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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정 Oct 22. 2019

소인의 덕

군자의 도보다 소인의 덕이 더 중요하다

“인문학은 아름답고 총명하기만 한 환상이 아니다. 인문학은 사람을 아프게 하는, 날카로운 현실이다.”


어딜 가나 인문학 열풍이다. 대학에서는 ‘인문학의 위기’라는 외침이 높아지는 한편, 기업에서는 ‘인문학이 돈이 되는 시대’가 다가왔다고 강조한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인문학이 무엇인지 자세히 몰라도 인문학이 중요하다는 것은 확실히 안다. 서점에서는 인문학을 키워드로 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도서관에서는 학생과 일반인을 상대로 인문학 프로그램을 만들어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TV만 켜도 《비밀 독서단》, 《어쩌다 어른》,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 등 인문학이 주제인 프로그램들을 쉽게 볼 수 있고, 미남미녀 인문학 강사님과 교수님들이 열변을 토하는 강의를 볼 수 있다. 솔직히 이제는 좀 식상하기까지 하다. 


 강사들의 강의 중 서양 철학에서 플라톤과 니체가 인기라면 동양철학에서는 공자의 『논어』가 인기 있다. 이병철 삼성그룹 초대 회장이 중요하게 여겨 아들 이건희 회장에게 물려준 것으로 유명한 『논어』는 그런 인지도 때문인지 인문고전 시장에서 꾸준한 인기를 누린다. 인문고전 독서교육법으로 유명해진 모 작가 역시 논어를 강조하며 저소득층 고전 독서의 교재로 쓰기도 해 더 유명해졌다. 나 역시 거기 함께해 부족한 실력으로 『논어』 인문고전 독서교육을 해 보겠다고 서울역 인근 쪽방촌에서 일 년 가량 고군분투한 적이 있다. 


 공자는 『논어』에서 ‘군자君子’에 대한 내용을 강조한다. ‘군자君子’는 유교에 있어 ‘높은 지식과 인간다움의 덕을 함께 갖추었으며 마음가짐이 넓은 인물’을 의미한다. 반면 ‘소인小人’은 ‘세상에 매여 이익에 관심을 갖고 마음가짐이 좁은 인물’을 의미하여 군자와 대비를 이룬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군자와 같은 인물이 되기를 권하며, 군자가 지도자로서 세상을 다스려야 한다며 ‘군자의 도道’를 강조했다. 

 공자의 가르침은 지도자나 통치자에게 초점이 가 있으나, 나의 생각은 좀 다르다. 누구나 지도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몇 년 전 훌륭한 정치철학 선생님이 “소시민의 덕德은 군자의 덕德 만큼이나 실천하기 어려운 것 같다.”는 말을 전해준 적이 있다. 덕분에 이제 나는 ‘군자의 도’보다 ‘소인의 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휩싸여 하루하루 악착같이 살아가는 세속적인 인간이 품는 마음이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책을 펼쳐본다. “군자는 덕을 생각하고, 소인은 땅을 생각하며, 군자는 형벌을 생각하고 소인은 은혜를 생각한다(君子懷德 小人懷土 君子懷刑 小人懷恩)”라는 『논어』 이인편(里仁篇)에 시선이 멎는다. 이 문장은 “군자는 세상에 없는 인격과 미덕에 집중하고, 소인은 세상에 있는 땅의 이익을 찾으며, 군자는 법을 기준으로 삶을 주의하고, 소인은 타인의 호의를 얻기를 바란다”고 흔히 해석된다. 이 해석에 나는 반대한다. 오히려 “소인이야말로 함께 살아가야 할 땅의 일을 생각하고, 은혜 얻기를 바라는 낮은 마음을 가진 자다”라고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존 슬론의 그림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런 세속 인간의 성실함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여기 그의 그림을 몇 장 소개한다. 세속적 도시 풍경과 그 사이의 순간을 바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미국의 화가 존 프렌치 슬론John French Sloan, 1871~1951은 어린 시절부터 그림그리기를 좋아했다. 슬론의 평범한 삶은 1888년, 아버지의 발병으로 소년 가장이 되면서 달라진다. 슬론은 이제 아픈 아버지와 가족을 책임져야 했다. 가난했기에 학교도 끝마치지 못했지만 작은 잡화상에서 책을 팔면서 틈틈이 인쇄기술을 익혔던 것이 신의 한수였다. 슬론이 배운 간이 에칭 기술은 기회였다. 캘린더와 축하 카드를 만들게 되면서 벌이는 점점 나아졌다. 


