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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정 Oct 22. 2019

잠시잠깐 주저앉을 때에도 곁에 있어줘

내가 조금 더 잘 사는 걸로 보답하고 싶은 바로 그 사람 

“소리 없이 나를 사랑하는 사람과 등을 맞대고 싶다. 이 초라한 동굴에서 어서 나와야 한다고 윽박지르는 사람이 아니라 기꺼이 내 곁에서 조용히 있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두툼한 책을 읽다가 멍하니 딴 생각을 하던 오후의 카페, 옆 테이블에 앉아 공부하던 여자가 휴대폰을 집어 들어 뭔가를 확인하더니 ‘폴짝’ 뛰어올랐다. 깜짝 놀라 쳐다본 내 얼굴은 아랑곳하지 않고 여자는 주섬주섬 책을 챙기며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나 합격했어요. 나 취업했다고요!”


 아아, 취업 준비생이었구나. 원하는 곳에서 합격 통보가 왔나 보다. 덩달아 입꼬리가 올라갔다. 얼마나 오랜 시간 마음고생을 했을까. 기분이 마구 좋아졌다. 나에게도 그런 시기가 있었다. 다니던 직장 형편이 어려워져서 몇 번이고 그만두어야만 했을 때가 있었고, 다시 어떻게 일을 구해야 하나 갑갑했을 때도 많았다. 필기시험을 영 못 봐서 실망했을 때는 수도 없고, 언제 몇 시에 면접을 보러 오라는 문자에 뛸 듯이 기뻐하기도 했다. 면접을 완전히 망치고 나왔을 때는 ‘이번에는 분명히 될 것’이라며 기대에 부푼 가족에게 말도 못하고 오래 괴로웠다. 여차여차 간신히 직장을 잡을 때까지 피가 마르는 날들이 오래였다. 몇 번을 생각해봐도 직장을 구할 때가 가장 괴로운 시기다. 취업에는 무엇보다 운이 중요하다. 성적이 아무리 높아도 자기소개서를 아무리 잘 써도 취업 당락에는 절대적이지 않다. 중요한 건 타이밍이다. 내가 지원한 직장에 나 같은 사람이 필요한 순간이 내 지원서와 맞아떨어져야 한다. 몇 번이고 주저앉을 때마다 “내 인생은 왜 이렇게 가혹한가.” “지독히도 운도 안 따라준다.”라며 괴로워했고, 자존감은 바닥으로 더 더 더 떨어졌다. 주저앉아도 빨리 일어서야 했다는 게 또한 고달팠다. 마음을 다 추스르지도 못한 채 다시 이력서를 쓰고 자기소개서를 궁리해야 한다는 것이 힘에 달렸다. 다시는, 꿈에서라도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간이다. 옛일이 생각나 잠시 소스라치던 나에게 여자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언제나 곁에 있어줘서 고마워요.”


 누구에게나 ‘어두운 터널’ 안에서, 혹은 그늘도 없는 땡볕 아래서 끝없이 헤매야 하는 시절이 있다. 요즘처럼 살기 팍팍한 시기에는 더욱 그렇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가정의 어려움이나 경제 문제, 취업의 문제로 길고 지루한 시기를 겪는다. 그러다가 당연히 몇 번은 주저앉는다. 방금 취업 통보를 받은 그녀는 얼마나 여러 번 주저앉아야 했을까. 취업 문제가 힘겨운 것은 생계 문제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자기 자리가 확실하게 있다는 것, 자기 힘으로 돈을 벌어 생활을 유지하는 자신감은 자존의 근원이다. 일하고 싶은데 써주는 곳이 없으면 세상이 나를 원하지 않는 것 같다. 뼈저리게 외롭고 공포스러운 그 때에 누군가가 기꺼이 곁에 머물러 준다는 건 절대적 위로다, 누군가는 끝까지 곁에 있어줄 것이라는 확신으로 지옥 같은 시간을 간신히 견딜 수 있다. 


 이 고단함을 익히 아는 이에게, 혹은 일상의 팍팍함 가운데 외로워서 더 슬픈 이에게 윌리엄 브라이너William Brymner의 그림 한 장을 소개하고 싶다. 땡볕에서 주저앉아 기운을 잃은 소녀 곁에 누가 머물러 있는지. 이 소박한 그림의 위로가 잔잔히 전해지기를 바란다.     



 땡볕 아래서 어린 소녀 하나가 주저앉아 있다. 밀짚모자를 쓰고 햇볕을 피하고 있다지만 소녀의 얼굴은 발그레 열이 올랐다. 하늘에서 쏟아지고 땅에서 올라오는 열기를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이 길을 어서 통과해야 할 텐데 왜 소녀는 덩그러니 앉아 있는가, 멍하니 주저앉아 있는 소녀의 눈빛은 지친 듯 텅 비었다. 하얀 셔츠와 분홍 원피스는 단정하지만 더욱 갑갑하다. 얼마나 더 가야 할지 모르지만 힘을 잃은 소녀는 일어날 의지를 잃은 듯 보인다. 아무래도 빨리 일어서 걸어가야 하는데 보아하니 쉽지 않다. 자연은 광대하고 강물과 배는 유유하다. 소녀와 풍경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순수하고 풍부한 색채로 가득하다. 소녀 곁에는 강아지 한 마리가 있다. 작지만 위풍당당하게 소녀를 지키고 있다. 맥없이 지친 소녀와 든든한 강아지가 인상적인 그림의 제목은 「개를 데리고 있는 소녀」다.  

