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있는 아침이었다.
근래들어 갑작스럽게 쌀쌀해진 날씨에 가디건을 챙겨입었다.
어김없이 일찍 출근한 마루는 연수실 창밖의 가을비를 내다보며
커피한잔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여유라고 하기에 민망할 정도로 짧은 순간이지만,
정신없이 보낼 하루를 앞두고 함께하는 창밖 풍경과 커피는 사치스러울 정도로 충분했다.
'이래서는 당분간 요- 앞 공원도 못가겠네'
돗자리 하나 달랑들고 근처 공원으로 나가서 신나게 뛰어놀려 했던
마루의 계획이 계속되는 비예보로 모두 틀어졌다.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면 마루는 문득 이렇게나 하루하루의 날씨를,
순간순간 변해가는 계절들을 가득 느끼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궁금해졌다.
4월이면 봄
7월이면 여름
10월이면 가을
12월이면 겨울
한달동안 생활주제로 계절과 관련된 모든 것들을 알아보며 생활해야 하는 직업이었다.
학생때만 해도 봄이되면 그저 '벚꽃놀이, 야구개막' 정도의 이벤트로 들뜨는 정도였다.
생각보다 둔감한 면이 있는 마루에게 계절의 변화 같은건 단지
추워지면 껴입고, 더워지면 어딜가도 에어컨을 찾기바쁜 날씨의 변화일 뿐이었다.
마루에게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 대자연의 기적'
같은 말은 별로 공감되는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선생님이 된 마루는 둔감할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직업이 마루를 둔감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선생님이 되고난 후에는
가을에는 다람쥐, 밤, 도토리와 관련된 노래를 끊임없이 들어야 했고
감나무를 만들어 교실 곳곳에 걸어야 했으며,
가을에 나는 채소, 과일 등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어야 했다.
직접 가을늘씨를 느끼러 돗자리를 들고 나가야 했고
가을에 사는 곤충들이며 동물, 가을에 피는 꽃들에 대해서도 알아봐야 했다.
마치 강제로
"자연이라는건 신기할 정도로 아름답지 않니?
한낱 미물인 곤충조차 여름에살고 가을에 사는 것들이 따로 있어.
우리 눈에는 아무리 똑같은 날의 반복인 것 같아도,
나무들은 조용히, 하지만 쉴새없이 색을 갈아입으며 산이며 도시의 색깔들을 바꿔놓아.
같은 바람이지만 여름에 부는 바람과 가을에 부는 바람은 추억의 냄새도 달라지게 만들고,
항상 보는 하늘이지만 매일 높이와, 구름과 색을 바꿔가지."
라며 자연의 이치와 경이로움을 강요당하는 것 같았다.
생각보다 괜찮은 가스라이팅 같았다.
문득, 마루는 이 직업이 썩 힘들지만은 않게, 오히려 사랑스럽게까지 느껴졌다.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계절은 당연히 변하는 것이었다.
숨쉬는 것 만큼 당연한 것들을 아이들과 소중하게 하나하나 알아보며
아름다움을 한가득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제 마루는 알밤 하나로 아이들과 게임도 하고,
도토리 하나로 보물찾기도 하면서 가을을 잔뜩 느낄 차례였다.
아이들이 하나둘 교실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을은 아이들의 옷에도 숨어 있었다.
아이들의 옷이 두꺼워 지고, 여러겹이 되어갔다.
여름에는 반팔차림에 가방만 달랑 메고 오기 때문에 아침 정리가 편했다.
하지만 가디건, 바람막이를 입고 온 아이들은
학기초에 배운 옷걸이에 옷 거는 법을 다 까먹은 듯 했다.
다시 하나하나 옷을 펴고 옷걸이를 어깨에 끼우고 여민 후 옷장에 넣는 법을 알려줘야 했다.
가을이 주는 귀여울 정도의 수고로움이었다.
그리고 옷을 정리한 뒤 아이들은 어김없이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약속이나 한듯이 마루의 책상 위에 차곡차곡 쌓아놓았다.
'약'
마루의 책상에 쌓인 아이들의 감기약을 보며,
마스크를 쓴 아이들의 얼굴을 보며,
콜록이는 아이들의 기침소리를 들으며
다시한 번 가을이 왔음을 실감하는 마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