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머님, 이젠 발바닥을 보여드릴게요
시어머님이 이승에서 천수를 다하시고 레테의 강에서 몸을 씻어 은하의 별로 자리한 지도 어언간 3개월이 지났다.
엄동설한 천상의 바다도 얼어붙은 메마른 은하의 넓고 넓은 별밭 어딘가에 갓 눈을 뜬 작은 별로 자리하기엔 너무도 힘들 것 같아 은하를 헤아려보며 힘을 보태드리고 싶은 심정이며, 또한 가족의 맘속에 지지 않는 큰 별로 자리할 공간을 마련하고 다시 품 안으로 들어올 별을 기다리며 기도의 두 손을 모은다.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을 위한 추모예배 등 소천의 과정을 마치고 유품과 집안 살림을 재정리하다 보니 시간은 기계적인 속도보다 더 빠른 미련의 시간으로 가족과 내 곁에서 새벽안개 걷히듯 떠나갔지만, 잔잔한 시어머님의 미소는 동살에 빛나는 이슬처럼 풀잎만 적시는 게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추억마저도 촉촉하게 적시고 있었다.
남아있는 이는 떠난 이에게서 회한(悔恨)을 받고, 떠난 이는 남아있는 이에게 회상(回想)을 물려주는 게 인생사지만, 떠나고 남는다는 경계는 눈 밖의 시간이 아닌 마음속 공간의 구분으로 나도 언젠가는 떠나는 이가 될 것이다.
내가 떠나야 할 때는 결코 남아있는 이에게 회한의 무거운 짐을 지우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떠난 이는 말이 없기에 더욱이 남아있는 이는 채무와 같은 짐을 살아있는 동안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
새 봄볕이 어리 하게 거실 소파를 붙잡아 뒹굴뒹굴 맴도는 월차휴가의 한낮에 게으름에서 기지개를 켜고 모처럼 쌓인 피로와 후회의 더께를 씻어내려 단골 동네 대중탕으로 발길을 옮겼다.
예전에는 유독 목욕을 좋아하시는 시어머님은 내가 쉬는 주말이나 휴일엔 날이 꾸물꾸물하다고 하든가 아침에 일어나시어 왠지 몸이 찌뿌둥하다는 이유로 으레 ‘아가야, 목욕 가자’가 예정된 수순이고 나 또한 기다려지는 일과였다.
오늘은 혼자 대중탕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까지 뭔가 빠뜨리고 온 것 같아 자꾸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다 갖춰진 목욕가방을 몇 번이고 들춰봐야 했다.
그래도 2인3각의 동행 길에서 두 개의 다리로 홀로 걸어가야 한다는 게 어쩜 가장 외로운 여정(旅程)일지라도 나는 결코 외롭지 않을 수가 있는 건 시어머님을 업고 걷기 때문이며, 시어머님의 훈훈한 사랑의 무게로 길에 찍히는 어떤 발자국보다도 더욱 깊게 찍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평일 낮 한적한 목욕탕 안의 짙은 골안개 같은 습기에 가린 시야 밖에서 시어머님이 ‘얘야, 등 좀 밀어라’는 소리가 물을 끼얹는 소리보다 귀에 더 가까이 환청으로 다가왔다. ‘네, 어머님’ 절로 입에서 말이 튀어나올 번하였으나, 주위에 사람이 없어 다행이라고 안도를 하면서도 제일 먼저 발바닥으로 가는 눈길이 이젠 부담이 없어졌다.
시어머님과 같이 목욕을 하면서는 등을 밀어드리고 머리를 감겨드리는 것보다도 더 힘든 건 발바닥을 목욕탕 바닥 타일에 딱 밀착하여 발바닥이 보이지 않게 신경을 쓰는 것이다.
그러기에 발바닥에 힘을 주어 긴장하므로 목욕을 갔다 오면 오히려 장딴지에 근육이 뭉쳐 피로가 가중되었다.
오늘은 발바닥에 힘을 빼고 목욕탕 안을 거침없이 활개를 치고 탕 안에서도 발을 쳐들었다가 물을 내려치기도 하고, 모처럼 누구나 보라는 듯 다리를 꼬고 앉아 발바닥을 드러냈다.
