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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정 Oct 22. 2019

내가 가장 존경하는 화가

그는 시간 안에 담긴 모든 것을 이겨냈다

“오래 살아남은 그는 잠깐씩 본성을 잊는 법을 터득했다. 잠시였지만 순간은 아름다웠다. 화가는 그가 본 가장 찬란한 것을 그림으로 증명했다.”



 “나는 매일 무척 행복해. 아침 일찍 출근해서 정신없이 일하다 보면 점심시간이고, 구내식당에서 매일 다른 메뉴로 급식 먹을 수 있고, 러시아워 전에 집에 들어가고, 자주 먹고 싶은 거 사 먹고, 기회 되면 친구들과 만나 수다 떨고, 유행 따라 새 옷 사 입고, 챙겨야 할 남편도 애들도 없고… 딱히 부족한 게 없어.”


 오랜만에 만난 유선의 말에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매일 매일을 만족스럽게 사는 사람이 있기는 있구나!’ 행복은 이십여 년이 넘게 내 삶의 화두였다. 어떻게 해야 행복할 수 있을지 늘 연구하고 또 연구했는데… 나의 일상은 달라지지 않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언제나 별 일 없이 동일한 매일매일은 나의 불만이었다. 그러나 동일한 일상이 그녀에게는 행복의 원천이었다. 


 이름만 대면 아는 유명한 스님의 설법을 들어본 적이 있다. 불자들은 각자의 고민을 가지고 스님 앞에 나온다. 처한 상황은 각각 다르지만 사연을 꿰뚫는 핵심은 똑같다. 스님은 현실에 만족할 수 있도록 시선을 바꾸어 보기를 요구한다.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다고 한다. 고민은 어느덧 단순해진다. 언제나 단순해질 수 있는 능력이 행복의 역량인 것이리라. 기억났다, 의사 작가 와타나베 준이치渡邊淳一가 쓴 『둔감력鈍感力: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다』(다산초당, 2018)이라는 책도 있지 않았던가. “별 일 없이 산다”는 장기하의 노래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이제야 알았다, 단순한 사람들만이 쉽게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을. 백 번을 해봐도 단순해질 수 없는 나는 입술을 깨물며 돌아선다. 그렇다. 나는 까다로우며 불평 많고 의심이 가득한, 만성 예민 상태의 인간이다. 


 이런 내가 가장 존경하는 화가는 표현주의의 거장, 노르웨이의 국민 화가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다.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가장 좋아하는 화가’가 아니라, ‘가장 존경하는’ 화가다. 그 이유는 그의 성격과 그의 생애 때문. 나보다 훨씬 심각한 예민종자가 그렇게 장수했다는 데 화가에 대한 나의 애정이 있다. 


“가끔 여기 와서 시간을 보낼 때가 있어. 이 남자, 뭉크, 그림을 보면 일찌감치 자살이라도 한 줄 알았는데, 팔십이 될 때까지 살았더라구.”

“배신감이야?”

M은 희미하게 웃는다. 

“위로 같은 거지. 가족력인 폐결핵에 대한 공포, 이상성격자였던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 끊임없었던 정신병력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오래 살다니. 가혹한 현실이 오히려 그를 붙들어 주었다고 생각하면, 위로가 돼.”

M의 목소리가 고즈넉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나 대신 누군가가 혹은 나 아닌 누군가도, 들리지 않는 비명을 지르고 있구나. 그런 위안.”


_정미경 『밤이여 나뉘어라』(2006년 제 30회 이상문학상(李箱文學賞) 작품집 


 뭉크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정미경의 위 문장들을 떠올리고 또 떠올린다. 화가는 81년을 살았다. “질병과 광기, 그리고 죽음은 내 요람 위를 맴도는 악령이었다.” (영혼의 시-뭉크전 인용)이라고 할 정도로 그의 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울과 불안 가운데 있었다. 종교에 심취한 아버지에게서 정신적 학대를 받았으며, 사랑하는 어머니와 누이, 남동생, 아버지, 이모까지 줄줄이 세상을 떠났다. 무슨 저주가 씌었나 생각할 만도 하다. 화가 역시 몸이 약해 툭하면 아팠다. 주위 누구도 뭉크가 유년기를 넘길 거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였다. 뭉크는 늘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렸다. 아픈 사람을 피했다. 아픈 사람에게는 죽음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건강한 사람을 싫어했다. 그는 연약한 자신과 대조되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죽음을 환기하는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도 어려워했다. 


