나 배신감도 김이 빠져버리고 말 일이었다.
하지만 배팔만은 휴가 나간 지 나흘만에 부대에 복귀했다. 그는 고향인 포항까지 내려가지도 못하고, 서울에서 친구와 술을 마시다 헌병에게 걸려 옥신각신하다 곤죽이 되게 얻어터지고는 곧바로 부대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2) 미련 없이 뱉어내기
우리가 전역을 하고 다시 배팔만을 만난 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우연이었다. 배팔만은 우리 부대에서 약 1년 정도 근무하고는 다른 부대로 전속되어 소식이 끊겼다. 우리는 제대한 이후 녀석을 까맣게 잊고 있었고, 은하물산에 입사하고 1년이 지나서 회사 복도에서 우연히 마주친 것이다.
배팔만은 한 달 전에 총무과에 입사했고, 우리들은 배팔만과 함께 밤새 술을 퍼마셨다. 배팔만의 바둑 실력은 여전히 2급이었고, 우리는 배팔만을 ‘판매과’로 끌어들이기 위해 갈보집에도 데려가고, 회사 상무에게도 부탁을 해서 마침내 배팔만을 판매과로 끌어오는데 성공했다.
우리가 배팔만을 굳이 판매과로 끌어들인데는 이유가 있었다. 판매과 과장인 지천억을 다른 부서로 쫓아내기 위한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장 지천억은 어렸을 때 공부도 지지리 못하던 놈이 갑자기 출세를 해서 잘난 척을 하는 것처럼, 유치하고 한심한 꼴불견이었다. 회사에서 그런 자를 과장으로 승진시켰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할 수 없었다.
과장 지천억이 잘 하는 것은 눈 뜨고 볼 수 없는 아부와, 가장 먼저 출근하는 부지런함뿐이었다. 우리는 과장 앞에서 노골적으로 면박을 주거나, 과장이 시키는 일을 엉뚱하게 하거나, 상사들 앞에서 과장과 의견이 맞지 않음을 신랄하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정작 우리편으로 생각했던 배팔만은 과장을 몰아내는 일에 동참하지 않았다. 우리도 배팔만이 싫다는 것을 억지로 끌어들일 생각은 없었다. 배팔만은 부서가 바뀌고 나서 새롭게 적응하느라 몹시 바빴다.
배팔만은 영업에 서툴러 거래처를 확보하기도 어려웠고, 확보해 놓았던 거래처를 뺐기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과장 지천억에게 수모를 당하면서도 주눅들지 않고 더 부지런히 영업을 하러 뛰어다녔다.
그에 비해 우리는 적당히 다방에 가서 레지들과 히히덕거리기도 하고, 거래처를 잃지 않기 위해 관리하는 정도로 현상유지를 했다. 우리가 소극적인 영업을 한 것은 과장인 지천억을 부서에서 쫓아내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마침내, 회사에서도 우리 판매과의 실적이 부진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이유가 과장과 사원들의 의견이 맞지 않아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그리고 과장이 자리에 없던 어느 날, 전무는 우리를 불러 과장 지천억의 무능에 대해 말했고, 우리는 전무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을 표시했다.
다음 날, 과장 지천억은 생산공장의 한직으로 좌천되었고, 우리는 축배를 들었다. 이제 남은 것은 새로운 과장 발령이었는데, 우리는 기존의 판매과 직원들 가운데서 과장이 나올 것으로 기대했고 당연히 그랬다. 바로 배팔만이 과장이 된 것이다.
우리가 과장 지천억을 내쫓을 궁리를 하고 있을 때, 배팔만은 자기가 맡은 구역의 영업을 부지런히 뛰어다녀 훌륭한 성과를 내고 있었다. 회사에서는 실적이 가장 좋은 배팔만을 과장으로 앉히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우리도 할 말이 없었다.
과장으로 승진한 배팔만을 위해 술자리가 벌어졌다. 전무를 비롯해 판매과 직원 모두가 참석한 술자리에서 우리는 배팔만 과장의 승진을 축하했다. 그런데, 전무가 술집 여자를 더듬고 있는 것을 본 배팔만이 전무의 멱살을 잡더니 주먹으로 턱을 쥐어박았다. 자기가 마음에 둔 여자를 더듬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우리는 배팔만을 위해 축배를 들었다.
단편-체류일기-1973년 12월(월간문학 58호)
나는 가난한 가장이다. 아내와 두 아이가 있지만, 날마다 술을 마시고 들어와 숙취로 고생하며 출근을 한다. 아이들도 가까이 하지 않고, 아내도 ‘고속버스라도 타다 죽어 주었으면’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8년째 아침마다 차가운 설탕물을 마셔야 일어날 수 있고, 결혼은 무덤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살아가는 것이 마땅치 않다. 교도소 담벼락을 따라 출근하는 길에 우연히 편지봉투를 발견한다.