 윌리엄 브라이너William Brymner, 1855~1925는 빛과 정서가 가득한 자연주의 풍경화가로, 주로 캐나다 퀘벡 주의 고유한 풍경과 주민의 평화와 온안함을 담았다. “예쁜 얼굴이나 형태의 아름다움 외에는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이 있지 않다. 색깔과 빛의 아름다움, 색깔과 빛의 배치의 아름다움은 종종 생각되지 않는다.(There are other kinds of beauty besides that of a pretty face or form, or the brightness of a sunset. The beauty of the arrangement of spots of colour and light and shade, or even of lines, are not often thought of. 1897_내셔널 갤러리 오브 캐나다)”라고 말할 정도로 인물과 풍경을 사랑했고 조화의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화가는 타고난 세계인이었다. 원래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으나 나중에 몬트리올 시장을 두 번이나 역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캐나다 퀘벡으로 이주했으며, 다시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공부했고, 건축을 배우기 위해 오타와로 갔다가 파리로 유학하면서 진로를 바꾼다. 아카데미 줄리앙Académie Julian에서 당대 주류였고 아카데미 화풍의 일인자였던 윌리엄 부게로와 카를로스 뒤랑Carolus-Duran에게서 배웠으나, 역으로 프랑스의 변방 바르비종 화파에게서 영향을 받는다. 파리 살롱에서 전시함으로써 이름을 알렸고, 런던의 아카데미에서도 전시하면서  화가로서의 경력을 성실히 쌓는다. 새로운 유파나 기법을 알게 될 때마다 도전의식을 가지고 그림을 그렸고, 인물에 애정을 담아 그렸다. 그는 ‘캐나다 최초의 위대한 미술교사’라고 불릴 정도로 탁월한 미술교사이기도 했다. 1886년, 몬트리올에 정착하게 된 브라이너는 몬트리올 미술협회Montreal Art Association에서 책임 미술교사로 35년간 성심으로 가르쳤고, 알렉산더 영 잭슨Alexander Young Jackson, 클래런스 가뇽Clarence Gagnon 같은 제자도 키워냈다. 나중에는 왕립 캐나다 아카데미Royal Canadian Academy의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미술교육에 열정을 쏟았다. 


 1892년, 캐나다 태평양 철도Canadian Pacifil Railway는 화가에게 특별한 부탁을 했다. 철도 라인을 따라 보이는 캐나다의 사계절 풍경을 그려달라는 것이었다. 로키 마운틴을 포함한 캐나다의 절경은 브라이너를 통해 훌륭한 일러스트레이션으로 남았다. 화가는 이미 유럽과 캐나다 곳곳을 여행하면서 풍경의 진수를 알린 적이 있었다. 화가는 1901년, 버팔로에서의 박람회에서 금메달을 수상하고, 1904년에는 루이지애나에서의 박람회에서 은메달을 수상했다. 1916년에는 두 개의 훈장을 받음으로써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오래오래 그림을 보다가 멋대로 제목을 붙인다. “잠시 잠깐 주저앉을 때에도 곁에 있어줘.”라고. 우리는 고단한 삶 가운데 자주 주저앉지만 그래봐야 잠시뿐이다. 마음 놓고 좌절할 시간도 별로 없는 게 현실이다. 영혼의 어두운 밤을 지날 때, 생활의 잔인한 길녘을 걸을 때, 그러다가 어딘가에 틀어박혀 비참해 할 때. “혼자 있고 싶다.”고 말하지만 하루 종일 일주일 열흘을 혼자 있고 싶지는 않다. 혼자 내 마음을 다독이면 될 것 같은데 이내 쓸쓸해진다. 따뜻한 마음과는 함께 있고 싶다. 소리 없이 나를 사랑하는 사람과 등을 맞대고 싶다. 이 초라한 동굴에서 어서 나와야 한다고 윽박지르는 사람이 아니라 기꺼이 내 곁에서 조용히 있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홀로 외로이 머물렀던 사람과 곁과 함께 머물렀던 사람의 고단함은 분명 다르다. 후자는 좀 더 빠르게 일어나 터널을 지나고 사막을 통과해 살아남을 수 있다. 하다못해 작은 강아지 한 마리라도 좋다. 주저앉은 이에게는 곁이 필요하다. 순간이나마 간신히 의지할 마음 하나만 있으면 된다. 내가 조금 더 잘 사는 걸로 보답하고 싶은 바로 그 사람, 누군가의 마음조각이 간절하다. 


 세상의 모든 서러운 이에게 곁이 존재하기를. 급한 마음에 터널 안에서 오랫동안 있지도 못할 터이니, 잠시 잠깐 주저앉을 때만이라도 따뜻한 마음이 은혜를 베풀기를 바란다. 덩달아 나도 정체 모를 어디의 누군가에게 간곡히 부탁해 본다. “잠시 잠깐 주저앉을 때에도 곁에 있어줘.” 대개 인간은 약한 게 아니라 외로운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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