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름을 내게 주세요

정말 그럴 수 있다면 인간은 사랑을 결코 배반할 수 없으리라

by 김수정
“그간 쌓아온 자기 인생을 버리고 사랑하는 이의 이름으로 자기를 부르는 생을 살아가겠다는 결정은, 내가 곧 당신이 되겠다는 의미다. 무엇을 하건 당신을 염두에 두며 살겠다는 결심이다.”


그림을 사랑하다 보면 그림을 업으로 하게 되고, 그림을 업으로 하다 보면 그림에 욕심을 내게 된다. 수많은 그림 콜렉터들이 그렇게 수집을 시작한다. 뒷일은 생각도 안 하고 몇 달치 월급어치 소품小品을 ‘지르고’ 다음엔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적금을 깨서 판화를 구입한다. 하나 둘 하나 둘 모으다 갤러리를 여는 사람도 있다. 그림으로 시작해 그림으로 지지부진 사는 내 사랑만큼은 그 누구에도 지지 않지만, 그간 한 번도 나는 실물 그림에 욕심을 낸 적이 없다. 외장하드에 저장한 사진이나 잘 인쇄한 화집을 보는 데 만족했다. 당연히 원화原畫는 내가 손에 넣을 수 없는 존재였고, 노트며 우산이며 핸드폰 커버로 나온 명화 굿즈만 있으면 만족한다고 믿고 살았다. 잘 나온 인쇄물에 내 상상력을 더하면 충분했다. 아주아주 오랫동안, 나는 그런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


정신없이 일하다 간신히 숨 돌린 날, 인터넷뉴스창을 점령한 김환기의 그림 한 점을 보고 깜짝 놀랐다. 2017년 9월 19일(火) 오후 4시로 예정된 145회 서울옥션 미술품경매에 나온 특별한 그림. 이전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색깔이었다. 내가 미처 몰랐던 나의 욕망이 화산처럼 폭발했다. 줄줄 흘러내려 내 세계를 가득 채웠다. 뜨거워서 못 견딜 것 같았다. 깊은 바닷속에 스민 빛 같은 청록색 점화. 가까이 다가가면 어떤 붓질이 보일까. 어떤 번짐이 드러날까. 저 안쪽에 또 다른 색채가 있을까. 내가 가진 것이 있다면 모두 팔아 저 그림을 갖고 싶었다. 서울옥션에서 예상한 가격은 16억에서 24억 정도라 했다. 정말이지, 내 몸값이 20억이 된다는 보장만 있다면 내 몸도 영혼도 다 내다 팔았을지 모른다. 내 욕망은 그렇게나 청록靑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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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 「무제」, 면천에 유채, 86.5×60.7cm, 1969~1973, 개인 소장 / 파리에서의 김환기와 김향안,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 1913~1974가 1969년에서∼1973년까지 그린 「무제」는 그의 시그니처 컬러인 청남색이 아니라 청록색을 주조로 사용한 전면 점화로 그 색채의 청명함이 눈을 시원하게 한다. 환기의 아내 김향안金鄕岸, 본명 변동림卞東琳, 1916~2004은 그녀의 에세이집 『월하의 마음』에서 1978년 10월 18일, 이 그림을 전시한 프랑스 파리 국제아트페어(FIAC)에서의 이야기를 밝혔다.


“오후 2시. 약속한 시간에 작품들이 A·5회장에 반입되어 오다. 작은 공간에 작품 7점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걸 건가에 모두가 골몰하다. 김창렬, 정상화들이 진열을 돕다. 진열을 끝내고 오래오래 바라보다. 상파울루 때와는 또 다른 감회가 서리다. 냉정하게 비판해보다.”

_김향안, 『월하의 마음』, 환기미술관, 2005


환기는 4년 전 디스크 수술 후유중으로 깨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등졌다. 사후 화가의 아내는 남편의 그림을 붙들고 살았다. “너는 정말 죽은 것일까? 사람 하나가 사라졌을 뿐인데, 우주가 텅 빈 것 같았다.” 미국 뉴욕 소재 포인텍스터 갤러리와 함께 이번 아트페어를 준비했다. 그의 가장 훌륭한 그림을 내놓아야 했다. 남편의 걸작들을 고르고 골라 전시장에 걸었지만, 아내의 마음은 흡족하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가장 빛나야 할 남편이 없었기 때문이다. 화면에 피를 쏟듯이 한 점 한 점을 쏟아낸 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린다. 뜨거운 가슴과 냉정한 머리로 달려간 그녀는 그림 한 장의 뒷면에 재빨리 글씨를 써넣는다. ‘Not for Sale(이 작품은 팔지 않습니다)’ 반듯이 돌려놓은 그림은 청록이 선연했다. 생명력 넘치는 눈 시린 초록이 시선을 끌었다. 세계의 미술인들은 눈을 떼지 못했지만 누구도 그림을 살 수 없었다. ‘김환기, 가슴 시리도록 애틋한 내 남편이 사망 직전까지 무려 4년간 진액을 쏟듯이 그린 그림이다.’ 아내는 이를 수이 누구의 손에 넘길 수 없었다. 남편의 손길을, 그의 심정을, 그의 고뇌를 조금이라도 오래 붙들고 싶었다. 향안은 그렇게 이 그림을 간절히 품었다.


