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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건우 Sep 16. 2020

잊지 못할 동네 후배

001-동네 후배


1970년대 중반까지 마포에 살았다. 공덕동, 지금 한겨레신문사 맞은 편 언덕의 어느 골목집에서 태어났는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번역가이자 작가 안정효 선생이 살던 바로 옆집이었다. 자라면서는 도화동, 그러니까 지금 마포 네거리, 4호선, 5호선 공덕역이 있는 그 네거리 바로 옆 우체국 뒷담에 붙은 무허가 판자집에서 살았다.

지금은 철둑도 다 헐려서 시야가 트였지만, 철둑이 있던 오래 전에는 그 철둑 아래로 지나는 굴이 세 개 있었고, 하나는 온전히 개천이 흐르고, 가운데는 비가 많이 오면 개천이 되지만 바닥을 띄운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이 있었다. 세번째 굴은 통행로의 절반을 판자로 막아 집을 짓고 살았는데, 대낮에도 어두운 그 굴집들은 항상 불이 켜져 있었고, 습한 냄새가 났다.

우리집도 무허가여서 형편은 좋지 않았지만 우체국 뒷담을 끼고 있었고, 바로 앞으로 개천이 흘렀다. 개천 위로 가설한 통행로를 놓아서 마치 긴 회랑처럼 다닐 수 있었고, 여러 집이 잇대어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누나의 손을 잡고 마포국민학교에 입학한 것이 가장 오래된 기억이다. 그때가 아마 1968년 무렵이지 않았을까. 아버지와 함께 전차를 타고 창경원에 갔던 기억도 있다. 나는 전차를 탄 마지막 세대인 셈이다. 그보다 더 오래된 기억은 몇 개의 조각인데, 내 기억으로는 두 번 집을 잃었던 때가 있었다. 집을 떠나 철둑에서 서강 쪽을 바라보며 갔는데, 돌아오는 길을 찾지 못했고, 나는 경찰 짚차를 타고 집앞까지 와서 경찰이 어머니에게 나를 인계하던 기억이 난다. 짚차는 하얀색이었다. 국민학교 들어가기 전이니 여섯, 일곱살 무렵으로 기억하는데, 철둑, 경찰 짚차의 이미지가 선명하다.

집 바로 앞이 개천이라 나는 동무들과 함께 그 개천에서 물놀이도 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어머니가 더 이상 물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다. 그때는 이미 물에 들어갔다 나오면 몸에 이상한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국민학교 고학년 무렵에는 친구들과 개천을 따라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했는데, 우리집에서 철둑 굴다리를 지나 조금만 올라가면 그때부터는 개천 위로 모두 집을 지어 자연스럽게 굴처럼 보였다. 개천은 그리 깊지 않았지만 몹시 더러웠다. 우리는 스티븐 킹의 소설에 나오는 소년들처럼 호기심이 이끄는대로 어둡고 깊은 개천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서 보면 안 되는 것들을 봤다.

우리는 베이비 붐 세대여서 또래 친구들이 많았다. 가난한 집 아이들은 부모의 살뜰한 보살핌을 받을 수 없었다. 거의 방치하다시피 내놓고 키웠고, 그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우리는 친구들끼리 어울리며 고물을 주워 고물상에 팔아 푼돈을 벌어 군것질도 하고, 만화가게에서 만화도 봤으며, 버스를 타고 세검정까지 가서 맑고 시원한 물속에 뛰어들어 시원한 여름을 즐기기도 했다. 불과 열 두어살의 어린이들이었지만, 우리는 많은 일을 찾아서 했고, 언제나 바빴으며, 신나게 놀았다.

못된 형들이 싸움을 붙이기도 하고,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놀이를 하다 다리가 부러지기도 했지만, 그건 극히 드문 사건이었고, 보통은 마을에서 딱지치기, 구슬치기, 자치기, 비석치기, 다방구 같은 놀이들로 시간을 보냈고, 나는 만화가게에 가는 시간이 점점 많아졌다.

텔레비전이 귀하던 시절이라, 돈을 받고 텔레비전을 보여주는 집이 있었는데, 하루 저녁에 10원이었다. 나중에는 만화가게에서도 돈을 받고 텔레비전을 보여주었다. 보통 2시간 정도를 볼 수 있었는데, 초저녁에 어린이를 위한 만화영화가 가장 큰 인기였다. 그때 '타이거마스크', '요괴인간 벰, 베라, 베로', '밀림의 왕자 레오' 같은, 일본만화를 더빙한 만화영화가 큰 인기를 끌었다. 