회사에 도착하지만, 직원들과의 사이도 서먹하고, 과장은 나를 불러 결재 서류를 지적한다. 그의 지적에는 나를 무능한 직원이라는 질책이 담겨 있다.
그때 동료 직원이 나에게 전화가 왔다고 알려준다. 경찰서에서 온 전화라고 했다. 나는 순간 아침에 있었던 일로 긴장하지만, 경찰서 분실센터에서 내 주민등록증이 들어 있는 수첩이 접수되었다는 것이다.
사장이 올 시간이 되자 모두들 긴장하며 사장의 등장을 기다리는데, 사환이 들어오더니 사장이 출장을 갔노라고 전한다. 직원들은 마음 속으로 안도하고 기뻐한다.
나는 한 두 개의 할 일을 미루고, 사무실 미스 오에게 데이트를 하자고 추파를 던지지만 미스 오는 거절한다. 오전 근무가 끝나고, 나는 과장에게 조퇴를 신청한다. 동료도 슬쩍 따라와 두 사람은 골목을 배회하다 청량리 사창가에 들어가 대낮에 여자를 산다.
다시 두 사람은 대폿집에서 술을 마시고, 밤 늦게 술집에서 쫓겨나다시피 나와 헤어진 뒤 나는 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아침에 주은 편지봉투가 생각났고, 나는 편지를 부치기 위해 밤거리를 달려 나간다. 멀리서 통금 사이렌이 울리고 있다.
단편-아내를 빌려 줍니다-1975년 9월(창작과 비평 37호)
기흥산업의 조덕배 관리 상무는 순풍에 돛단배를 탔다. 겨우 스물여덟 젊은 나이에 일류대학을 나온 엘리트들도 오를 수 없는 위치에 순식간에 오른 것이다.
출세의 유형도 여러 가지가 있을테지만, 조덕배의 출세는 기존의 유형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출세였다. 조덕배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해 가방끈이 매우 짧았다. ‘불학무식’한 시골 촌놈이었는데, 그가 대도시인 대구로 나와 일자리를 얻은 곳이 대봉동에 있는 미8군 사령부 후문 밖에 있는 세탁소였다.
미군을 상대로 하는 세탁소에서 다림질을 하던 조덕배는 조지 팍이라는 흑인 상사과 가까워졌고, 미국에 있는 자기 아들과 비슷한 또래라면서 조덕배를 귀엽게 여겼다.
그러던 어느 날, 조지 팍의 아들이 자동차 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대성통곡을 하던 조지 팍이 조덕배를 불러내 미국에 함께 가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덕배의 고향에는 부모님에 가난하게 살고 계셨고, 평생 세탁소에서 썩는다는 생각에 절망한 덕배는 비행기를 탈 수 있고, 고등학교에도 보내준다는 말에 조지 팍의 양아들이 될 결심을 한다.
미국에 도착했지만, 조지 팍의 집도 가난했다. 그래도 약속대로 덕배는 학교에 다닐 수 있었지만, 영어를 못하는 것 때문에 결국 학교도 중간에 포기하고 말았다. 이웃집 트럭운전사의 트럭을 세차해 주고 얻는 용돈벌이가 전부였고, 황인종이 덕배가 미국에서 발붙이고 살 길이 막막했다.
그런 덕배에게도 좋아하는 여자가 생겼다. 이웃의 트럭운전수 딸이 엘리자베스는 백인이면서도 황인인 덕배를 좋아했다. 엘리자베스는 얼굴에 주근깨가 딸기씨처럼 박힌 못생긴 얼굴이었지만 둘은 결혼했다.
향수병에 걸린 덕배는 미국에서는 먹고 살 길이 막막하다고 생각해 다시 고향인 한국으로 돌아갈 것을 결심했다. 양아버지인 조지 팍이 한국행 비행기표를 사 주었고, 덕배는 백인 아내와 함께 김포공항에 내릴 수 있었다.
고향에 돌아왔어도 갈 곳이 없는 부부는 외국인 숙소에 임시 머물렀고, 덕배는 아내 엘리자베스를 위해 서울 관광을 다녔다. 그들에게 행운이 시작된 것은 백인 아내 엘리자베스 덕분이었다. 한국에서 영어학원을 운영하는 미국인 과부가 엘리자베스에게 학원 강사 자리를 알선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부부 강사로 일을 시작했고, 미국 유학을 계획하는 젊은 사람들이 실용회화를 배우는 시간이었다. 강사 혼자 강의하는 것에 비해 덕배 부부, 아니 엘리자베스 부부의 대화 강의는 훨씬 실감나고 재미있어서 인기가 많았고, 몇 달 사이에 수강생도 두 배로 늘어났다.
