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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수정 Feb 02. 2020

얼굴 없는 따뜻한 표정

비록 눈길이라도, 사람과 사람은 그저 닿으면 된다.

사람들은 의외로 자기 자신을 못 숨긴다. 손끝만 봐도 그렇다. 누군가는 아플 정도로 짧게 손톱을 깎고, 누군가는 길게 길러서 네일아트를 하고, 누군가는 끊임없이 손톱을 물어뜯는다. 누군가는 커피잔을 잡을 때 양손으로 쥐듯이 잡고, 누군가는 커피잔을 한 손으로 잡으며 새끼손가락을 빼어든다. 계속 손마디를 꺾는 사람이 있고 끊임없이 핸드크림을 바르는 사람이 있다. 커피잔을 끊임없이 매만지는 사람, 머리카락을 계속 쓸어올리는 사람, 얼굴을 손으로 감싸는 사람까지… 작은 차이로 우리는 그들의 내면을 알아본다. 그의 취향과 그의 습관을 알아채고 싱긋 웃는다. 


어디 손끝뿐인가, 발끝도 마찬가지다. 코끝과 입끝도 끊임없이 그의 표정을 바꾼다. 정말 원하는 바로 그 감정을 정확하게 드러낸다. 마음은 머리보다 빠르다. 때로는 말보다도 정확하다. 어디로든 자기를 나타내야 한다. 원래 그런 거다,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는 못 견디는 게 생(生)의 기본 활동이다.  


헬레나 셰르프벡(Helene Schjerfbeck, 1862~1946)의 그림 한 장을 여기 소개한다. 「작은 소녀의 목덜미(The Neck of a Little Girl, 1862)」 얼굴을 마주 보고서가 아니라 멀리 바라보고서 그의 표정을 확신할 때가 있다. 이 청량하고 따뜻한 목덜미를 보라, 셰르프벡의 이 그림은 정면을 보지 않아도 정면을 바라보는 그림이다.    



이 그림을 처음 보았을 때 이병률의 시 한 줄이 내게 떠올랐다. “마음의 뼈는 금이 가고 천장마저 헐었는데 문득 처음처럼 심장은 뛰고 내 목덜미에선 난데없이 여름 냄새가 풍겼습니다”(「사랑의 역사」) 아이의 보이지 않는 얼굴이 보인다. 그 천진함이, 홀로 있어도 외로움을 모르는 순전함이 보인다. 닿아도 닿지 않아도 따뜻하다. 


한 사람과 한 사람이 손과 손을 잡을 때만 사건이 아니다. 한 사람과 한 사람이 표정을 읽을 때도 사건이다. 차가운 표정이 아니라 따뜻한 표정을 읽어내는 순간, 우리는 이때 살아 있음을 느낀다. 이 순간이 한 사건으로 마음에 남는다, 이 순간이 그림이 된다. 그와 나의 시간은 이렇게 한 겹 한 겹 쌓여 한 권의 책으로 남는다. 함께 만든 그림책이어도 너와 나는 다른 모양의 이미지와, 서로 만든 이미지의 개수, 다른 두께를 가진다. 이 책이 두꺼울수록 상대는 소중한 사람으로 남는다. 


핀란드의 화가 헬레네 소피아 셰르프벡(Helene Sofia Schjerfbeck, 1862~1946)은 네 살 어린 나이에 골반을 다치면서 잘 걷지 못해 학교를 다니기를 포기했다. 집에서 공부하다 지루함을 이기지 못한 낙서에 그녀의 재능은 날카롭게 빛났다. 어머니는 이 불꽃을 지나치지 않고 잘 다루었다. 아이의 재능에 꼭 맞는 공부를 시키기로 결심하고 좋은 방법을 찾아 헤맸다. 덕분에 헬레네의 나이 열한 살, 핀란드 화가 중 최초로 파리 유학을 다녀온 아돌프 폰 베커(Adolf von Becker)의 추천과 장학금으로 핀란드 예술 협회에서 운영하는 드로잉 학교에 들어간다. 여기서 같은 이름을 가진 친구, 헬레네 웨스터마르케(Helena Westermarck)를 만나 오랜 우정을 나누게 된다. 이때 헬레네의 인생에 큰일이 일어나게 되는데 아버지를 잃게 된 것. 딸은 홀로된 어머니를 마음에 두고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인생을 살게 된다. 드로잉 스쿨을 졸업하고 나서도 그녀를 향한 작은 지원은 끊이지 않았다. 장학금 덕에 헬레나는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헬싱키 대학 미술교육과정을 본뜬 베커의 화실에 들어가 끈질기게 새로운 문물을 탐색한다. 베커 선생은 파리 유학할 때 배운 인상주의풍과 아카데미풍의 유화 기법을 헬레네에게 가르친다. 그 덕인지 17세가 되는 1879년, 헬레네는 핀란드 예술 협회가 주관한 미술 대전에서 입상하게 된다. 이듬해에는 핀란드 예술 협회의 정기전에 그림을 출품했으며, 또 장학금을 받아 그 다음 해 파리로 유학할 정도로 헬레네의 삶은 탄탄대로였다. 