그동안 발바닥에 짓눌려 숨쉬기조차 힘들었던 푸른 새 때들이 목욕탕 가득 날아오르며 짹짹거리는 소리가 새봄을 찬양하는 교향악보다도 더 우렁차게 마음을 진동시켰다.
그래도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예전 같이 습관처럼 탈의실로 나와서는 제일 먼저 양말을 신었다.
속옷을 먼저 입는 시어머니는 처음에는 양말이 뭐 그리 중요하냐며 얘기를 하다가 항상 반복된 행동에 그러려니 하면서도 어릴 적부터 습관이라는 말에 매번 유별나다는 눈길을 보냈었다.
일 년 내내 아니 결혼 전후에 가장 먼저 챙기는 의류가 양말이고, 발에서 혹처럼 붙어 떨어지지 않는 건 그럴만한 인생사의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골 초등학교의 교사이며 지역 향교의 전교를 맡아 논어를 강의하는 유림이신 아버지와 재가불자의 보살행으로 불교 자선활동에 매진하는 어머니와 사이에 외딸로 사랑을 독차지했지만 원리원칙의 엄격함에는 가끔 질식할 정도인 무미건조한 가정에서 별 탈 없이 자라났다.
초등학교 때는 학급 반장에 선출이 되어도 워낙 나서지를 못하는 성격 탓에 한 학기 반장을 하는 동안 너무도 부담이 되어 등교가 싫어질 정도였다.
고등학교까지 고향에서 학업은 늘 상위 다섯 손가락 밖으로는 벗어난 적이 없는 교실 어느 곳에 있는지 표시가 나지 않는 키 작은 조용한 모범생이었다.
학교수업과 방과 후에 도서관에서 대여한 책을 보는 것 외에는 무취미인 탓에 친구도 초등학교 때부터 같이 학창생활을 하는 서너 명이 전부였다.
수학 등 이과 과목에서는 탁월하게 탑을 유지했는데 도대체 어학은 부끄러움이 많은 탓인지 소리 내어 발음하는 것조차 남세스럽게 느껴지다 보니 점점 기피하게 되어 영포자라는 비웃음을 들으며 성적을 밑으로 물고 늘어지는 무거운 닻이 되었다.
그래도 부모님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이 무난히 서울의 대학으로 입학을 하였는데, 아버지는 여자가 객지에서 공부하기 위해 집을 떠나는 것에 내심 걱정이 많았고, 특히 어머니는 대학 입학원서를 접수할 때까지 하나밖에 없는 딸자식을 곁에 두고 싶은 마음에 서울의 대학이냐 고향에서 가까운 지방의 대학이냐를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오락가락하였다. 꼭 서울에서만 학업을 계속하겠다는 나의 고집과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길 경우 언제든지 고향집으로 돌아오겠다는 타협이 이뤄져 어렵사리 서울행을 관철할 수가 있었다.
서울로 대학 학업을 위해 고향을 떠나는 날은 부모님이 역까지 나오셔서 객지로 가는 자식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글썽거리며 공부에 열중하고 건강에 유념하라고 신신당부를 하시며, 아버지는 서류용 큰 봉투를 주면서 책상 앞에 붙여놓으라고 하셨다.
열차 안에서 봉투를 열어보니 화선지에 붓으로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慾 勿施於人)과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을 아버지의 서체로 쓰셨다.
집에서 어릴 때부터 눈에 익은 글이지만 직접 체취가 묻은 글을 받으니 맘속에서 기개가 결연해지기도 하고 기대에 어긋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도 복합적으로 북받쳤다.
서울의 봄은 분주한 활력이 고향의 여름 불볕보다 더 뜨겁게 타올랐으며 그 뜨거운 흐름에 너무 가까이 접근했다가는 화상을 입을 것처럼, 여태까지의 생활과는 전혀 다르게 나의 심장을 담금질로 달구기 시작하였다.
