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프란시스 하>, 책 『쇼코의 미소』
평소에 어른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나 자신에게 실망할 때마다 '나는 아직 어리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지도. "야, 너 나이면 아직 어린 게 당연한 거야!" 물론 22살이면 아직 제대로 된 사회생활도 해보지 않은 어린 나이다. 하지만 왠지 주변에는 같은 나이에도 어른스러운 친구들이 많은 것 같다. 특히 인간관계에 있어서 말이다. 정신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되고 싶다. 하지만 그게 마음처럼 쉽지 않다. 한 가지 중요한 문제는 대부분의 경우,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어른스러운 것인지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알고 있으면서도 실제로 그렇게 하는 것은 어렵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느낌이다. 친구와, 연인과 별 것 아닌 일로 다투었거나 갑자기 사이가 멀어졌다고 생각해보자. 어떻게 된 일인지 되짚어보니 내가 참 애같이 행동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다고 먼저 다시 다가가기는 어렵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혼란스러워하다가 그대로 방치해버린 관계들. 누구나 한 번쯤은 고민했을 문제다.
이쯤에서 노아 바움백의 영화 <프란시스 하>와 최은영의 소설집 『쇼코의 미소』를 소개한다. 두 이야기 모두 자기 내면의 어린 감정에 휘청이며 비틀대는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흑백 연출이 인상적인 영화 <프란시스 하>는 27살 여성 프란시스(Frances Handley)의 이야기다. 프란시스는 유명한 무용수가 되고 싶어 하지만 지금은 이름 없는 무용단에서 연습생으로 뛰고 있다. 그녀에게는 소피라는 친한 친구가 있다. 영화의 시작은 프란시스와 소피가 일상의 대부분을 함께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장면들이다. 남자친구도 있지만 프란시스에게 소피는 '베프'이자 가장 소중한 존재다. 그러던 어느 날 소피가 자신의 남자친구와 같이 살기로 하고 다른 곳으로 떠난다. 프란시스는 혼자 남게 되었다. 프란시스는 소피의 빈자리를 느끼고 외로워 하지만 그렇지 않은 척 잘 지내려고 하고 하지만 남자친구에게는 이상하게 정이 가지 않아서 헤어지고 웬 이상한 친구들과 동거를 하게 되는데 마음 맞는 사람은 없고 또 갑자기 무용단에서 해고당하면서 월세 낼 돈은 없고 소피는 나 없이도 행복하게 잘 지내는 것 같고 모든 게 혼란스럽고.. 그런 이야기다.
프란시스는 결국 소피와 크게 싸운다. 나중에는 어찌저찌 관계를 회복하지만 사이가 예전 같지는 않다. 자신의 꿈도 좌절되었고 프란시스는 이제 무용을 기획하는 스태프로 일한다. 그게 영화의 끝이다. 이게 뭐람. 결국 뭐 하나 해결된 것이 없지 않은가? 아니다. 잘 풀린 일은 하나도 없지만, 영화 마지막의 프란시스는 어딘가 달라진 것 같다. 시종일관 유쾌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어딘가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이던 프란시스가, 이제는 조금 어른스러워진 것 같다. 뭐가 달라진 걸까?
한편 최근에 읽은 최은영의 소설집 『쇼코의 미소』는 <프란시스 하>와 동전의 양면처럼 동일한 문제의식을 공유한다고 느꼈다. 총 7편 중 3번째 소설인 「한지와 영주」는 주인공 영주가 수도원의 단기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 유럽으로 향하면서 시작된다. 그곳에서 영주는 아프리카에서 온 청년 한지를 만난다. 둘은 더없이 가까워졌지만 연인 사이로 발전하지는 못하고 저녁마다 산책을 하며 함께 시간을 보낸다. 영주는 한지를 계속 보고 싶다. 한지가 곧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속으로 괴로워한다. 그렇게 다가올 이별의 순간을 애써 무시하던 중, 한지는 예고 없이 어느 날부터 영주를 모른 척한다. 영주는 어떻게든 다시 한지에게 말을 걸어보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결국 마음을 닫아버린다. 둘은 그렇게 한순간에 남이 돼버렸다. 영주는 시간이 지난 후에도 한지와 보낸 시간을 그리워하며 그 기억을 회상한다. 그리고 언젠가 깨닫는다. 아, 그때 한지와 나는 너무 어렸구나.
위에서 소개한 영화와 책은 그게 우정이든 사랑이든, 모두 관계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어리다는 건 무엇일까? 관계에 있어서 어리다는 건 영원성에 대한 집착이다. 좀 더 넓은 관점에서 보면 어리다는 건 모든 일이 다 자기 뜻대로 될 거라고 생각하는 마음이다. 물론 세상만사가 우리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우리 모두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다. 그러나 유독 인간관계에 대해서는 누구나 어린아이 같은 믿음을 가진다. '이 관계는 영원히 지속될 거야'라는 믿음 말이다. 우리는 친구나 연인이 영원히 내 곁에 있을 거라고 쉽게 믿어버린다. 설령 예상치 못한 일로 사이가 멀어지더라도 나의 노력으로 관계를 돌려놓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건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내가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물론 착각이지만.
나는 그 침묵 속에서 내가 얼마나 그 시간에 집착하고 있는지 알았다. 그 시간은 영원해야 했다. 다른 시간들처럼 함부로 흘러가 버려서 과거 속에 폐기되어서는 안 됐다. - 「한지와 영주」 중에서
프란시스는 소피와의 관계가 영원할 거라 믿었다. 영주는 한지와의 시간이 영원해야 했다. 그들은 관계의 가변성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어쩌다 보니 가까워져서 관계가 시작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멀어질 수도 있다. 별다른 '합리적인' 이유 없이 말이다. 우리 모두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인정하기는 어려울 때가 많다. 관계의 가변성을 인정할 수 없을 때 사람들이 종종 취하는 전략은 스스로 그 관계를 파기해 버리는 것이다. 소피에게 느닷없이 화를 낸 프란시스처럼, 한순간에 자기 마음대로 영주와의 관계를 끝내버린 한지처럼.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은 내 눈에 보이지 않게 치워버리고 싶은 어린 감정이다. 글을 쓰면서 생각해보니 나도 관계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해 완전히 등을 돌려버린 적이 몇 번 있었다. 사람 사이의 가까워짐과 멀어짐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일이 아님을 인정해야겠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건 적당한 거리두기가 아닐까? 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많은 의미를 두면 그만큼 멀어지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든 법이다. '모 아니면 도'가 아니라 그 사이 어딘가를 찾아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다가오고 떠나는 것에 크게 흔들리지 않고 좀 더 차분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 테니까.
인간관계는 어렵다. 그리고 나는 아직 어리다. 어른스러운 사람인 척하려고 억지로 노력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어차피 그렇게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겪을 만큼 겪으며 고민하다 보면 조금씩 받아들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관계는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일희일비하지 않고 흘러가는 대로 지켜볼 줄도 알아야 한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