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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건우 Oct 28. 2018

수준 낮은 인간들이 있다

수준 낮은 인간들이 있다

세계를 이해하는 방법을 설명할 때, 과학에서는 '차원'을 말한다. 1차원은 점, 2차원은 선, 3차원은 면, 4차원은 3차원에 시간을 더한 것이다. 인간은 분명 4차원을 살아가고 있지만, 4차원을 이해하지는 못한다. 시간을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3차원을 이해한다. 아주 어린아이도 3차원의 삶을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즉 바닥을 걷고, 벽을 구분하며, 공간을 입체로 인지하는 능력이 있다. 이런 능력은 태어나서 배운 것이 아니라, 이미 유전자로 물려받은 공감각 능력이고 본능으로 알고 있다.

반면, 작은 곤충을 보면 3차원 공간에 살고 있지만 인간이 보기에 매우 단순하고 의미 없는 행동을 할 뿐이다. 곤충류는 사람이 얼마든지 쉽게 죽일 수 있을 정도로 움직임이 뻔히 보인다. 인간은 곤충의 생명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전능'한 존재다.

같은 인간이라도 사람에게는 수준이 있다. 인간은 평등한 존재임에 틀림없지만, '존재'가 평등하다고 해서 개개인의 수준에 차이가 있다는 것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그것은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이고, 바로 그 수준 차이 때문에 사회에 계층이 발생하는 것이다. 계층은 계급과는 다른 개념이고, 계급 사회에서도, 계급이 사라진 사회에서도 계층은 존재할 것이다. 단, 여기서 중요한 점은, 계층에 속한 집단의 수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수준 낮은 인간'이란 개인을 말한다. 그리고 수준 낮은 인간들이 모인 집단이 존재한다.

'수준이 낮다'는 개념은 논리적, 과학적 근거가 있는 표현일까. '수준이 낮다'는 문장만으로도 여러 종류의 철학적 질문을 던질 수 있고, 사회적 합의에 필요한 논쟁을 이끌어 낼 수 있을 정도다. 천천히 질문을 따라가보자. 우선, '수준'의 개념과 정의는 무엇일까.

'수준이 낮다'고 할 때, 당연히 수준이 높은 상대적 개념이 있을테고, 높고 낮은 것의 기준이 되는 것은 무엇이냐는 의문이 제기된다. '수준'의 개념은 개인의 세계관이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 있지만, 다시 '세계관'이 무엇이냐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즉 '세계관'은 무엇이며, 세계관에도 높고 낮은 것이 있을 수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된다. 개인의 가치관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가치관'은 개인의 주관적 성격이 강하므로 사회에서 합의한 기준을 놓고 판단해야 한다. 가치관보다 넓고 다양한 개념으로 개인의 사상을 규정하는 것이 '세계관'이라면, '수준'을 규정하는 것은 결국 '세계관'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추론할 수 있다.

한 사람의 세계관은 그 사람의 출생부터 부모의 성향, 성장 과정, 교육의 정도, 살면서 겪은 다양하고 결정적 경험들에서 만들어진다. 단 한 사람도 똑같은 경험을 하지 않지만, 거시적으로 볼 때, 사람들은 수준이 높은 사람과 수준이 낮은 사람으로 갈린다. 또한 수준 차이는 언제나 상대적 개념이어서, 사회에 존재하는 수준 낮은 사람들을 솎아내면, 다시 전체 집단에서 일정 부분의 수준 낮은 사람들이 나타나게 된다.

수준 낮은 인간이란, 바꿔 말하면 반민주, 비도덕, 비윤리적 인간이다. 즉 세계관이 건강하지 않은 인간을 말한다. 이들의 특징은 공동의 윤리보다는 자신의 이익을 우선하고, 정의보다는 이익과 손해를 계산해서 이익이 되는 쪽으로만 움직인다. 세계관의 기준이 '나의 이익'에 있기 때문에 이들 수준 낮은 인간은 역사를 이해하지 못한다. 친일매국을 해도 자기에게 이익이 된다면 얼마든지 선택한다. 그들은 '양심'이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가책'도 느끼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 수준이 낮은 인간은 싸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 성향을 갖고 있다. 이들은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데, 그 본능은 자신의 생존이다. 이들이 자본주의 체제를 적극 옹호하고 지지하는 이유는, 자본주의가 약육강식의 논리를 가장 철저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 수준 낮은 인간이 볼 때, 가장 위대한 인간형은 '자본가'다. 자본가는 이윤을 추구하는 이념의 화신이다. 즉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자본가이며, 그들이 지배하는 사회가 자본주의 체제다.

