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수정 Oct 22. 2019

꿈을 미룰지라도

꿈에 대한 대가는 적으면 적을수록 좋다

“누구든 수학의 옷깃만 만져도 그 아름다움을 느낄 거야. 난 옷깃으로 충분했어. 좌절감을 감당할 수 없었거든.”



“언니, 저 취직 때문에 고민이에요.” 


이 진부한 문장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예체능 인생 동안 가장 많이 들어온 고민이다. 사람은 끼리끼리 모이는 법이라 글 쓰고 그림 그리고 악기 연주하는 이십 대 친구들이 내게는 늘 가깝다. “언니”라는 호칭과 함께 걸려오는 전화에는 대부분 진로에 대한 고민이 이어진다. 자신은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있는데, 취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 닥쳐오니 꿈에서 멀어지는 것 같다는 고민을 털어놓는다. 


 꿈을 이룰 수 있는 일을 하자니 취업의 길이 너무 좁아 미래가 불안하다고 하소연하고, 꿈에 가까운 일은 대가가 적고 쉴 시간이 적다고 속상해한다. 비교적 숨통이 트이고 안정적인 직장은 꿈에서 너무 먼 일뿐이라고 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현실이 괴롭고, 바로 그 분야에서 특출 나지 못한 재능이 원망스럽다고 한다. 


 아무리 조금 더 살았다고 하지만 이런 문제에는 감히 조언하면 안 된다. 꿈의 문제는 남녀관계만큼 답 없는 것이어서, 어떤 결론을 내리든 본인이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 어떤 결론을 내려도 아쉬울 것이고 어떤 결론을 내려도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 꿈만큼 ‘노답’인 것도 없다. 


 꿈은 놀랍도록 아름답지만 애매하고 교활하다. 사람의 혼을 쏙 빼놓고 영원히 헤매도록 한다. 애절하니 손에 잡히지도 않으면서 영영 떠나지도 않는다. 사람 사는 일을 살펴보면 꼭 재능과 성공은 같이 가는 것 같지 않다. 오히려 재능을 따라가다 보면 성공이 멀어지는 경우도 많다. 가장 꿈꾸는 것을 이루려면 내 재능보다 부수적인 능력이 더 필요하다. 그뿐인가, 내가 가장 꿈꾸는 것에 내 재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것도 이미 너무 많은 열정을 쏟고 난 이후에 말이다. 인생 참 얄궂다. 가장 원하는 것은 아무리 헤매도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다. 가장 마지막에 오는지는 아직 경험해보지 못해 모르겠다. 이 아름다운 헤맴은 테오도르 키텔센의 그림 같다.


 노르웨이의 자랑, 테오도르 키텔센Theodor Severin Kittelsen, 1857~1914은 동화 및 성경 일러스트레이션, ‘트롤’이라는 북구의 신화에 등장하는 괴물 그림, 자연친화적인 풍경화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작가다. 선명하다기보다 경계가 분명치 않은 형태감은 뽀얀 색감과 함께 신비감을 자랑하는데, 이 신비감은 보는 이의 미래까지 영원히 빨아들일 것 같은 매력을 선사한다. 바로 그 매력 때문에 이 아름다운 그림, 「요정 꿈(Fairy dream, 1909)」은 꿈을 좇는 사람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암시하는 것 같다. 


테오도르 키텔센(Theodor Severin Kittelsen), 「요정 꿈(Fairy dream)」 1909, 미상, 미상


 남자가 반투명한 요정에게 홀려 멍하니 어딘가로 가고 있다. 요정은 손끝에서 빛 가루를 그물처럼 뿌리며 남자를 휘감고 있다. 남자는 이미 빛에 휘감겨 시야를 잃었고, 그물 같은 빛은 거미줄 치듯이 남자를 덮치고, 양 다리까지 휘감아 남자의 걸음을 부자유하게 한다. 남자는 초점 없는 눈빛으로 입을 반쯤 벌린 채 요정만을 바라보고 있다. 쪼글쪼글 구겨진 양복과 반쯤 접힌 상의 주머니는 그가 오래 정신 줄을 놓은 채 헤매왔음을 알려 준다. 아무리 오랜 시간 헤매더라도 붙잡을 수만 있다면 상관없다. 금빛 머리를 휘날리는 요정은 더없이 신비롭고 비현실적이다. 손에 붙잡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위험하다. 붙잡을 수는 있는 것일까. 그래서, 그 위험함을 실감하고 있어서, 꿈에 대한 고민에는 더욱 답을 하지 못한다. 꿈에 거절당한 인간의 마음은 무너져 내린다. 꿈의 옷자락에 닿아버린 인간은 시간도 모르고 고생도 모른다. 꿈을 따라 돌고 돌다가 어느덧 나이가 들어버린다. 이제는 도망치고 싶지만 역으로 꿈은 자기 것이 된 인간을 쉽사리 놓아주지 않는다. 몸과 마음의 대가를 치른 후에야 그에게서 풀려날 수 있지만, 이미 폭삭 늙어버린 후다. 