 어떻게 에둘러 잘 표현하려 해도 뭉크는 신경증 환자였다. 겉보기에는 정중하고 예의발랐지만 그건 자신이 정한 원칙이었기 때문이었다. 뭐 하나라도 자기 마음에 맞지 않으면 불같이 화를 냈고, 의외의 장면에서 질투에 휩싸였다. 관계를 맺는 데에는 더욱 이기적으로 굴었다. 그렇게나 죽음을 두려워했으면서도 살아있는 것을 힘겨워했다. 우울에 매여 숨 막혀하면서도 우울에 매달렸다. 외로움에 시달리면서도 아무도 곁에 두지 않았다. 


“내 인생의 후반부는 그저 똑바로 서 있기 위한 투쟁이었다. 나의 길은 나를 끝이 보이지 않는 구덩이가 있는 절벽 가장자리로 이끌었다. 나는 돌과 돌 사이를 뛰어넘어야 했다. 가끔은 그 길로부터 도망쳐 사람들 사이의 삶 속으로 뛰어들어보려 했다. 하지만 매번 다시 절벽 위의 길로 돌아와야 했다. 그것이 심연으로 뛰어들기 전까지 걸어야 할 나의 길이다. 내 정신이 각성을 한 이후로 삶에 대한 두려움은 언제나 나를 따라다녔다. 내 예술은 개인적인 고백이었다. 

그것은 가라앉는 배에서 무선 전신기사가 보내는 경고 전신과도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이 불안이 내게 필요한 것이라고 느끼며, 나의 병 역시 마찬가지다. 삶에 대한 두려움과 병이 없었다면 나는 키를 잃은 배와도 같았을 것이다.”  


_이리스 뮐러 베스테르만, 『뭉크 추방된 영혼의 기록』, 홍주연 역, 예경, 1993, P.154


 2014년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린 《영혼의 시-뭉크전》은 화가의 전 생애 작품이 골고루 내한했다는 데 화제가 되었다. 화가의 명성 높은 작품이 유화와 판화 골고루 찾아와 그를 사랑하는 관람객을 기쁘게 했다. 몇 개의 부스를 돌며 가장 눈이 커졌던 때는, 그의 후반기 작품을 전시한 방으로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마지막 방에 뭉크의 「해(The Sun, 1916)」 그림이 있었다.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해(The Sun)」, 캔버스에 유채, 455×780cm, 1916, 오슬로 대학


 에드바르 뭉크는 「해」라는 제목을 가진 그림을 여러 점 제작했다. 화가가 사랑했던 아틀리에에서 바라본 햇살은 그를 사로잡았다. 태양은 힘이고 능력이다. 뜨거움이다. 태양은 화가를 덮었다. 그의 본성은 뜨거운 빛으로 인해 잠시나마 온기를 얻었다. 화가는 빛에 매혹되었다. 마침 곁에 두었던 화폭은 이 빛으로 가득해졌다. 그림에는 색으로 만들어진 작은 띠 같은 것들이 보인다. 원래 뭉크의 그림은 긴 선 같은 터치로 가득한 그림이었다. 그러나 이 그림에는 마치 스테인드글라스를 디자인하듯 가느다란 띠가 햇살을 나타내고 바다를 분절한다. 강한 원색의 대비로 화면은 빛을 반사하듯 더욱 찬란해진다. 감정 역시 벅차오른다. 일시적이나마 뭉크는 슬픔과 분노와 우울과 질투를 잊었다. 그가 버텨온 것은 의미가 있었다. 오래 살아남은 그는 잠깐씩 본성을 잊는 법을 터득했다. 잠시였지만 순간은 아름다웠다. 화가는 그가 본 가장 찬란한 것을 그림으로 증명했다. 