 정식 미술교육을 받고 싶은 슬론의 소망은 결국 이루어졌다. 스프링 가든 인스티튜트를 거쳐 나중에는 펜실베이니아 미술학교에 진학하면서 화가는 체계적으로 성장하였다. 슬론은 회화뿐 아니라 각종 판화 기법을 활용한 삽화에도 능했다.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 Philadelphia Inquirer와 필라델피아 프레스 신문사The Philadelphia Press에서 화가는 시사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했다. 다른 시각 예술가처럼 일본판화에 관심을 갖기도 했으며, 신문에서도 전체 페이지 컬러 삽화를 그리게 되었다.  


 그의 경력을 감안했을 때, 화가의 시선이 늘 인간의 일상에 밀착했을 것은 예상할 만한 일이다. 슬론은 사회당에도 잠시 적을 두었으며 사회주의 잡지The The Masses에도 그림을 실었다. 노동에 애정을 가졌던 화가가 한때 사회주의사상에 심취했다는 것도 자연스럽다. 어떤 정치는 예술을 예술로 가만두지 않는다. 슬론은 프로파간다propaganda, 정치선전로써 미술이 이용되는 것에 분노했다. 화가는 곧 사회주의자들과 멀어져 자신만의 그림에 몰두했다. 이상화되지 않은 인간다운, 너무나 인간다운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슬론은 주로 노동하는 여성과 남성을 주인공으로 하였으며, 빽빽하고 소란한 도시 가운데 인간이 엮어내는 따뜻한 치열함을 담았다. 꾸밈없이 소박하고 사실적인 그림, 삶의 열망이 뚝뚝 떨어지는 도시 풍속화는 슬론만이 그릴 수 있는 것이었다. 슬론처럼 20세기 초 미국의 도시 생활 풍경을 그린 화가들을 ‘애시캔파派, The Ashcan School’라고 부른다. 슬론은 애시캔 파 외에도 8인회The Eight : William Glackens, Robert Henry, George Luks, Everett Shinn, George Bellows에 참여하며 미국 미술을 활장하는 데 적극적으로 임했다. 아트 스튜던트 리그Art Students League의 미술교육자로서도 열심을 다한 것은 물론이다. 슬론은 카리스마 있는 선생님으로 명성을 떨쳤다고 한다.     

 도시란 돈이 모이는 곳이고 그런 성격상 무엇보다 세속적이다. 화가는 1904년, 뉴욕으로 이주해 그리니치 빌리지에 머물러 살면서 풍요와 빈곤이 절묘하게 뒤섞인 도시를 날카롭게 관찰했다. 세속적인 삶에 매인 인간들의 인간성을 관찰해 화폭에 옮겼다. 슬론은 미국적 사실주의를 잘 드러낸 화가로 평가받는다. 아름답다기보다 격식 없이 편안한 인물의 모습은 각자의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머리를 감고 말리는 여성들의 흐트러진 모습과 햇빛에 일그러진 표정, 신발을 반쯤 벗거나 벗어던진 모습에서는 생동감과 긍정성이 느껴진다. 엄청난 빨래를 능숙하게 널며 빨래집게를 입에 문 주부의 모습에서는 노동이 손에 잘 익은 노련함이 있다. 빨래 바구니를 손에 쥔 채 황혼을 바라보는 여성의 뒷모습에서는 삶에 대한 경이와 일상에 대한 겸손이 풍겨난다. 이런 아름다움이야말로 삶에 휘감겨 살아가는 작디작은 인간의 덕德이 아니던가. 


 세상은 수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중 약간 명의 리더와 그를 따르는 수많은 팔로워들이 움직이며 삶과 시간을 움직인다. 인문학은 아름답고 총명하기만 한 환상이 아니다. 인문학은 사람을 아프게 하는, 날카로운 현실이다. 단순하게 보면 무엇이든 편안하고 매끈하다. 허나 인문에 눈을 뜨면 누구든 삶을 의심하게 된다. 생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인문학이다. 헤매고 또 헤매면서 그의 삶은 넓어지고 그의 머리는 높아지고 그의 눈빛은 깊어진다. 


 그러나 그 아무리 대단한 도道라 하더라도 모든 사람을 리더로 만들 수는 없다. 모두가 군자가 되는 이상적인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에 눈을 반짝이며 성숙한 마음을 열어 살아가는 작은 사람들이 늘어난다. 인문학은 ‘의미’를 찾아내는 힘을 기르는 학문이므로 그러하다. 


 어느 세계에나 몇 군자와 수많은 소인은 공존한다. 그러므로 군자의 도道보다 소인의 덕德이 더더욱 중요한 것이 아니려나. 아마도 나와 당신의 몫일 소인의 덕德을 가꾸고 사용하는 일만큼 훌륭한 일은 없다. 세상은 별수 없이 불완전한 법이고 그러기에 별처럼 가득한 ‘소인’은 더욱 애틋하니 아름다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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