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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Dec 13. 2017

불완전함의 낭만

책 『아날로그의 반격』

요즘 취미생활을 하면서 깨달은 점이 하나 있다. 무언가를 진정으로 좋아하면 우리는 아날로그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점에 가서 책을 구매한다. 영화 마니아들은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본다. 어떤 가수를, 그의 음악을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들은 앨범을 사서 모은다. 반대로 아날로그한 경험이 무언가를 좋아하게 만들기도 한다. 직접 서점에서 고른 책은 애정을 가지고 끝까지 읽는다. 극장에서 본 영화가 훨씬 기억에 남는다. 어쩌다 받은 앨범을 듣다가 그 가수의 팬이 된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넷플릭스나 왓챠플레이에서 영화를 마음껏 골라볼 수 있다. 유튜브나 멜론에서 스트리밍으로 음악을 원 없이 들을 수 있다. 이 편이 훨씬 편리하고 저렴하다. 하지만 드넓은 디지털 세계에서 공허함을 느껴본 적은 없는가? 수없이 많은 글, 음악, 사진, 영화가 내 앞에 있는데 정작 내 것은 하나도 없는 느낌이다. 


분명 아날로그는 불편하다. 하지만 나는 왠지 기꺼이 불편하고 싶다. 내가 좋아하고 애정을 갖는 것에 관한 일일수록. 왜 그런 걸까? 불편함을 감수하는 희생에 어떤 가치가 있다고 느껴서일까? 




데이비드 색스의 『아날로그의 반격』은 디지털이 아날로그에 완승을 거두고 세상을 지배하려고 하는 바로 그 시점에서 아날로그의 부활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디지털 기술에 반대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것은 아니라고 밝혀 둔다. 그는 음악, 사진, 게임, 책, 교육 등 여러 분야의 동향을 조사해 온 저널리스트다. 그가 내린 결론은 이거다. 조금씩,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아날로그의 반격은 시작되었다는 것.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

LP 시장은 1990년대 이후 꾸준히 매출이 감소하며 이대로 사라지는 듯했지만 최근에 극적으로 재성장 하기 시작했다. 사진 마니아들을 중심으로 아날로그 필름이 다시 인기를 끈다. 온라인 게임이 눈부신 발전을 이루고 있는 시점에 보드게임 카페가 늘어나고 있다. 이제 종이책은 사라질 거라는 예측과는 달리 전자책 시장은 성장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미국과 영국에서는 전자책 판매가 20% 가까이 줄었다. 오히려 서점들이 다시 문을 연다.


아날로그 감성이 최근 트렌드의 중심에 있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저자는 아날로그가 그저 일시적으로 유행하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아날로그는 트렌드가 아니라 미래다. 사람들은 절대 아날로그를 버릴 수 없다는 뜻이다. 어째서 그런가? 책에서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수많은 사례를 풀어놓는데, 그중 서점 이야기를 해보자.



전자상거래의 발전으로 서점의 미래는 암울해 보였다. 앞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책을 구매할 거라는 생각에 서점들이 하나둘씩 문을 닫았다. 그러나 최근에 전혀 다른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 개성 있는 독립 서점들이 많이 생겨났다. 서점의 매출이 다시 오르고 있다. 사람들이 서점을 찾는다. 


아마존으로 대표되는 온라인 서점은 말 그대로 무한한 양의 책을 보유하고 있다. 서점보다 저렴한 가격에 훨씬 넓은 선택의 폭. 그럼에도 왜 사람들이 서점을 찾는 것일까? 그 이유의 핵심은 제한성이다. 막상 무수히 많은 선택지가 주어지면 우리는 막막함과 무력함을 느낀다.


우리는 선택지가 무한하기를 바라지만 실제로 쇼핑을 하게 되면 선택지가 제한되기를 간절히 원한다. (69p)

 

아마존은 이러한 점을 고려해서 책 추천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빅데이터가 어느샌가 각자의 성향을 파악하여 좋아할 만한 책을 추천해준다. 그러나 이것도 마냥 달갑지는 않다. 사람들은 빅데이터의 힘에 감탄하지만 한편으로는 빅데이터에 지쳤다. 


