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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노성 Oct 16. 2015

책 안읽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어제 너희들 만났을때 책 안읽는다고 너무 구박한거 같아 이렇게 편지쓴다

"이 책은 한 해 평균 독서량이 짐승만도 못한 독자라 할지라도 각종 고전에 대해 누구 앞에서건 아무 거리낌 없이 읽은 척을 할 수 있게 함으로써 원만한 대인관계를 형성시키는 데 총체적 목적이 있는 공리주의적 텍스트라 할 수 있으며, 일종의 인문학적 데자뷰 현상을 도모하는 학구적 심령 기사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 김용석의 '고전문학 읽은 척 매뉴얼'중에서





- 사랑하는 승모에게


어제 너희들 만났을때 책 안읽는다고 너무 구박한거 같아 이렇게 편지를 쓴다.

20년전에는 그렇게까지 무식하지 않았던거 같은데 어제는 솔찍히 좀 실망했다. 소위 엘리트라는 '세무사' 녀석이 대화내용이 그게 뭐냐. 여중생같이... 한편으로는 이제 우리도 고급스러운 언어를 구사해야할 사회적인 지위와 체면을 가져버린 기성세대라는 서글픔도 밀려온다.  


지난번 카톡으로 김수영의 시 '강가에서'를 보냈을 때, 한 편 더 보내달라는 너의 답변에 고마웠다. 그렇게 나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을 줄은 차마 몰랐다.


하지만 내가 준 카톡을 그대로 베껴서 네가 자주가는 카페에 잘난척 하는 용도로 썼다는 말에 사실 실망했다. 얼마나 쏘스가 없었으면 친구가 위로하려고 보낸 시를 SNS생활의 떡밥으로 사용하냐.


이 사람아 책 좀 읽어라.  





몇년전에 읽어보라며 건네준 더글라스 케네디의 '빅픽처'를 받아들고 네가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이 나는구나. 눈물을 글썽이며 내 손을 꼬옥 붙잡고 이렇게 말했지 .


'솔직히 창피하지만 친구니까 말할께... 안읽어 버릇해서 그런가, 열페이지도 못읽겠다... 면목이없다, 마음대로대왕"   






 

도서관에서 너를 위한 책을 발견했다. 제목이 '고전문학 읽은 척 매뉴얼'이란다.

죄와 벌, 데미안, 이방인...... 어떠냐? 제목만 들어도 심장이 쪼그라들지? 읽지도 않았는데 책 내용에 대해 물어보면 어쩌나 싶어 두려움이 앞서고, 읽지 않았다고 실토하는 순간 너에게 쏟아질 냉소적인 시선을 견딜 재간이 없겠지. 딴지일보 김용석 편집장이 고전문학 작품을 소개하는 이 책, 참 재밌다.


읽으면서 개그콘서트 보듯이 미친듯이 웃었다.   





별로 읽고 싶지 않지만, 읽지 않았다고 얕잡아보는 카페 회원

들이나 동호회 사람들에게 잘난척하고 싶다고 했지?


책에 이렇게 쓰여있다.

"누군가에게 잘 알지 못하는 인문 고전 얘기로 불의의 공격을 받았을 때 자신의 가녀린 영혼을 보호하기 위한 호신용 서적이다." 라고...


우리가 중 고등학교 때 고전문학 한두 권 읽긴 했잖냐... 공부를 못했던 놈들도 아니고 나름 대학물도 먹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과연 그 시절 책 내용을 우리가 뭐 제대로 이해하긴 했냐? 대부분 ‘고전문학’ 하면 좋은 책이긴 한데 왠지 어렵고 진부하다는 생각부터 떠올리지. 

난해한 번역체 문체 때문에 재미를 미처 느끼기도 전에 책을 집어던지거나, 줄거리 파악하기에 급급해 행간 속 숨은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마련이다. 어쩌다 읽어봐야지 싶다가도 묵직한 두께 때문에 책장을 펼치기도 전에 지레 포기하는거지. 요즘 어른들중에 이말에 공감하는 사람 많으리라 본다.