덕배 부부는 강사료도 올려받았고, 서울시장에게 주한외국인에게 주는 감사장도 받았다. 그리고 감사장을 받고 나서 덕배 부부는 잘 나가던 영어학원을 그만 두었다.
그것은 한 사내의 방문 때문이었다. 그 사내는 자기 회사의 사장님의 부탁으로 덕배 부부를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싶다는 말을 전달하러 온 것이고, 무역회사와는 거리가 멀었던 덕배는 처음에 그 사내의 부탁을 거절했지만, 애걸복걸하는 사내에게 인심쓰는 듯 허락을 했다.
그렇게 마련된 저녁 자리에서 도상태 사장은 덕배에게 회사 상무 자리를 주겠다고 했다. 조건은 덕배의 아내 엘리자베스를 사장이 참석하는 파티에 파트너로 빌려준다는 것이었고, 그 대가로 덕배에게는 회사 상무 자리와 월급 20만원에 승용차를 고정 배치해 준다고 했다.
덕배는 아내 엘리자베스에게 전후 내용을 설명했고, 엘리자베스는 그 조건을 수락해서 마침내 덕배는 아내가 도상태 사장의 파트너로 일주일에 한 두 번 파티에 참석하는 것만으로 편안하게 집에서 놀고먹을 수 있게 되었다.
무역회사의 사장 도상태 역시 자신이 생각한 것 이상의 효과를 거두고 있었다. 외국인 여성을 파트너로 데리고 참석한 파티에서 사람들은 도상태의 파트너인 엘리자베스에게 큰 관심을 보였고, 도상태를 부러워했다.
사람들은 엘리자베스가 도상태의 ‘세컨드’라고 여겼고, 그런 능력을 가진 도상태를 부러워했다. 엘리자베스 덕분에 도상태의 사업은 눈에 띠게 성장했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고, 덕배가 걱정했던 엘리자베스의 탈선은 전혀 없었다. 파티가 끝나면 엘리자베스는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던 어느날, 그날도 파티가 예약되어 있다는 도상태의 비서 말에 준비를 하고 나간 엘리자베스가 밤 12시가 넘어서도 돌아오지 않았다.
덕배는 도상태 사장에게 전화를 걸어 입에 담지 못할 악담을 퍼부었다. 하지만 도상태 사장 자신은 저녁 일찍 집에 돌아와 줄곧 집에만 있었다고 했고, 비서가 차를 빌려달라고 해서 차를 빌려주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비서가 자신도 차가 돌아오지 않아 걱정하고 있었는데, 비서가 조금 전에 전화해서 시외에 있어 내일 오겠다는 말을 했노라고 전했다. 그리고는 덕배에게 이것을 끝으로 회사와의 관계는 끝났다고 냉정하게 말했다.
덕배는 무작정 아파트 밖으로 뛰쳐나가 달려갔다. 방범대원이 덕배를 붙잡았다.
단편-금의환향-1975년 11월(세대 148호)
억수는 밤을 새워 노름을 하다 가진 돈 십만 원을 다 잃는다. 그는 개평으로 주는 만 원도 뿌리치고 밖으로 나온다. 억수가 잃은 돈은 가족의 이주비였다. 그가 새벽에 집에 들어가자 젖먹이 애기가 울어댔다. 아내는 말은 없었지만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하고, 하루를 꼬박 굶은 뱃속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났다.
자는 줄 알았던 마누라의 타박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억수. 아내는 남편과 시동생 모두 밖으로 나돌며 가족 돌보기를 소홀히 하는 것에 불만을 터뜨렸고, 무려 9만원을 노름으로 잃고 돌아 온 억수는 대꾸할 염치가 없었다.
동장 오동칠이 운영하는 마을 구멍가게는 날로 번창하고 있었다. 가게 옆 이발소도 의자를 새로 갈아 번듯해졌다. 아이들은 구멍가게와 이발소 앞에서 골목이 터져나가라 뛰어 놀았다.
몸집이 좋은 두 사내가 아이들을 붙잡고 동장 집을 물었다. 동장 오동칠을 찾아 온 사내들은 마을에 팔려고 내놓은 땅이 있는지를 물었다.
하지만 낙동강에 다목적 댐을 만들려는 정부의 발표가 있었고, 오동칠 동장의 마을도 물에 잠기게 되었다. 두 사내는 마을이 물에 잠기는 것을 알고 있었고, 헐값에 나오는 땅을 살테니 구전을 먹고 소개를 하라는 것이었다.