「무제」, 김환기의 그림은 15억원에 낙찰되었다. 예상했던 금액보다 아주 헐한 숫자라 조금 당황했다. 김환기 그림 중에 65억에 낙찰된 작품도 있으니 이 희귀템은 30억은 충분히 넘으리라 믿었는데. (2018년 5월, 김환기의 붉은 점화 「3-Ⅱ-72 #220」는 85억 2996만원에 낙찰되어 기록을 경신했다.) 만약 내게 15억원이 있었다면, 만약 내가 갤러리를 운영할 만한 부유한 집의 딸이었다면… 내가 평생 벌어도 못 벌 금액이지만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만큼 청록의 빛은 선연하고 깊고, 풍부하고 아름다웠다. 놀라운 환기의 우주를 불러일으켰다.


김환기의 품위 있는 점화를 사랑한다. 화가는 미국 생활 중인 1965년, 쉰두 살의 나이에 이전의 구상화 그림을 일단락한다. 이미 그는 세계 미술계에서 인정받는 화가였다. 새, 백자, 산 등 한국적인 주제를 선택해 중첩된 붓질로 미묘한 색채의 깊이를 냈으며, 신비로운 푸른 빛을 표현했다. 주조색인 파랑과 하양은 한국의 하늘·바다색과 백자에 투영된 한국의 순결한 정신을 상징했다. 동양의 서정미를 드러내는 김환기의 그림은 이미 정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성공한 50대의 작가다. 굳이 새로운 화풍을 개척하지 않아도 안정적인 수입을 올리고 높은 사회적 지위를 유지할 수 있을 터였다.


환기는 고국에 두고 온 가족과 친구를 떠올리며 그리움의 점을 찍었다. 전통 서양화 재료인 캔버스천 대신 코튼천 위에 물감을 찍어 번짐 효과를 추구했다. 희미한 자욱은 별이 빛나듯 반짝였다. 화선지 위에 먹의 오채五彩가 번지듯 부드럽게 보는 이를 껴안았다. 이전의 구상성은 사라졌다. 완전 추상화가로서의 김환기가 탄생했다.


사실 나는 김환기보다 그의 동반자同伴者 김향안을 더욱 사랑한다. 내가 설마 결혼을 하게 된다면 환기와 향안처럼 살고 싶다. 미술의 역사에서 환기같은 미술의 거장은 가끔 등장한다. 그러나 향안같은 예술경영인은 우리 미술계에 전무후무하다. 남편의 예술을 온전히 이해하고 지원하며,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도록 알리고 싶어 못 견뎌하는 아내. 이런 사람은 2020년이 가까워오는 지금에도 영 찾을 수 없다. 진정한 부창부수夫唱婦隨다.


김향안의 본명은 변동림卞東琳, 한국 근현대 미술의 거장 구본웅具本雄의 나이 많은 이모로 풍부한 문화예술의 수혜를 받고 자라났다. 경기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자대학교 영문과에 진학해 문학을 공부했으며, 글쓰기에 재능을 보였다. 신여성 중의 신여성이었던 그녀를 흠모하는 문학청년들은 수도 없었고, 천재 시인 이상李箱, 본명 김해경, 1910~37역시 그 중 하나였다. 경영하던 다방도 폐업하고 함께 살던 기녀도 도망간 무능력에 스캔들 메이커, 나이도 많고 폐병도 있는 남자였지만 둘 사이에는 그림과 문학이 있었다. ‘李箱’이란 이름은 절친 화가 구본웅이 선물한 오얏나무 화구상자에서 따온 것일 정도다. 그는 이 예명으로 1931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자화상을 출품하기도 한다. 이상은 “우리 같이 죽을까, 어디 먼 데 갈까”라는 말로 넌지시 동림에게 청혼하고, 두 사람은 신방을 꾸려 ‘도스토예프스키의 집’이라 이름 붙였다. 그러나 단꿈은 잠시, 신혼 넉 달 만에 이상은 결핵을 고치겠다며 일본으로 떠나고, 곧 병이 악화되어 어이없이 사망한다. “멜론이 먹고 싶소.”라는 말이 유언이 되었다.


