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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정 Oct 22. 2019

비인간적인 하늘마저도 나를 연민하는 순간

감정의 사면초가 가운데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나는 무지개가 뜬 것을 알아차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이보다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무지개가 뜨는 순간을 지켜보는 사람이고 싶다.”


나의 첫 ‘삼중당 문고’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중학교 1학년 때 학교 앞 문방구에서 ‘제목에 꽂혀’ 골랐다. 그저 제목만 보고 위대한 철학자 니체의 책을 골랐으니 이놈의 인생은 시작부터 끝까지 쉽지 않은 팔자다. 얼마나 난해했을지는 안 봐도 동영상이다. 지금 읽어도 의미 모를 그 책을 나는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다. 이해할 수 없어도 읽어야 했다. ‘인간적인’이 두 번이나 들어 있는 책이기 때문이었다. 기억의 처음부터 나는 ‘인간적인’ 무언가를 탐구해 왔다. 이건 내가 타고난 본성에 포함된 취향이다. 내가 가장 힘들어하는 것도 사람이지만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도 사람이다. 가장 불완전한 것도 사람이지만 그렇기에 온전함을 추구하는 것도 사람이다. 세상 제일 미워도 끝내 가장 아름다운 것도 사람이다. 그래서 ‘비인간적인’ ‘인간적이지 않다’는 말에 나는 늘 상처받는다. 그야말로 아픈 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그래도 저 하늘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연민과 사랑이 분명 존재한다. 오랫동안 내가 잊고 있었고,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삭제된 그것이.” 체코의 국민 작가 보후밀 흐라발의 책, 『너무 시끄러운 고독』(문학동네, 2017)의 다섯 번째 장을 맺는 완벽한 문장이다. ‘비인간적인’ 하늘을 넘어서면 사랑과 연민이 가득한 공간이 있다는 의미이므로. 불완전함은, 사랑과 연민은 인간성의 근본일지도 모른다.  


 흔히 너무나 완벽하면 인간미가 없다고 한다. 약점이 없는 이는 누군가의 아픔에 공감할 수 없을 것 같아서인가. 오늘처럼 티끌 하나 없이 완벽한 창공은 너무 서러운데도, 흐라발의 문장 덕분에 비인간적인 하늘 넘어 존재하는 무언가에 위로받는다. 동시에 나는 눈 앞에 떠오른 파아란 그림 한 장을 어루만진다. 「무지개」라는 제목을 가진 니콜라이 두보브스코이의 그림을 나는 무척 사랑하는데, 감정의 사면초가 가운데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주어진 선물 같아서이다. 

니콜라이 두보프스코이(Nikolay Dubovskoy), 「무지개(Rainbow)」, 1892

 망망대해 위에 조각배 하나와 사람이 있다. 배는 텅 비었고 나이든 남자는 일어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구겨진 셔츠와 너덜너덜해진 주머니, 헐렁헐렁한 바지, 덥수룩한 수염을 한 그의 시선 끝에는 뭉게구름과 영롱한 무지개가 있다. 드넓은 바다와 거대한 하늘 아래에 사람과 배는 작고 초라하기 그지없다. 이 작은 사람은 하늘에 스민 무지개 색채에 압도될 것 같다. 작고 초라한 남자와 극명히 대조되는 거대하고 맑은 하늘빛이다. 그 안에 스민 화려한 색채의 빛이다. 거대함 앞에 선 작은 인간이 느끼는 아름다움, 숭고미崇高美란 이런 것이다.     


 니콜라이 두보브스코이Nikolay Dubovskoy, Николай Никанорович Дубовской, 1859~1918의 그림에서 눈에 띄는 것은 색이 가득한 대기다. 화가는 인생 후기에 프랑스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만, 이미 그의 작품에는 초기부터 빛이 가득했다. 이미 인상주의와 같은 결을 가진 작가였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화가의 그림에서 터너 같은 낭만주의 풍경화의 느낌을 먼저 읽는다. 두보브스코이의 그림은 아이작 레비탄Isaac Levitan의 그것과 함께 ‘분위기의 풍경Landscape of Mood’으로 불린다니 이 해석이 그리 억지는 아닐 것 같다. 이 풍경의 정조는 인간의 경험과 세계의 인상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자연의 위대함 앞에 선 인간은 거대한 아름다움의 신비에 한 발짝 다가서고, 영혼은 서서히 신비 안에 물들어간다. 


 두보브스코이는 원래 군사학교를 다니다가 18세가 되던 해 미술 아카데미로 진학하면서 과감히 진로를 전향한다. 이동파移動派의 창립 멤버였던 미하일 클로트Mikhail Clodt에게 배웠던 때문인지, 두보브스코이는 왕립 미술 아카데미 졸업생의 전형적인 진로를 따르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간다. 특히 두보브스코이가 흥미를 느꼈던 것은 풍경화였다. 스승이었던 클로트는 러시아 풍경화의 얼굴을 바꾸었다 할 정도의 풍경화 달인이었으니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이동파移動派, Peredvizhniki는 러시아 19세기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861년의 농노 해방 이슈를 배경으로 등장한 그들은 ‘방랑파’라고도 하며, 왕과 귀족 같은 지배계급만 그림을 향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1863년 이반 크람스코이, 바실리 페로프, 바실리 수리코프 등 러시아 왕립미술학교의 졸업생 14명은 유럽 미술만을 정통 미술로 인정하는 왕실의 문화정책에 반발하고, ‘더 이상 지배계급을 위해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라며 누구나 그림을 쉽게 만나고 그림을 직접 보아야 한다는 신념을 굳게 다졌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왕실과 귀족들의 초상화 위주였던 그림 주제가 풍경화나 풍속화 쪽으로 이동하였다. 화가들은 영하 40도가 넘는 추위에도 그림을 들고 시베리아 곳곳을 다녔다. 그림에는 빈곤 가운데 지지 않는 강인함이 가득했다. 