동민들이 하나 둘 땅을 내놓기 시작했고, 중간에서 오동칠 동장은 짭짤하게 이익을 챙겼다. 땅을 산 사내들은 그 땅에 유실수를 심기 시작했다. 나무는 살리려고 심는 것이 아니라, 보상을 위해 무조건 많이 심는 것이 목적이었다. 마을 주민들은 나중에야 그런 사실을 알았지만 이미 땅을 팔아버린 뒤라 어쩔 수 없었다.
억수 마누라도 이런 마을의 전후사정을 알게 되고, 억수에게 바가지를 긁어가며 닦달을 해댔다. 마침 억수 동생 달수가 집으로 들어와 억수에게 도장을 찍어달라고 했다.
다목적 댐 공사를 위한 1차 보상이 시작되었고, 마을에 돈이 돌면서 읍내에는 가장 먼저 술집이 생겼다. 돈이 생긴 마을사람들은 술집에서 작부를 옆에 끼고 흥청거렸다.
달수도 읍내 술집에 있는 작부 죽자를 알게 되었고, 죽자에게 같이 도망가서 살자고 꼬드겼으나 의외로 죽자는 달수의 말에 넘어가지 않았다. 돈 10만원으로 타지로 도망가자는 달수의 말에 콧방귀를 뀌는 죽자는 적어도 60, 70만원은 있어야 하겠노라고 했다.
구룡동 수몰민 추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보상금을 받은 주민 일부는 마을을 떠났고, 주민들은 주머니에 들어 온 돈을 쓰는 재미에 빠져들었다. 그 와중에 마을의 몇몇 청년들은 보상금이 너무 적고, 땅을 구입한 타지 사람들이 얻은 이익 가운데 일부를 돌려달라는 투쟁을 벌이기로 의논할 때 동장 오동칠이 들어왔고, 달수는 마을 땅을 앞장서서 팔아먹었다며 오동칠을 구타했다.
달수가 군대에서 제대한 다음, 형인 억수를 졸라 돈 30만원을 얻어 내 부산으로 달려갔다. 그 돈을 밑천으로 사업을 해보려던 달수는 한 달을 헤맨 끝에 양은 그릇 장사를 시작했다.
근근히 장사를 이어갈 무렵, 우연히 만난 동업자 최가에게 일본으로 밀항을 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일본에 가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던 때여서 돈을 들여 일본에 갈 수만 있다면 마다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최가와 그 일당이 달수를 노리고 저지른 사기극이었고, 달수가 내린 곳은 마산의 바닷가였다. 달수는 농부의 신고로 경찰에 잡혀 간첩으로 몰렸으나, 형 억수가 달려와 겨우 간첩혐의는 벗었지만 밀항을 시도한 죄로 6개월 감옥살이를 했다.
감옥에서 나온 달수는 다시 부산으로 가서 최가를 찾아 갈비뼈를 부러뜨릴 정도로 분풀이를 했지만, 결국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달수가 앞장선 수몰민 추진위원회가 주민들에게 진정서 도장을 받으려고 하지만 주민들의 협조가 수월하지 않았다. 동장인 오동철이 뒤에서 달수가 하는 일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달수 역시 어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달수는 애초에 땅을 매입하던 두 사내를 찾아 읍내 여관으로 갔다. 달수는 사내들에게 마을 땅을 사서 얻은 부당이익금 가운데 일부를 내놓으라고 했지만, 두 사내는 달수의 형, 억수의 땅값만이라면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결국 달수는 억수가 판 땅값 가운데 20만원을 더 받아냈고, 억수의 아내는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닭을 잡고, 쌀밥을 지어 먹었다. 달수는 죽자가 있는 한성옥에 갔지만, 죽자는 이미 다른 남자에게 마음을 주었고, 달수와는 헤어질 궁리를 하고 있었다.
냉정하게 대하는 죽자를 보면서 달수는 울화통이 터져 죽자를 패기시작했다. 그때 경찰이 달려왔고, 읍내의 두 사내가 달수를 폭행죄로 감옥에 보내기 위해 동장 오동칠과 벌인 작전으로 달수는 다시 6개월의 감옥생활을 해야 했다.
6개월 뒤, 출소를 하는 달수 앞에 죽자가 나타났다. 죽자도 마음을 주었던 한가에게 가진 돈을 몽땅 빼앗기고 만 것이었다. 두 사람은 함께 살기로 약속하고, 다시 시골마을로 향했다.
이 소설집 뒤에 문학평론가 김주연의 작품 해설이 실렸다.
‘농촌과 도시의 사이에서’라는 제목의 이 평론에서 김주연은 ‘채만식 이래의 유수한 풍자작가로 성장하리라는 것을 나는 믿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