스물하나 어린 나이에 남편을 보낸 변동림은 꿋꿋하게 일어선다. 그런 그녀에게 다가온 인연이 키가 훌쩍 큰 무명화가 향안 김환기. 그는 전남 신안군의 작은 섬 안좌도의 부유한 도련님이었고, 당시 대부분의 남자들이 그랬듯, 사랑 없는 결혼으로 일찍 결혼해 (아들을 낳으려다) 딸 셋을 둔 남자였다. 환기는 훌륭한 인품을 지닌 인물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모든 재산을 물려받자 집안에 속한 소작인을 불러 빚 문서를 나눠주었다. 전처와 이혼하며 충분한 돈을 챙겨주었고, 그녀가 자유로이 재혼하라며 딸들을 자원해 맡았다. 딸들이 학교에서 퇴학당할지언정 창씨개명은 해주지 않았다. 그는 좁은 섬을 갑갑해하며 무단가출해 일본 유학을 갈 정도로 넓은 세상을 소망하며 문학과 예술에 목말라했다. 그런 환기가 동림을 알아보는 것은 필연이었다. 환기는 동림과 헤어진 직후 섬으로 돌아가 매일 편지를 썼다. 동림의 집에서는 난리가 났다. 아무리 재혼이어도 딸 셋을 둔 화가에게는 보낼 수 없다는 것이다. 머리채를 붙들리고 다리몽댕이를 분지른다고 한소리를 들은 동림은 미련 없이 집을 나와 환기에게로 간다. 그리고 자기 ‘성姓을 가는’, 그리고 ‘이름도 가는’ 제안을 한다. 김환기의 이름을 자기 것으로 하겠다는 각오다.


“내게 향안(김환기의 첫 아호)이라는 이름을 줘요. 그러면 변동림이 아니라 김향안이 되어 평생 환기 씨를 위해 살게요.”


“당신의 이름을 내게 주세요.”라니, 나는 이처럼 아름다운 프로포즈는 없다고 믿는다. 이름은 인간에게 절대적이다. 인간의 세상에서 입을 열고 언어를 말하고 누군가를 부르는 일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이름은 그 사람이 어디 놓여 있는지 사회적 심리적 위치를 결정한다. 그러니 그간 쌓아온 자기 인생을 버리고 사랑하는 이의 이름으로 자기를 부르는 생을 살아가겠다는 결정은, 내가 곧 당신이 되겠다는 의미다. 무엇을 하건 당신을 염두에 두며 살겠다는 결심이다.


향안 김환기는 수화 김환기와 김향안이 되었다. 두 사람의 보금자리는 수향산방樹鄕山房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나무와 대화하는(樹話) 남자는 시골 기슭(鄕岸) 같은 여자에 기대어 하루종일 따뜻했다. 185센티미터가 훌쩍 넘는 남자는 155센티미터가 될까말까한 여자에게 내내 어리광을 부렸다.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장난스럽게 웃고 떠들며 하루를 보냈다. 남편은 아내에게 자기 그림이 어떠한지 물었다. 여자는 당장 미술사 강의를 들으러 나갔다. 화랑을 돌며 전시회를 보고 또 보았다. 두 사람에게 예술과 생활은 하나였다. 예술적 감수성, 그것이 이 부부의 끊임없는 화제였고 나아가 소통의 원천이었다.


“사랑이란 지성이다. 지성으로 이해하고 지성으로 교류하며 지성으로 믿어야 오래갈 수 있습니다. 함께 성장해야 함부로 시들지 않습니다. 나의 성장이 그의 성장을 이끌고 그의 성장이 또 나를 성장하게 하면서 서로에게 점점 잘 맞는 반쪽이 되어가는 일. 사랑이란 함께 성장하는 일입니다.”

_김향안, 『월하의 마음』, 환기미술관, 2005


향안은 약속대로 환기를 위해 살았다. 그러나 그건 남자를 위해 모조리 자신을 희생하는 여자의 모습이 아닌, 남자의 예술을 드러내기 위해 자기 자질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이었다. 향안의 미술 지식과 안목은 곧 전문가 수준으로 올라갔다. 화가의 그림을 비평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문학적 소양을 활용해 환기미술의 아름다움을 세간에 소개했다. 미술평론가로 자리매김했다. 특기인 언어 능력을 활용해 파리와 뉴욕의 예술세계에 접근했다. 화가의 매니저가 되었다. 나중에는 직접 환기미술관을 세웠다. 예술 CEO가 되었다.