 1870년부터 1923년까지의 긴 기간, 약 48회 가량의 전시회가 열렸다. 그들이 머무는 곳에 그림은 전시되었고 가난한 농민이나 노예나 누구든지 입장료 없이 그림을 볼 수 있었다. ‘누구나 예술을 감상해야 한다. 현실을 타개할 힘을 예술에서 얻어야 한다. 러시아에 대한 애정을 함양해야 한다’는 이동파의 신념은 강력했다. 물론 주류 미술계는 이들을 외면했으므로 지원금이나 격려의 지지선언 같은 것은 기대할 수 없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상인 계급에서 그들의 후원자가 나왔다. 러시아의 메디치가家로 불리며 러시아 산업혁명의 주인공으로 불리는, 러시아 시립 오페라단의 창설자이며 볼쇼이의 감독인 사바 마몬토프Savva Mamontov, 1841~1918와 나중에 이동파의 그림으로 미술관까지 세우게 되는 파벨 트레챠코프Pavel Tretyakov, 1832~1898는 오랜 기간 신진 화가 그룹을 물질적으로 지원하였다.


 예술가에게는 반골 기질이 있다고 하는데 두보브스코이 역시 그러했던 것이 틀림없다. 자연스럽게 화가는 이동파 전시에 참여하였으며, 1886년에 정식 회원이 되었다. 끼리끼리 모인다고 화가는 이동파의 차기 리더 격인 니콜라이 야로센코Nikolai Yaroshenko와 일리야 레핀Ilya Repin과도 가까워졌다. 1898년, 야로센코의 사망 이후 이동파의 리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두보브스코이의 그림 「무지개」에는 시간에 대한 명시가 없다. 나는 이 그림이 무지개가 뜬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람을 그린 것이라기보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사람에게 서서히 나타난 무지개를 그린 것으로 생각하고 싶다. 


 목이 메고 가슴이 답답할 때, 마음이 사면초가에 처했을 때 사람들은 하늘을 바라본다. 뻥 뚫린 하늘을 바라보면 마음도 뻥 뚫릴 것 같아서이다. 높은 산을 오르면 하늘에 더 가까이 갈 것 같다. 드넓은 바다로 달려가면 즐겁다. 몸을 통해 마음이 펄럭거린다. “바람 좀 쐬고 와”라는 말이 그냥 나오지는 않았으리라. 사람은 파랗고 투명한 존재에게 마음을 기댄다. 


사람은 몸 이상의 존재라서 가슴을 문지르고 손을 허우적거리는 행동만으로 몸 밖의 존재를 움직이기도 한다. ‘체코 소설의 슬픈 왕’이었던 보후밀 흐라발도 비인간적인 하늘을 바라보고 숨을 쉬고자 했다. 허우적거리며 글을 토해놓음으로서 막힌 숨통을 열어보고자 했다. 물론 하늘이 아니라 바다를 바라보는 사람도 있다. 엔도 슈사쿠遠藤周作의 「침묵의 비沈黙の碑」문을 곱씹으면 가슴 가득한 슬픔이 파랑으로 쏟아진다. “인간이 이다지도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나 파랗습니다.(人間がこんなに哀しいのに主よ、海があまりにも碧いのです.)” 『침묵』의 작가 역시 슬픔의 사면초가에서 벗어나기 위해 넓고 푸른 곳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하늘은 침묵하는데도 하늘을 바라보면 뭔가 풀릴 것처럼, 하늘에 부탁하면 뭔가 뚝 떨어질 것처럼 하늘을 바라본다. 대개 하늘은 아무것도 내어놓지 않고 담담히 침묵하지만 가끔 환하게 웃으며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런 순간이 있다. 하늘밖에 올려다볼 수 없을 때 기대하지 않았던 위로가 펼쳐지는. 하늘에서 놀라운 선물이 뚝 떨어질 때가 있다. 생이 나를 연민하는 순간이다. 생이 나에 대한 애정을 증명하는 순간이다.     


나는 무지개가 뜬 것을 알아차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이보다는 하늘을 바라보다가 무지개가 뜨는 순간을 지켜보는 사람이고 싶다. 먹구름이 걷히고 무지개가 나타나는 순간순간을 온몸으로 경험하는 생을 살고 싶다. 아마 그 순간은 하늘을 자주 바라보는 사람에게 다가올 확률이 높을 것이다. 비록 막막해서 하늘을 바라본다고 해도.


 그러니 오늘도 하늘을 올려다볼 수밖에 없다. 담담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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