부모님의 걱정과 염려를 훌훌 털고 새장에서 창공으로 훨훨 날아오르는 새처럼 자유로움과 호기심이 일상이 되었으며, 몸에 꽉 맞춰진 틀에서 벗어나 자신의 공간을 찾고 만들어가는 차원을 변경하는 대변혁의 계기가 되었다.
그간 고교 때까지는 하교 후에 옆도 쳐다보지 않고 집으로만 곧장 가야 했던 정해진 동선이 대학 생활 후에는 나날이 길어지고 달라지며 학우들과 커피숍에서 어쩌다 호프집까지 실로 상상을 뛰어넘는 자유의 만끽이며 엄청난 일탈이었다. 이러한 급변에서 이미 탑승한 궤도열차에서 튕겨져 나가지 않기 위해서는 더욱 힘주어 붙들어야 했고 흑백 같은 세상에서 컬러로 색칠된 세상으로 진입은 현기증을 느낄 정도로 요란하였다. 횡단보도 앞에서나 엘리베이터 기다리면서도 무엇에 쫓기는 것처럼 모두가 그러니 나도 덩달아 걸음이 빨라지고 동작이 잽싸게 변해갔다.
첫여름방학이 다가오자 지방에서 온 다른 학우들은 고향에 갈 준비로 들떠있는데, 난 어떤 핑계를 만들어서라도 하루라도 더 늦게 가고 싶은 심정이 들 정도로 서울 환상의 단맛에 푹 젖어 있었다.
대학 생활은 가히 신천지를 찾는 콜럼버스와 같은 대항해 탐험가가 세상을 바꾼 위대한 정신을 나도 구현해 보겠다는 기분으로 학업에 못지않게 방과 후의 일정과 유기동물보호와 통기타 동아리 활동에 더 치중하게 되었다.
그러니 장학금을 한 번도 받지 못하고 학업보다는 치장과 과외활동에 관심이 많은 딸을 아버님은 대학을 그만두고 약속대로 고향으로 돌아오라고 성화였으며, 어머니는 연락도 없이 불시에 하숙방을 찾아왔기에 등교 전에 대충 방 정리는 필수사항이었다. 제 딴에는 이부자리를 정갈하게 개고 책상에 책도 펴놓고 세탁물도 숨겨놓았지만 저녁 늦게 귀가하여보면, 방은 온통 어머니 취향대로 바뀌어졌고 세탁물은 빨래집게에 물려있었다. 그 이후의 잔소리는 끝이 없이 귀를 때렸다.
그럭저럭 4년의 시간이 흘러 서울생활에 면역이 되어 경이로움도 시들어 갈 즘에 졸업학년이 되자 모두 유학이나 취업준비 등으로 분위기가 바뀌게 되었다. 서울만 가도 사람이 달라졌다는 부모님의 호통에 감히 유학은 입에서 꺼낼 수도 없었고 또한 어학에 대한 두려움으로 부모님이 가라고 독려를 한다고 해도 마다할 상황이었다.
서울이 그렇게 좋으면 서울에서 좋은 직장에 들어가서 시집이나 가라는 어머니의 질책에 취업정보를 검색하고 취업준비 이력서를 만들며 또 다른 구속의 동굴로 터벅터벅 들어가야만 했었다.
실로 부모에 의탁한 학창생활은 무릉도원인데, 이제 너무 빨리 다가온 자립의 길로 사회에 나서는 것이 두렵기도 하고 막막하였다.
주위 학우들과 견주어 거의 동등한 대기업에 입사를 시도하였으나 항상 면접에 접근하기도 전에 영어 점수가 발목을 잡았다.
또한, 이러한 가장 큰 낭패는 대학 학과를 선택할 때 아버지는 수학이나 자연계열학과로 가도록 권유를 했는데, 내심으로는 여성스러움이 돋보이고 어학이라는 난제에 감히 도전하고 싶었으며 또한 가장 모자란 부분을 대학교육으로 보충하겠다는 독한 마음으로 불문학과를 선택했으니 4년 내내 성적이 바닥을 헤매어 감히 학과 추천은 기대를 할 수가 없었다.
