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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건우 Mar 02. 2019

내가 쓰는 나의 이야기


이 글을 쓰는 나는 사회적 기준에서 평범, 평균보다 낮은 정도의 수준이다. 즉, 우리 사회에서 평범하고 평균의 삶을 사는 사람들보다 부족하고 어리석게 살았다. 그 기준을 두고 말하자면 꽤나 복잡하겠지만, 경제적인 면, 학벌이나 인맥 등과 같은 눈에 보이는 것을 포함한, 넓은 의미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학력도 보잘 것 없고, 가난하게 자랐고, 그래서 사회의 인맥도 거의 없다. 이런 사실은 2003년 지금 살고 있는 시골로 내려오기 전까지의 이야기다.

그래서 평균 이하의 내가 열등감에 휩싸여 있다거나, 스스로를 한심하게 생각한다는 뜻은 아니다. 전체로 봐서는 평균 이하지만 한두 가지는 평균보다 조금 웃도는 것이 있으니 이렇게 글도 쓰고, 나름대로 행복하게 살고 있다.

사람들은 말한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바로 ‘나’라고. 또 말한다.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가족이나 친구 등 주위 사람이라고.

‘나’의 본모습을 완벽하게 아는 사람은 없다고 본다. ‘나’는 나를 주관으로 보고 있고, 주위 사람은 나를 객관으로 보고 있다. 나를 바라보며 해석하는 것은 나 자신이거나 주위 사람이거나 모두 정확하게 보겠지만 일부만을 보고 있을 것이다.

50년 넘게 살다보니 내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해 가장 뼈저리게 느낀 것이 첫 번째 인식이고, ‘나’의 존재에 대한 이중성, 불명확성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 두 번째 인식이다.

내가 ‘나’라는 것은 알겠고, 내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으며, 잘 하는 것, 못 하는 것,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등이 어떤 것인지도 잘 알고 있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정신세계의 깊숙한 곳에서 일어나는 갈등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한다.

이런 내용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은 전혀 생각하지도, 알지도 못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그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요소가 될 것이다.

내 경험이나 생각으로 미루어, 사람들은 저마다 남들에게 말하지 못하거나, 말할 수 없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다고 본다. 말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말하기 난감한, 말을 꺼내기 어려운, 두려운, 거북한, 자존심 상하는 내용이기도 할 것이고, 말을 꺼내본들 다른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만큼 절박하게 받아들이지도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에 말할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나만 유별나고 중뿔나게 고민과 갈등과 속앓이를 한다고 생각하는 것부터 유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고 보면, 개인이 가지고 있는 자의식은 모두 유치하고 가치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사람은 저마다 짊어질 수 있는 만큼의 삶의 무게를 감당하면서 살고 있다. 그러니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모두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가치가 있다고 해서 모두 알곡처럼 쓸만하다는 뜻은 아니다. 사람에 따라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 있듯이 꼭 필요한 사람, 있으면 좋은 사람,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사람, 필요 없는 사람 등으로 나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특히 인간을 ‘도구’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므로 사람의 가치를 낮게 여기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지만, 어떤 사회에서건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 사람들도 유형이 다양한데, 반사회적 행동을 하는 범죄자부터 단순한 잉여 인간까지 ‘쓸모없는’ 인간들은 필연으로 생기기 마련이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혼자 사는 것이 아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말씀하신 분도 있지만, ‘인간(人間)’이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사람이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그냥 나온 말이 아님을 나이 들어 더 잘 알게 된 것이다.

‘나’는 변한다. 나이에 따라 외모가 바뀌듯이, 지식이 쌓이고, 경험이 많아지면서 눈으로 보는 사물의 현상과 본질에 대한 판단과 이해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하고, 늘 회의(懷疑)하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스무 살 중반에 시작한 공부로 인해 내 삶의 전반기와 후반기가 분명하게 갈리는 경험을 했다. 삶의 전반기가 유아에서 청소년의 시기였다면 후반기는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한 첫 단계라고 할 수 있겠다.

그 다음 단계가 서른 중반에 결혼을 하고, 자식을 얻은 것이라고 하겠다. 작은 단계로 나누면 더 많아지겠지만,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보면 나는 끊임없이 어리석음을 깨닫는, 어리석은 자신을 돌이키고, 반성하고, 후회하고, 다짐하는 시간들이었다.

나이가 많아진다고 저절로 현명하고 지혜로운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학력이 높은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현명하거나 지혜롭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어리석은 상태로 살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들이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상관없다. 다수의 사람들은 나이 들어도 어리석고 한심하게 말하고 행동하며 시간을 소비하고, 의미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사회에서 쓸모 있는 존재가 되고, 개인의 삶이 높은 문화 수준을 영위하며, 지성과 예술이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믿는다. 다만, 그렇게 하려면 몇 가지 전제 조건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 태어나 죽을 때까지, 즉 ‘요람에서 무덤까지’ 걱정하지 않고 지내야 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의료, 교육, 주거가 그것이다. 몸이 아프면 누구나 걱정없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거나 입원할 수 있어야 하고, 4살부터 대학까지, 또는 평생 교육까지 입학금, 등록금 걱정 없이 다닐 수 있어야 한다. 집을 마련하기 위해 평생 은행빚을 얻어 쓰고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상황도 없어야 한다.

말하기 쉬워서 세 가지 예를 들었지만, 이 세 가지를 해결하려면 사회의 구조를 바꿔야 한다. 즉, 현재의 착취구조형 자본주의 체제에서 개인의 행복은 극소수만이 누릴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 세 가지를 바꿔야 한다고 말하면, 많은 사람들은 ‘글쎄...’하면서 쉽게 동의하지 않는다. 잃을 것이 전혀 없는 가난한 사람들도 선뜻 옳다고 말하지 못한다.

너무 오랫동안 ‘자본주의 사고방식’에 쇄뇌되어 왔기 때문에, 행복한 조건들이 눈앞에 있어도 믿지 못하는 것이다.

이야기가 옆길로 새고 있어 다시 본래의 ‘나’로 돌아오면, 나는 현실에 발을 딛고 사는 욕망 덩어리의 인간이자, 인간의 탐욕을 극대화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염증을 느끼는 존재다.

‘개인’의 자유와 결정과 책임을 존중하는 사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소수의 사람들이 부자로 살기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가난하게 사는, 공빈공락共貧共樂의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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