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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Dec 05. 2017

구원은 어디에 있나요

영화 <밀양>

종교는 선험적이다. 


선험적이라는 말이 이 문장에 적합한지는 모르겠지만.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신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이고, 신이 인간에 앞서 존재한다는 믿음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렇지 않은 종교도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기독교는 그렇다. 종교가 선험적이라는 것은 자신의 필요에 의해 종교를 믿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다. 나는 유신론자이며 교회에 다닌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의구심인지 반성인지 모를 생각들이 뒤엉킨다. 나는 진정 종교인인가? 나는 종교의 근본적인 의미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종교를 믿고 있는 걸까? 


이창동, 밀양(Secret Sunshine), 2007

이창동 감독의 <밀양>은 전도연에게 '칸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선물해 준 영화다. 이 영화는 신과 인간의 관계, 속죄와 구원에 대한 깊이 있는 고찰을 담아내고 있다. 주인공 신애(전도연)는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고 아들과 함께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온다. 신애는 상실감을 떨쳐내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자 한다. 종찬(송강호)은 그녀에게 호감을 갖고 그녀가 밀양에서 정착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인물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아들마저 유괴범에 의해 살해당하자 그녀는 극심한 절망에 빠진다. 


여기까지는 뻔한 멜로 영화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고통스러워하던 신애가 우연히 교회로 향하면서 영화는 급격하게 종교적 논의로 빠져든다.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말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진지하게 종교 문제를 다룬 영화는 처음이라 좀 놀랐다. 더군다나 기독교를 믿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이 영화는 어느 방향으로든 충격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영화의 플롯은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규칙을 철저하게 준수하는 듯하다. 힘든 일을 겪고 극한의 고통 속에서 신애는 종교로 빠져든다. 신애에게 처음으로 교회를 다니라고 권유하는 사람이 약사인 것은 흥미롭다. 신애가 몸이 아플 때 약을 처방해주던 사람이 신애가 어려운 일을 당하자 교회에 나가보라고 한다. 종교를 처방해준 것이다. 신애는 교회에서 마음속에 있던 고통을 모두 토해내며 신에게 의지하게 된다. 그녀는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너무나도 행복해 보이는 전도연의 연기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신애는 한발 더 나아가 자기의 아들을 죽인 유괴범을 용서하겠다고 선언하며 교도소로 향한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유괴범도 그 나름대로 교도소 안에서 교회를 다니게 된 것이다. 신애는 큰 맘먹고 꽃송이까지 들고 왔는데, 그는 자신이 이미 속죄했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용서해 주셨다고 말한다.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고. 자기도 신애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신 것 같다고. 신애는 충격을 받고 여기서부터 그녀의 광기 어린 탈선이 시작된다. 




이 영화는 반 기독교적 영화인가? 


한국 기독교 사회에 대한 불편함을 드러낸 영화일 수는 있겠다. 그러한 불편함에 나도 어느 정도 공감했다. 그러나 내 생각에 오히려 이창동 감독은 근본적인 의미에서 진정 종교인이다. 잘 들여다보면 영화의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유신론적이다. 밀양(Secret Sunshine)이라는 제목부터가 그렇다. 비밀스런 햇볕. 햇빛은 예전부터 영성 종교에서 절대자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영화는 푸른 하늘 구름 사이에서 햇살이 비치는 장면에서 시작하여, 마당에 햇볕이 내리쬐는 장면으로 끝난다. 또한 신애는 교회에 반감을 갖게 된 후에도 무신론으로 향하지 않는다. 그녀는 악행을 저지를 때마다 하늘을 보며 말한다. "보고 있어?" "난 너한테 절대 안져." 역설적으로 신에 대한 원망이 신의 존재에 대한 확신과 맥락을 같이 한다. 



영화는 무엇을 말하고자 한 걸까? 나는 신을 수단화하고 속죄와 구원의 도구로 삼는 인간의 행태를 꼬집은 영화라고 봤다. 신애와 유괴범은 둘 다 종교의 근본적인 속성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종교를 믿지 않았다. 유괴범은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속죄와 구원의 도구로 종교를 받아들였다. 그가 진정 구원을 얻었을까? 진정으로 속죄했고 구원받을 사람이라면 피해자 앞에서 그렇게 웃으며 마음의 평안을 얻었다고 말할까. 


신애도 신을 수단화 한 것은 마찬가지다. 영화 초반부터 신애가 고통에 대처하는 방식은 상처를 직시하기보다는 상처를 덮어두고 자신만의 환상을 만드는 것이다. 남편을 잃었을 때는 죽은 남편 고향인 밀양에 내려와서 남편을 그리워하며 묵묵히 아들을 키우는 미망인으로 환상을 설계했다.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은 부정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아들마저 죽자 환상은 산산조각 나버렸다. 더 이상 스스로의 힘으로는 환상을 만들 수 없었다. 그래서 종교를 받아들였다. 다시 환상은 만들어졌다. 신애는 교도소까지 가서 유괴범을 용서하여 그 환상을 완성하려고 했다. 그런데 신에게 그 기회를 빼앗기자 화가 난 것이다. 애초부터 종교를 믿은 것도, 유괴범을 용서하려고 했던 것도 그 이면엔 자기만족이 숨어 있었다. 스스로의 눈을 가리기 위한 퍼포먼스였다.



<밀양>은 자기 위안을 위한 수단으로 종교를 받아들일 때, 신이 구원의 수단으로 전락할 때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보여준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종교를 면죄부로 여기며 자신이 저지른 죄를 너무도 쉽고 간단하게 속죄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저 끔찍한 현실을 외면하고 싶어서 종교라는 안대를 착용하는 건 아닌지. 이창동 감독은 종교의 근본적인 물음으로 돌아가서 진지하게 생각해보라고 말한다. 신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우리는 신의 존재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영화 속 주인공처럼, 우리 삶에도 언제든 극한의 시련이 닥쳐올 수 있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을 겪게 될 때 우리는 어디에 기대야 하는가?  


구원은 어디에 있는 걸까? 구원은 내세에 있는 걸까, 아니면 구원 같은 건 어디에도 없는 걸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신애는 미용실에 간다. 미용 연습생이 그 유괴범의 딸인 것을 알고 신애는 머리를 자르다 말고 뛰쳐나온다. 집 앞마당에서 혼자 머리를 마저 자르려는 신애. 그 앞에 종찬(송강호)은 묵묵히 거울을 들어준다. 생각해보면 송강호가 이렇게까지 자신의 존재감을 절제하는 영화도 없었다. 영화에서 종찬이라는 인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머리카락을 대신 잘라 줄 수는 없어도 거울 정도는 들어주는 것. 그게 구원 아닐까. 비록 종찬의 사랑은 다분히 기독교적(아가페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현세에서의 구원은 역시 '사람'에게 있다는 것 아닐까. 나는 이 결론이 제일 맘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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