나는 아마존은 사용하지 않지만 아마존과 유사한 시스템을 안다. 바로 빅데이터 기반 영화 추천 애플리케이션 '왓챠(Watcha)'다. 내가 본 영화들에 평점을 매기면 그 데이터를 바탕으로 내 취향인 영화를 추천해주는 앱이다. 모든 영화에 나의 예상 별점이 표시된다. 예상 별점이 높은 영화를 찾아서 보면 그런대로 볼만하다. 


나는 영화를 본 후에 소소하게나마 기록을 남겨두고 싶어서 왓챠를 사용한다. 그러나 어떨 때는 그 '예상 별점' 시스템이 좀 사라졌으면 좋겠다. 왓챠의 끝도 없는 영화 추천에 나는 은근히 지쳤다. 영화를 보기 전에 이미 나의 감상이 정해져 있는 듯한 기분도 싫다. 더군다나 빅데이터가 추천해 주는 대로 내 취향에 맞는(아마도 다 비슷비슷할) 영화들만 골라 본다면 그게 과연 좋은 걸까? 때로는 아무 생각 없이 영화관에 가서 그 시간에 상영하는 것들 중 제일 맘에 드는 영화를 보고싶다. 서점에 가는 사람들의 마음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서점에는 '핸드 셀링'이라는 문화가 있는데, 서점 직원이 직접 책을 추천해주는 판매 방식을 말한다. 아늑하고 친밀한 공간에서 직원이 고객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가 좋아할 만한 책을 소개해준다. 대형 서점보다는 요즘 뜨는 독립 서점들에서 돋보이는 문화다. 사실 사람보다는 알고리즘이 나를 더 정확하게 파악할 가능성이 크다. 점원은 기껏해야 자기 머릿속에 떠오르는 책들 중에서 추천해 주는 것이다. 그 책이 정말 내 취향일 거라는 보장도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바로 그 불완전성과 우연성을 사랑하는 것이다. 


아날로그는 모든 것이 제한적이고 불완전하다. 반대로 디지털은 끝이 없고 완벽하다. 사람들은 아날로그에 더 끌린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제한적이고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무한하고 완전무결한 디지털 세계 앞에서 우리는 자주 절망하고 때로는 짜증이 난다. 



사람들이 아날로그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디지털과 달리 아날로그한 경험에는 인간관계가 자리할 공간이 있다. SNS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지만 우리는 공허하다. 사람들은 다시 '진짜' 인간관계를 갈망한다. 


"우리 일의 핵심이 무엇인지 생각해봤어요. 그건 대인관계였습니다." (413p) 


아마존은 수학적 알고리즘으로 나를 계산하려 들지만 서점 직원은 나와 이야기를 하고 관계를 맺으려 한다. 그가 추천해준 책은 결과적으로 내 취향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그 책은 기억에 남을 것이다. 어쩌면 그 책을 소중하게 여기게 될 지도. 멜론이나 아이튠즈에는 없고 LP 가게에는 있는 것. 아이패드에는 없고 학교 교실에는 있는 것. 오버워치에는 없고 보드게임 카페에는 있는 것. 그건 바로 진실한 대인관계다. 인간관계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아날로그에는 의미가 깃들어 있다.




나는 아날로그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 책을 정말 열심히 읽었다. 어쩌면 나는 누군가가 아날로그의 시대가 올 거라고 말해주길 바랐던 건 아닐까. 데이비드 색스는 『아날로그의 반격』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들이 아날로그를 버릴 수 없다고 확신한다. 그래서인지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면 이에 대한 반론도 궁금해진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들이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아날로그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현세대의 인식적 한계가 아닐까? 저자는 아날로그가 진짜고 디지털은 가짜라고 했지만, 디지털이 계속 발전하여 언젠가는 진짜와 가짜가 뒤바뀌지 않을까? 아날로그의 반격은 기술 발전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과도기 같은 건 아닐까? 아날로그는 일부 분야에서 상징성을 지닌 사치품으로만 남지 않을까..? 지금의 나로서는 판단하기 어려운 질문들이다.



과연 아날로그의 시대는 올 수 있을까. 앞으로 지켜봐야 할 일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나에게 왜 아날로그를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이제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나는 왜 기꺼이 불편하고 싶은 것인가? 그건 그 불편함에 낭만이 있기 때문이다. 아날로그는 유한하고 불완전하며 우연적이어서 불편하지만, 그래서 인간적이다. 나는 그 인간성에 매력을 느낀다. 아날로그는 불완전해서 낭만적이다. 이것 하나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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