하지만 생각해봐라. 고전문학이 재미없고 난해한 책이라면 어떻게 그 오랜 시간 동안 모든 사람들이 즐겨 읽을 수 있겠니...





"생업에 지친 나머지 읽고 싶어도 책 읽을 기력과 의욕을 상실한 독자들에게,

설령 의욕이 있다손 치더라도 직장 내 오랜 눈칫밥 습관으로 인해 한곳에 1분 이상 눈동자를 모으기 힘든 독자들에게, 그리고 어디 가서 모르는 책 이야기만 나오면 자아에 치명상을 입는 가녀린 영혼을 소유한 독자들에게 이 책이 조그마한 위안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라며, 저자 김용석은 "고전은 재미있다"라고 강조한다.

 



 

이 책의 최고의 미덕은 ‘시간이 없어 고전문학을 읽지 못하는’20대때 듣던 팝송 가사나 우려먹는 교양이 바닥 난 우리 어른들에게는 최적이 교과서인 셈이지. 그나마 너는 영어라도 잘했으니 팝송 가사지만, 책 한권 안읽는 정빈이나 범성이는 가요가사를 인용하는게 고작 아니냐.

 


 



하지만 승모야, 이 책의 또다른 감동은 따로있단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에게 조차 대단히 탁월한 분석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이 책에 실린 책목록을 한번 보여줄께. 볼드표시를 해둔 제목은 내가 읽은 책이다.


 PART 1. 삶의 의욕을 상실했을 때

- 죄와 벌

-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에덴의 동쪽           

-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PART 2. 1분 이상 한곳에 눈동자를 모으기 힘들 때

- 농담          

- 1984          

- 호밀밭의 파수꾼          

- 채털리 부인의 연인                       


 PART 3. 자아에 치명상을 입었을 때

- 데미안          

- 이방인          

- 위대한 개츠비          

- 그리스인 조르바          

- 목로주점                       


이 책을 읽고나서 나도 책을 얼마나 허술하게 읽어왔는지 반성하게 됐다. 너한테 책 안읽는다고 구박할 자격이 없더라.  

딴지일보 편집장 김용석이라는 사람, 독서 내공이 대단하더구나. 어려운말 하나도 없이 재밌고 적절한 비유로 머릿속에 쏙쏙 들어온다.


재밌는 문장을 뽑아볼께 한번 들어봐라.


"'위대한 개츠비''이수일과 심순애'

참고로 '이수일과 심순애'는 일본의 '금색야차''장한몽'20세기 초 우리나라에도 '위대한 개츠비'에 견줄만한 작품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식의 괜한 애국심 마케팅적 읽은 척을 구사할 경우, 본의 아니게 친일파의 후손으로 낙인찍힐 수 있으므로 주의를 요한다.

그밖에 '위대한 개츠비'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읽은 척함에 있어 매우 유용한 자료가 될 수 있다. 단순히 하루키가 '위대한 개츠비'를 몹시 좋아한다더라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체나 전반적인 작품 분위기,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상실감을 주제로 하는 것 등 '상실의 시대'는 '위대한 개츠비'를 오마주한 작품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도 부모잖냐. 

언젠가 회사 선배한테 아이들 공부시키는 노하우를 물은 적이 있다.

선배는 그저 '부모가 잘하면 된다'고 그러시더라. 아이들은 부모의 등을 보고 배운다면서 말이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는 아이들을 보면, 나중에 커서 이런 책을 읽을 때 무식하다는 소리듣지 말아야지 싶다. 아이들만 책 읽으라고 잔소리할게 아니라 부모도 함께 책을 가까이 하는 습관을 길러야겠어.

 

다음에 만날때는 이 책을 다 읽고와라. 더 교양있는 이야기를 나눠보자. 10년동안 한 권 읽었다는 정빈이랑, 드라마왕국 범성이한테도 전해줘라. 그리고 승모야 너네 집사람한테 게임 좀 그만 하라고 해라. 우리 애들이 배울라.




이만 줄인다.  


- 너의 마음대로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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