파리에서의 생활은 넉넉하지 않았다. 핀란드에서 받은 장학금과 그림을 팔아서 번 돈, 가끔 들어오는 그림과 일러스트 주문을 받아 연명했으나 자기 한 몸을 충당하기에도 쉽지 않았다. 레온 보나의 화실에서 고전미의 아름다움을 경험했다. 인상주의를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모든 것이 헬레나에게는 신기할 따름이었다. 1887년에는 파리 국제박람회에서 동메달을 수상한다. 영국 콘월을 여행하여 그린 자연주의 풍경이었다. 


헬레네의 인생에서 가장 큰 가시는 역시 건강이었다. 그녀는 1890년, 핀란드로 돌아와 모교 드로잉 스쿨에서 후학을 가르치기도 하였으나 곧 건강이 악화되어 교수직을 그만두어야 했다.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지 못했다. 본인도 몸이 부자유한데 나이 든 어머니를 모신 채 이사를 계속해야 했고 살림을 꾸려나가느라 에너지를 빼앗겼을 텐데도 근근이 그림 그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참 신기하다, 어떻게 한 사람이 그렇게 끈질기게 성실할 수 있는지. 참 놀랍다, 어쩜 한 사람의 그림이 그렇게도 변화무쌍하게 달라지는지. 


헬레나의 일생은 새로운 그림과 그림에의 도전이었다. 처음 사실주의풍에서 시작해 표현주의와 추상주의에 가까운 단순화로 이어지는 드라마틱한 화풍의 변화는 그녀의 그림 세계를 넓히고 또 넓힌다. 완전히 추상적인 이미지를 얻기 위해 새로운 눈을 열고 또 열었다. 그 누가 헬레나처럼 드넓은 그림의 우주를 가졌을까. 풍경화나 정물화 뿐 아니라 어머니와 동네 소녀 같은 주변인 뿐 아니라 여성 노동자까지 소외된 시선을 찾아 그녀만의 그림으로 완성시켰다. 역사화와 종교화를 중요시 여기던 그 시절, 많은 여자 화가들이 그러했듯 헬레나의 그림도 평가 절하되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건 헬레나 자신의 자화상이다. 그녀의 자화상은 세계 자화상의 역사 내에서 내용과 기법, 그리고 성찰 면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특히 말년으로 갈수록 형상보다 감각으로, 차차 표현적으로 변화하는 얼굴은 뭉크의 그것과 비견할 만큼 훌륭한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나는 단언한다. 헬레나의 자화상은 숫자 면에서나 기법 면에서나 뭉크의 자화상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헬레나야말로 뒤늦게 근대화되는 핀란드를 대표하는 모더니스트 중에 모더니스트였던 것이다. 말년으로 갈수록 짙은 빛을 발하던 헬레나, 더 높은 곳으로 오르던 헬레나. 죽음 후에도 헬레나는 사랑받았다. 2012년에는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여 핀란드 2기념 유로가 발행되기도 했다. 이 특별한 화가를 향한 세계인의 사랑은 나날이 절정이다.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말했다. “얼굴이 얼굴로서 드러나면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열린다.”라고, 누군가와 얼굴을 마주할 수 없다면 멀리서 그를 바라보기라도 해야 한다. 인간의 심장은 돌이나 쇳덩어리가 아니기에 늘 누군가의 표정이 간절하다. 사랑 앞에 선 그 사람의 표정을 보고 싶다, 들리지 않는 그의 이야기가 듣고 싶다. 사랑 앞에 선 간절함에는 우리 모두가 평등하다. 


아무리 전하고 싶어도 전할 수 없는 말들이 있다.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들. 간절한 그런 말들은 허망하게 사라지지 않는다. 목덜미로, 손끝으로, 발끝으로라도 전해진다고 믿는다. 어떻게든, 멀리서라도, 비록 눈길이라도, 사람과 사람은 그저 닿으면 된다. 이내 활짝 열리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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