역사와 사회를 이해하지 못하는 수준 낮은 사람은 주어진 환경-자본주의 체제-을 절대로 받아들인다. 그들이 공산주의 사회나 북한에서 태어났다면 가장 열렬한 체제옹호자로 변신하게 된다. 이들은 루쉰이 말한 '아Q'와 닮은 유형이다. 이들은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한편 권력-부패한 권력-의 냄새를 맡는 본능이 있다. 부패한 권력에 기대는 심리는 자신의 내부가 단단하지 못해서 스스로 생각하거나 판단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 강한 힘에 의존하려는 이유 때문이다.

수준이 낮은 사람들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다. 가난하게 자라서 배우지 못한 무지랭이 인민이 있고, 약간의 교육을 받았지만 자신의 머리로 생각할 능력은 안 되는 어리석은 인민이 있고, 교육을 많이 받고 사회에서 엘리트 집단에 속한 사람이지만, 뇌회로에 문제가 있어 도덕과 윤리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민이 있고, 엘리트 집단의 일부는 자신이 반사회 범죄행동을 하고 있다는 걸 잘 알면서도 자기의 이익을 위해 철저하게 거짓말과 조작을 하는 인민이 있다.

가장 단순한 예로, 공중도덕을 지키자는 사회적 합의가 있다. 집단이 약속한 이 최소한의 규율 조차도 지키지 않는 인간들이 바로 수준 낮은 인간인 것이다. 거리에서 침을 뱉고, 담배꽁초를 버리고, 쓰레기를 아무 곳에나 버리는 행위는 분명 여러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고, 필요없는 사회비용을 지불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런 정도의 낮은 수준은 적은 사회적 비용만 치루면 되지만, 지식과 권력으로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은 국가 재정에 심각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은 물론, 사회의 뿌리를 썩게 만들고, 사회의 줄기를 무너뜨리는 거대한 범죄를 저지른다. 지난 9년간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한 바로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사악하고 저열하며, 야비한 공작과 탐욕으로 나라를 이렇게 망가뜨린 것을 확인했다.

수준 낮은 인간은 우물안 개구리와 같다. 자신이 바라보는 세계가 고작 우물 위 동그란 하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동굴 속에 사는 원시인들과 본질에서 같다. 그들은 외부의 충격에 공포를 느끼며, 자신과 다른 모든 것에 두려움을 갖고 공격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무지가 곧 공포의 근원이라는 점에서, 수준 낮은 인간의 특성은 무지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무지함은 학교 교육을 말하는 게 아니다. 수준이 낮다는 건 천박하다는 뜻이고, 천박함은 학교 교육과 아무 관련이 없다. 

촛불이 만든 정부를 헐뜯고 모함하는 야당의 국회의원들, 이명박, 박근혜를 옹호하는 수구꼴통들, 정부보조금을 자기돈처럼 마음대로 쓰는, 정부보조금을 받는 사립기관의 기관장들, 하버드대학을 나온 어떤 인간, 방송국 기자로 인터뷰를 조작한 어떤 전 기자, 만화를 그리는 어떤 만화가, 이재명 경기도지사를 헐뜨는 여자들 그리고 일베충들이 바로 수준이 낮은 천박한 것들이다.

문제는, 수준 낮은 인간들이 자신을 대표하는 더 수준 낮은 인간을 국회에 보낸다는 것이다. 

수준 낮은 인간들의 유형은 다양하지만, 그들이 발생하는 경로는 몇 가지 있다. 태어날 때부터 어리석은 인간이 있다. 그것이 그의 탓은 아니지만, 뇌 활동이 부진하게 태어난 것이다. 이들은 세계를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정도가 매우 한정되어 있어, 태생적으로 지능과 사고력이 부족한 사람이다.

성장 과정에서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들,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한 사람, 학대당한 사람의 일부,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 일부에서 수준 낮은 사람들이 나타난다. 이들은 자신의 내면이 황폐한 것을 외부에서 충족하려 한다. 그것이 파괴적이고 공격적 성향으로 드러나며, 자연히 민주주의, 자유, 평화, 평등과 같은 개념에 적대감을 보인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자신의 능력이나 인격이 폄훼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 가운데 의도적으로 천박한 역할로 돌아서는 사람이 있다. 김문순대나 이재오, 변모 같은 사람들이 대표적 인물이다. 이들은 명예욕과 권력욕이 큰 사람이지만 그것을 충족할 방법을 정상의 방법으로 찾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반대의 길로 들어섰다.

민주주의가 힘들고 위대한 점은, 이런 수준 낮은 인간들까지 다 끌어안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독재국가라면 이런 인간들은 쉽게 처리할 방법이 있을 것이지만,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라서 개인의 자유를 최대로 존중한다. 그래서 국가의 생산성과 효율성은 매우 낮아서, 개인당 지출하는 비용대 효율이 낮다. 수준 높은 시민이 수준 낮은 인간들을 돌봐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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