1955년의 어느날 환기가 “도대체 내 예술이 어디(세계수준)에 위치해 있는 건지 알 수가 있어야지. 그걸 모르니까 너무 답답해”라고 탄식하자 향안은 즉답한다. “그럼 나가 봐요.” 향안은 다음날 프랑스 영사관으로 달려가 비자를 받고 먼저 떠난다. 조선 전통미를 재해석한 환기의 백자 그림이 파리에서 통할 거라 동림은 확신했다. 서울신문에 《파리 기행》을 연재해 여비에 보태기로 했다. 어학원에서 불어를 공부하고 파리 소르본느 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공부했다. 틈만 나면 화랑을 찾아다니며 눈에 띄는 도록이 있으면 환기에게로 보냈다. 1년 만에 파리에 김환기의 아틀리에를 준비하고 개인전을 열어줄 화랑을 찾아냈으며, 1년간 체재비를 지원할 후원자를 찾아낼 정도로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향안은 늘 그랬다. 환기미술의 가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향안이었기에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그는 그녀에게 사랑이었고, 이해였으며, 또한 긍지였다.


환기와 향안의 프랑스 생활은 꽃길이 아니었다. 고국에 있던 어머님이 돌아가셨고, 때때로 생활고에 시달렸다. 환기의 자존심은 항상 이득을 보지 못했다. 뉴욕에서는 파리만큼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그들의 우여곡절을 모두 서술할 수 없으나 극적인 사건들을 겪으며 환기미술은 유럽과 미국에서 인정받았고, 귀국 후 상파울루 비엔날레를 계기로 다시 도미. 1970년 김광섭의 시를 제목으로 한 점묘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가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 대상을 수상하면서 대한민국 미술계에 화려하게 귀환한다. 환기는 멀리 두고 온 그리움을 조심스레 꺼내어 한 점 한 점 찍었다. 점은 별처럼 빛났다. 화폭은 곧이어 우주로 확장한다. 사망하기까지 4년간은 화가로서 생의 정점이었다.


아내는 남편보다 30년을 더 살았다. 아내는 남편의 예술론을 끊임없이 정리해 발표했으며, 세상에 돌아다니는 작품안내의 오류를 찾아내 수정했다. 남편의 대형 그림에 걸맞는 높은 천장의 미술관을 부암동에 건립했을 뿐 아니라 작품을 정리하고 도록과 책을 펴냈다. 그녀 자신도 서양화가로 데뷔했다. 일반 사회에 예술의식을 높이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향안의 인생은 ‘남편의 예술에게로’ 일관성이 있었다. 이 부부는 신화를 썼다. 예술가 개념뿐 아니라 긍정적인 남녀관계 모델이 없는 이 나라에 놀라운 예술가 파트너십을 창조했다는 데 그렇다. 이 파트너십을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예술적 감수성을 기반으로 한 끝없는 대화와 소통이었다고 나는 믿는다.


“사랑은 지성이다.” “함께 성장해야 함부로 시들지 않는다.”는 김향안 여사의 말이 내내 잊히지 않는다. 대개 사람들은 자기보다 총명한 배우자를 원치 않는다. ‘파트너’가 아니라 자기가 우위에 설 수 있는 대상을 원한다. 사랑하는 사이에서도 갑을甲乙관계가 생긴다. 평등하게 소통하기보다 기싸움으로 상대를 누르기 원한다. 손바닥만한 가정 내에서도 권력을 휘두르려고 작정한다. 이내 한 사람은 시들어간다. 아니, 먼저 시들어간다. 또 다음 한 사람이 시들어간다. 두 사람 모두 노랗게 시들어 바닥에 꼬꾸라진다. 사랑은 죽어 사라진다. 사랑으로 지성에 물주지 않고, 힘으로 사랑을 옭아매고, 함께 성장하려 하지 않으니 당연한 일이다. 지성으로 사랑에 물주며 상대의 성장을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그야말로 이상理想이다. 그러나 이상은 다다르라고 있는 것이며, 누군가는 그 이상에 이미 가까이 다녀갔다. 세상에, 그 옛날 춘원 이광수가 의사 아내 허영숙의 동경 유학비용을 대느라 갖은 고생을 다 하며 사랑의 편지를 끝없이 보냈다니 믿을 수 있는가. 세상에 이런 이야기가 정말 존재하기는 한다. 세상 변두리에 있어 잘 안 보여서 그렇지, 세상 변두리에 숨어 사는 내 것이 꼭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극적으로 올 수도 있으니, 어쩌면. 그러니 정말 그런 기회가 온다면, 정말 그럴 수 있다면 인간은 사랑을 결코 배반할 수 없으리라.


혹시 신이 큰 은총을 내려 내게 기회를 준다면 언젠가는, 나도 그리 한번 말해보고 싶다. “당신의 이름을 내게 주세요.” 두고 보라 진실로 나는, 당신當身을 위해 향안 못지않게 살아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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