 영화 「매기스 플랜」에는 인공수정을 원하는 주인공 매기에게 정자를 제공하는 남자, ‘가이’가 등장한다. 가이는 누구라도 대단한 수학자가 될 거라 생각할 만큼 열정 있는 수학도였다. 그러나 그가 선택한 것은 학자의 상아탑이 아닌 피클 제조업자의 현실이었다. 매기는 넌지시 가이에게 묻는다. 왜 꿈을 따라가지 않았냐고. 


“왜 수학자가 안 됐어?” 

“수학이 아름다워서 좋아한 것뿐이야. 수학자가 될 생각은 없었어.”


“그래? 수학이 아름다워?” 

“누구든 수학의 옷깃만 만져도 그 아름다움을 느낄 거야. 난 옷깃으로 충분했어. 좌절감을 감당할 수 없었거든.” 


“무슨 뜻이야?” 

“전체를 볼 방법이 없으니까 늘 전체의 일부만 어렴풋이 볼 뿐이지. 평생 진리의 조각만 찾아다니는 삶이잖아.”


 가이는 대답한다, 자신은 좌절감을 감당할 수 없었다고. 가슴이 찡해 왔다. “난 옷깃으로 충분했어. 좌절감을 감당할 수 없었거든” 이것이야말로 꿈의 옷자락을 잡으려 허우적거려본 사람의, 절망하고 좌절한 사람의 정직한 고백이었다. 


 사람들은 각자의 이유로 꿈을 놓거나 놓지 못한다. 꿈을 빨리 놓는 사람도 있고, 늦게 놓는 사람도 있고, 끝까지 놓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꿈에 미련이 없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때때로 깊은 밤이 되면 한숨과 함께 꿈에 헤매던 시기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건 교활한 꿈을 놓아준 내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제는 남들이 경박하다고 비난해도, 지나치게 현실적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이제 내게는 내 마음, 내 생존, 내 건강이 가장 중요하다. 꿈이나 이상 같은 것, 큰 뜻 같은 것이 이제 내게는 크게 필요 없다. 그래서 조금 더 살아본 나는 미안한 생각을 해 본다. 


 내가 아끼는 동생과 후배들이, 꿈을 품고 있기에 그들을 혹사시키는 직장보다는, 꿈과는 좀 거리가 있어도 숨통이 트이고 몸이 덜 힘든 직장에 취업하기를 바란다. 그들의 간절한 소망과 다른, 그리 긍정적인 생각이 아님에도 그렇다. 젊을 때 소리 없이 망가진 건강과 황폐한 마음은 곧 꿈마저 미워하게 만든다. 그러니 「매기스 플랜」의 가이는 위너다. 꿈만큼은 미워하지 않을 수 있었으니.


 나는 그들이 일상을 순간순간 극복하기보다 일상을 순간순간 살기를 바란다. ‘고난이 축복이다’라는 말을 나는 미워한다. 고난이 축복이라는 말은 고난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말이다. 고난에 짓밟혀 피 흘리는 사람이 분명 여럿 존재하는데, 어떻게 고난이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삶은 의미부여’라고 강조하는 것도 싫다. 의미 있는 삶을 살아간다고 통증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므로. 괴로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의미부여할 힘도 여력도 없다. 어려움에 질려 에너지를 모두 소모한 사람, 시련에서 주저앉은 사람은 말을 잃는다. 꿈에서 돌아선 사람은 그런 말을 남기지 않는다. 꿈에 대한 대가는 적으면 적을수록 좋은 것이다. 만약 대가를 주지 않을 수 있다면 더 좋은 것이다. 설령 꿈을 미룰지라도 그것이 더 좋은 것이다. 꿈을 이루지 않을지라도 ‘그가 온전하다면’ 충분히 아름답다. 

매거진의 이전글 비인간적인 하늘마저도 나를 연민하는 순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