집에서 학교 가는 길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문을 나서면 긴 회랑의 가설 골목이 있고, 그 길의 끝 양쪽에 주막이 있었으며, 그 주막이 있는 작은 네거리에서 왼쪽은 개천을 건너는 다리, 정면은 굴다리, 오른쪽으로 나가면 공동수도가 있고, 우체국 후문이 있었다. 우체국 바로 앞이 큰길이고, 그 길을 건너면 바로 '마포극장'이 있었다. 마포극장의 포스터는 늘 멋있었다. 마포극장을 지나 골목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경보극장이 있었다. 나는 어려서 어머니 등에 업히거나 따라서 극장에 자주 갔는데, 영화를 상영하는 중간에 연예인들이 나와 '쇼'를 했다. 영화 상영은 보통 두 편이었으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유일한 오락거리이기도 했다.

경보극장을 지나 골목을 따라 약간 오르막 길을 올라가면 마포국민학교가 있었다. 내가 다닐 때, 학교에 커다란 지하공간이 발견되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만든 방공호라는 말이 있었다. 나는 육성회비를 제 때 납부하지 못해 수업시간에 집으로 돌려보내지기도 했다. 울면서 떼를 써봐야 없는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학교는 다녔지만 전혀 즐겁지 않았던 학교였다.

마을에는 또래 아이들이 많았는데, 학년에 따른 위계가 분명했다. 고학년은 고학년끼리, 저학년은 저학년끼리 놀았다. 고학년은 철둑을 따라 용산 청과시장에 가서 길거리에 버린 깨진 수박을 먹기도 하고, 말린 고구마를 싣고 가는 기차를 따라 서강을 지나 당인리까지 가기도 했다.

고학년, 저학년이 함께 놀 때도 많았는데, 고학년들은 책임감을 갖고 저학년 동생들을 돌봐주었다. 물론 우리는 가부장사회의 자식들이었고,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이 지배하는 독재사회에서 자랐기에 어지간한 폭력은 폭력으로 생각지도 않을 정도였다. 내 아버지는 우리를 한 번도 때린 적이 없었지만, 우리 동네에서 아버지에게 맞고 자란 친구들은 많았다. 주로 '노가다'를 다니는 아버지들은 저녁에 술을 한 잔 걸치면, 자식들 머리통도 쥐어박거나, 손발로 아이들 몸뚱아리를 멍들게 하기도 했다.

그때는 사회의 대부분이었던 도시빈민의 자식들이었지만, 어린이들은 건강했다. 머리에 부스럼이 생기고, 코를 빨아 먹으며, 쓰레기를 뒤지고 다녀도 대개 건강하게 자랐다. 그러다 가끔 앓기도 하고, 열병을 앓거나, 두드러기가 생기기도 하고, 죽을 고비도 넘겼다. 

동네에는 장애가 있는 아이도 있었다. 나보다 한 학년 아래 아이였는데,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절었다. 지금은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나 혐오가 옳지 못할 뿐 아니라 범죄라는 생각이 상식이지만, 70년대만 해도 공공시설 내부, 버스, 술집, 다방에서 남자들은 담배를 피웠고, 장애인은 마치 불가촉천민 같은 삶을 살아야 했다.

갈고리가 달린 의수를 한 장애인이 망태를 짊어지고 다니며 종이를 주웠고, 버스 안에서는 장애인이 종이를 나눠주며 갱생을 도와달라고 사람들에게 돈을 빼앗다시피 위협하기도 했다. 목발을 짚거나, 다리를 절거나, 맹인이거나, 농인들은 으레 조롱과 비하,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그 시대는 봉건의 그림자가 걷히지 않았고, 독재는 민주주의와 개인의 인권, 자유를 혐오했기에, 차별과 혐오를 조장했다.

우리 아이들은 어른들이 하는 말과 행동을 보고 자랐기에,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혐오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나도, 다른 친구들도 한 살 어린 그 아이를 부를 때, 이름을 부르기 보다 별명을 만들어 불렀다. 그 아이가 다리를 전다고 '찐따'라는 별명을 불렀고, 백인 혼혈인 아이는 '튀기'라고 불렀다. 우리는 야만의 사회에서 정글의 생존경쟁을 하는 동물들이나 다름없었다.

그 많던 동네 친구들도 지금은 어디 사는지 알 수 없고, 이름도 모두 잊었지만 다리를 절던 그 한 살 어린 후배는 지금도 생각난다. 너무도 미안하고, 나 자신이 부끄럽다. 철없던 어린이가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지만, 그 아이에게는 얼마나 큰 마음의 상처가 되었을까. 평생 잊을 수 없는 부끄러운 기억이고, 그 후배에게 평생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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