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수정 Oct 30. 2019

다음 생에서 만나요

누군가는 유물론자여서 누군가는 유신론자여서 다음 생을 믿지 않는다뼛속까지 기독교 신자였던 나 역시 다음 생이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TV나 전설 이야기에서 전생의 인연을 이번 생에 꼭 만나게 된다는 설()을 들을 때에도 로맨틱하다고만 생각했다그러나 삼십 대에 들어서면서나와 당신과 수많은 사람들의 생이 그렇게 공평하지 않다는 걸 실감하며 다음 생이 있어야 한다는 걸 생각했다너무나 고생하지만 회생의 기미가 안 보이는 쓸쓸한 인생버티고 버티다가 안타깝게 스러진 사람을 볼 때마다 가슴이 찢어졌다나와 당신이 다음 생에서라도 누리지 못한 기쁨과 사랑을 받으며 살아야 한다고 믿었다이제는 진심으로 다음 생이 있으면 좋겠다. ‘이번 생은 망했어라는 농담이 내게는 농담이 아니다. ‘다음 생은 흥할 거야’라는 결심을 조용히 외치 고야 마는 것이다.
 
다음 생이 있다면 나는 잘 나가는 10대와 20대를 보내고 싶다공부와 아르바이트에 찌들지 않고 젊음을 화려하게 낭비하고 싶다야간자율학습을 땡땡이치고 담장을 넘어 떡볶이와 순대를 사 먹으러 나가고 싶다화장을 진하게 하고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를 몰래 보러 가고 싶다잘 나가는 아티스트인 양 술을 많이 마시고 밤마다 춤을 추러 다니며 돈을 펑펑 써보고 싶다그러면서도 대단한 필력으로 힘 있는 그림을 뚝딱 그려내고 싶다들고만 다녀도 시선이 집중되는 첼로를 적당히 연주하고 싶다세상 혼자 사는 양 대단한 연애를 하고 내내 사이좋은 결혼을 하고 싶다똑똑한 남매를 키우고 싶다이 중에서 한둘이라도 이룬다면 다음 생은 성공이다.
 
우리에게 다음 생이란 없다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왔습니다지금도 그렇다고 믿습니다그렇지만 다음 생이 또 있으면 좋겠습니다그때 만나는 세상이 더 정의롭고 더 평화로운 곳이면 좋겠습니다그래서 누구나 온전하게 자기 자신이 행복한 삶을 살아도 되면 좋겠습니다.” (유시민노회찬 추도사 일부)
 
유시민의 노회찬 추도사를 읽으면서 다시금 내 소망을 생각했다내생(來生)을 믿지 않는 내가 내생을 바라게 되었던 길고 쓸쓸한 날들을그리고 내생을 기약하고픈 또 다른 이유를다음 생을 기약하지 않아도 이번 생에서 나는 먼지 쌓인 바이올린 상자를 열어 짬짬이 연습을 할 수 있고시간이 오래 걸리고 중후한 유화물감 대신 경쾌한 수채물감으로 그림을 더 그릴 수 있다. 앞으로 더 멋진 커리어를 쌓을 수 있고 꽤 괜찮은 벌이를 유지할 수 있다.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과 근성을 오랫동안 길러왔다. 그러나 만나고 헤어지는 일만큼은 내 힘으로 불가능하다그건 인간이 할 수 있는 영역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Edward Henry Potthast, 「Starry Night」


사람의 영혼을 생각하면 늘 별을 떠올리게 된다. 왜 뭉크가 말하지 않았던가, “사람들의 영혼은 마치 행성 같다. 우울한 어둠을 뚫고 나타나서 다른 별을 만나고 밝게 빛을 내다가 온전히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한 별과 같다.” 사랑하는 사람을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생각하는 밤, 나는 에드워드 헨리 포태스트(Edward Henry Potthast, 1857~1929)의 밤 그림을 떠올린다. 사랑하는 영혼을 하늘로 올려보낸 사람들의 모임을, 거기서 하늘만 바라보는 사람들의 별 같은 눈빛을. 한 영혼이 떠나기 전 사랑하던 이의 어깨에 기대며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따뜻함을. 두 사람이 바라보기만 하는 저 멀리의 찬란한 빛을. 


Edward Henry Potthast, 「A Summer's Night」, oil on board, 40×50.2cm


저 냉철한 지식소매상의 마음을 따뜻하게 하는 사람이, 자기 믿음이 달라질지라도 다음 생에 꼭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존재했다. 그리고 나 역시 그랬다. 나에게도 다음 생에 꼭 다시 만나고픈 사람이 있었고, 지금도 있다는 걸 되새긴다. 그 사람 역시 나를 그렇게 생각해 주었다면 좋겠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잠시나마 나를 동일한 마음으로 바라봐 주었기를 바란다. 지금껏 그리 여겨주기를 바라지 않을 테니, 한순간이라도 그래주었기를 바란다. 이후로도 내내 바라고 바라오는 것은 나의 몫일 뿐이라고 믿는다.
 
노회찬 의원의 영면(永眠)을 빈다. 그리고 유시민 작가와 나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조금, 간절히 바란다. 아시죠? 저 역시 당신들과, 특히 당신과 함께 한 모든 시간이 좋았습니다. 



[다음 생에서 또 만나요] 

우리에게 다음 생이란 없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지금도 그렇다고 믿습니다. 그렇지만 다음 생이 또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때 만나는 세상이 더 정의롭고 더 평화로운 곳이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온전하게 자기 자신이 행복한 삶을 살아도 되면 좋겠습니다.

회찬이 형. 늘 형으로 여겼지만 단 한 번도 형이라고 불러 보지는 못했습니다. 오늘 처음으로 불러볼게요. 형. 다음 생에는 더 좋은 곳에서 태어나세요. 더 자주 더 멋지게 첼로를 켜고 더 아름다운 글을 더 많이 쓰고 김지선 님을 또 만나서 더 크고 더 깊은 사랑을 나누세요. 그리고 가끔씩은 물 맑은 호수로 저와 단 둘이 낚시를 가기로 해요. 

회찬이 형. 완벽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좋은 사람이라서 형을 좋아했어요. 다음 생은 저도 더 좋은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어요. 그때는 만나는 첫 순간부터 형이라고 할게요. 

잘 가요 회찬이 형. 아시죠? 형과 함께한 모든 시간이 좋았다는 것을요. 

(유시민, 노회찬 추도사 전문)

매거진의 이전글 누구나 죽음과 맞서 싸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