 뭉크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보통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탁월하게 똑똑한 그는 하필이면 그 부분이 힘겹게 다르다는 것을 충분히 알았다. 그가 자화상에 집착한 이유도 자기 마음이 아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리라. 화가는 무려 70여 점의 자기 그림을 그렸다. 아픈 자기가 이렇게 살아 있다는 확인이었다. 뭉크는 서명과 날짜의 인장을 통해 살아있는 날을 연장했으리라 믿는다. 그림을 그리는 이에게 그것만큼의 자기 칭찬이 없었을 것이다. 다시 「해」를 보라. 말이 ‘골골 80’이지, 생의 의지가 없는 사람이 80년을 버텨 살아남았다는 것은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다. 게다가 이렇게 찬란한 생의 빛이라니. 자연을 보고 듣고 받아들이는 기쁨으로 충만한 색채라니. 뭉크는 시간 안에 담긴 모든 것을 이겨냈다. 

에드바르 뭉크, 「멜랑콜리」/ 에드바르 뭉크, 「해(The Sun)」, 캔버스에 유채, 450×772cm, 1910~1911, 오슬로 뭉크 미술관

나는 오늘도 별 일 없이 하루 더 살았다. 일일드라마나 주말드라마 하나씩만 봐도 다음 회 기다리는 즐거움에 매일이 훌쩍 간다고 하지만, TV를 보지 않는 내게는 정착하기 어려운 취미다. 가수나 배우도 좋아하지 않는다. 아이돌을 좋아해 보려고 노력해 봤지만 너무 많은 멤버들의 얼굴과 이름을 외우는 일도 어렵다. 자연히 ‘덕질’은커녕 영화관에도 갈 일이 없다. 통신사 VIP 회원이라 매년 받는 영화 예매권 여러장도 휘휘 날려버리기 일쑤다. 맛있는 것도 잘 모른다. 체력마저 약하다보니 맛집 찾아다니는 시간은 피곤할 뿐이다. 여행도 전혀 즐기지 않는다. 고속버스를 타고 또 갈아타고 멀리 가면 체력이 소진된다. 내게 여행은 오로지 정보 획득이다. 철저하게 동선을 짜서 아침 일찍 나섰다가 미술관이 문 닫을 때 나온다. 발바닥에 불이 나고 뒤꿈치에 물집이 잡혀 엉망이 될 정도다. 일찍 침대에 들어가고 다음날 벌떡 일어나 또 다른 박물관으로 간다. 여행 기간에 2만보는 훌쩍이다. 사진 역시 정보 저장용이라 휴대폰 앨범에는 글자와 참고이미지만 가득이다. 그 흔한 먹스타그램 디저트 사진, 친구 얼굴 사진도 찾아보기 힘들다. 당연 셀피가 있을 리가 없다. 


 생의 재미가 크게 없으니 자연히 생의 활기도 남들보다 연하다. 하루하루 비슷하게 충실하지만, 하루하루 비슷하게 재미없다. 그러나 하루 또 잘 살았다. 별 취미 없는 뭉크도 꼭 그랬을 것이다. 하루가 또 충실히 완성되었다. 


 비실비실 허우적거리면서 담배도 안 피우고 술도 안마시고 영양제만 열심히 챙겨먹는 나는 얼마나 오래 살게 될까, ‘골골 80’이라니 적어도 뭉크만큼은 살아가게 될 것이다. 한 해 걸러 받는 건강검진 결과도 가족력인 빈혈 말고는 너무나 훌륭하다고 한다. 존경하는 뭉크의 말년 그림 앞에 선다. 충만한 색채 앞에서 고개를 숙인다. 그는 갑甲이다. 단언컨대, ‘오래 살아남았다는 것’은 갑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충실히 산다는 것으로 이 인생은 대단한 갑이다. 언젠가 뭉크처럼 80세가 되는 날이 온다면 나는 큰 잔치를 하려고 한다. 오랫동안 나와 함께해준 이들을 모두 초대해서 좋은 음식과 선물을 대접해야지. 매일을 즐겁게 살거나 즐겁게 살지 못하거나, 오랫동안 살았다는 건 대단한 일이므로 엄청난 칭찬을 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나도, 뭉크처럼 대단한 것을 하나쯤 증명할 수 있기를. 생의 즐거움은 없어도 욕심만큼은 가득한 내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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