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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노성 Oct 16. 2015

시를 좋아하는 내 마음이 예전만 못함은...

인생을 너무 많이 알아버렸기 때문이리라.  about 윤동주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_1941.11.20



▲ 강원도 횡성에서 촬영한 별


얼마전 강원도에 독서여행을 떠났을때 일이다.

강원도는 서울과 많이 달랐다. 풍광도 공기도 사람도 참 많이 달랐다. 그 중에서 다름의 '갑'이 있다면 바로 밤하늘이었다.

생각해보니 너무 오랫동안 별을 잊고살았구나...


강원도 횡성에서 윤동주의 서시를 읽던 어느날 반가운 옛친구같은 별들과 조우했다.




고등학교때 시 안써본 사람이 어디 있으랴마는 윤동주의 시를 읽으면서 당시는 모두 시인이었다.


도종환의 고백체 시가 따라하기 쉬웠지만 인생의 체험이 부족했던 까까머리들에게는 역시 감수성을 자극하는 데 윤동주 만한 이가 드물었다. 원래 '무제'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으나 후에 서시로 불리우게 된 이 시는, 읽을때마다 '시란 이런 것'이라를 가르침을 준다. 


서태지의 난 알아요가 인간의 바이오리듬을 자극해서 성공한 음악이라는 썰을 언젠가 들은거 같다. 음악에 서태지가 있다면 시에는 단연 윤동주다.




이제는 시적 감성이란 말이 서투른 나이가 되었지만 윤동주 전집 덕분에 오랜만에 학창시절이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천재는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모짜르트는 베토벤이 있었고, 서태지는 듀스가 있었고, HOT는 젝스키스가 있었다.

활동시기는 다르지만, '시란 이런 것'이라는 측면에서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시인은 몇 명 더 있다. 그러나 한명은 친일작가라고 싫어해서 결국 한명으로 좁혀진다.


홀로서기로 유명한 서정윤 시인.

전혀 닮은 이름은 아니건만 남자이름인지 여자이름인지 헷깔린다는 공통점이 있다. 덕분에 시인으로 성공하려면 이런 중성적인 이름이 좋겠다는, 시인이 본질을 훼손하는 생각을 하게 했던 시절도 있었다.


홀로서기의 서정윤과 윤동주가 그리도 헷깔릴 만큼 사랑했건만 한 사람은 너무 길게 살아가고 한사람은 너무 일찍죽었으니...


서정윤이 몹쓸 짓을 했다고 해서 그의 시가 더 빛이 바래지 않았으면 한다. 윤동주가 옥사해서 그 시가 더 훌륭한 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문학작품이란 꼭 그사람의 삶과 관련지어 볼 일은 아닌가보다.



 


#윤동주의 서시를 멋드러지게 암송하시는 어른이 한 분 계셨다. 말씀마다 백범 김구선생과 도산 안창호선생님을 존경하셨더랬다. 까다로운 격과 친인척들 문에 그분 계실때도 만만치 않은 직장생활이었지만, 회사를 팔고 떠나신 지금 새로운 주인에게 적응하 고통을 주어서 더욱  원망스럽다. 그는 멀리서 홀로 잘먹고 잘살겠지...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울 몹쓸 짓을 말로 골백번 괴로워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참으로 시와  같지 않다. 하물며 생각과 행동의 불일치야 말해 무엇하랴.


요즘 한창 신형원의 '개똥벌레'에 빠져있는 딸에게 윤동주의 서시를 읽어주면 어떨까?

듣기 싫다고 면박이나 당하지나 않을까봐 망설여진다.   


여자를 몰랐을땐 시가 참 좋았는데 여자라는 존재를 알아가면 갈수록 시가 낮설어진다.

꽃이 그렇듯 말이다.


처음 여자에게 준 선물은 꽃이었다.

사귀면서 여자는 꽃보다 밥을 더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철들면서 여자는 시보다 돈을 더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서정윤시인처럼,

시를 좋아하는 내 마음이 예전만 못함은, 인생을 너무 많이 알아버렸기 때문이리라.


작가의 '투르게네프의 언덕'이라는 시를 보노라니

시인도 아이 앞에서 망설인 적이 있는 듯하다. 이런 공감대가 있기에 수십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문학은 오늘도 읽히고 또 읽힌다.  



- 투르게네프의 언덕


나는 고개길을 넘고 있었다……그때 세 소년 거지가 나를 지나쳤다.

첫째 아이는 잔등에 바구니를 둘러메고, 바구니 속에는 사이다병, 간즈매통, 쇳조각, 헌 양말짝 등 폐물이 가득하였다.

둘째 아이도 그러하였다.

세째 아이도 그러하였다.

텁수룩한 머리털, 시커먼 얼굴에 눈물고인 충혈된 눈, 색 잃어 푸르스름한 입술, 너덜너덜한 남루, 찢겨진 맨발,

아―얼마나 무서운 가난이 이 어린 소년들을 삼키었느냐!

나는 측은한 마음이 움직이었다.

나는 호주머니를 뒤지었다. 두툼한 지갑, 시계, 손수건……있을 것은 죄다 있었다.

그러나 무턱대고 이것들을 내줄 용기는 없었다. 손으로 만지작만지작 거릴 뿐이었다.

다정스레 이야기나 하리라 하고 “얘들아” 불러 보았다.

첫째 아이가 충혈된 눈으로 흘끔 돌아다 볼 뿐이었다.

둘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셋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너는 상관없다는 듯이 자기네끼리 소근소근 이야기하면서 고개로 넘어갔다.

언덕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짙어가는 황혼이 밀려들 뿐――


_193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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