몇 번 입사지원에서 탈락을 하다 보니 새장을 떠난 새가 스스로 돌아오는 경우의 심정을 실감하면서 집 나가면 개고생이라는 말이 허언이 아님을 뼈저리게 느껴왔다.
해가 바뀌어 새봄은 왔는데 봄꽃이 화창하게 피어도 봄 같지 않은 생활 속에서 직장인이 된 학우들과는 점점 연락이 뜸해지고 부모님의 전화가 오면 오싹 소름이 돋을 정도로 기피의 대상이었다.
아버지는 마침 고향 중학교에 임시 강사 자리가 있다니 얼른 내려오라는 성화를 하였으나 못 들은 척 한쪽 귀에서 다른 귀로 흘려보내며 곧 취업이 결정될 거라는 변명으로 하루하루를 버티어 나갔다.
백수로 있으며 용돈까지 받기는 도저히 양심에 걸리어 주인집 딸의 과외를 하면서 생활비를 보태어 나갔다. 인 서울이라는 유명 대학을 버젓이 졸업하고도 방에 박히어 웅크려 있는 게 남부끄러워 아침식사 후에는 얼른 책가방을 들고 동네 도서관으로 출근하다시피 바삐 나갔다. 이를 악물고 어학의 벽을 넘겠다고 주저리주저리 단어와 문장을 읊으며 매일 도서관에서 출퇴근하는 모습에 주위사람들은 무슨 고시공부를 하느냐며 오히려 우러러봤다.
초등학교를 일찍 입학하여 동기생들보다 나이도 어린데 일이 년이 늦어도 늦은 게 아니라고 마음을 달래며 대학 4년보다 더 열심히 책과 친해지려 노력을 하였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으라고 했는데 공부해야 할 좋은 시간을 헛되이 다보내고 물이 빠지기 시작하니까 부랴부랴 벼락공부를 한다고 하니 내가 봐도 한심이 절로 나오는 처지였다. 그래도 승부수를 걸고 도전하는 공부이니 마음으로는 고시생보다 더 각오가 대단하였다. 그러던 중에 유난히 비 날씨가 많은 여름을 짜증스럽게 보내며 가을로 들어서는데 서울에서 친척회사에 다니는 동창 친구가 결혼식을 한다고 전화가 왔다. 처지가 처지인지라 이런저런 핑계를 대는데도 막무가내로 초대 멤버가 정해졌으니 무조건 나오라는 것이었다. 같은 동네 골목에서 가족처럼 자라며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쭉 동창으로 지내온 몇 안 되는 친구여서 체면을 방구석에 꾹꾹 눌러놓고, 직장인 등 사회생활을 하는 친구들에게 기죽지 않으려 아껴두었던 옷에 오래간만에 공들여 화장까지 하고 결혼식장으로 나갔다.
가장 늦게 도착한 나를 보고 10여 명 가까운 여고동창들의 와! 하고 반기는 소리에 유리창이 덜컹 흔들릴 정도였다. 몇몇 친구는 서울 물이 좋기는 좋구나 얘가 많이 달라졌다는 등 칭찬인지 비아냥인지 모를 소리들을 연거푸 퍼부어댔다.
누구는 벌써 애엄마가 되었고 누구는 무얼 하고 또 누구는 어떻게 되었고... 수다가 숨 쉴 겨를도 없이 폭포수처럼 연이어 쏟아졌다.
친구 결혼식은 고향 저잣거리 장터의 사투리 억양과 고성이 난무하는 지난 시절의 추억을 되살리는 모처럼 체증이 확 풀리는 자리였다.
왁자지껄 이 얘기 저 얘기로 얼들이 빠져있는데 5년여 만에 처음 보는 고교시절 껌깨나 좀 씹던 친구가 손을 잡아끌더니 ‘야, 범생아, 너 많이 세련되었네. 좋은 직장에 다니는 가 본데 한턱 쏘아야지’하며 어떤 직장에 다니냐며 큰소리로 꼬치꼬치 물었다. 얼른 친구를 화장실 쪽 외진 곳으로 데리고 가서 자초지종을 이실직고하였더니, 네가 취직이 안 된 건 실력이 아니라 운수 탓이라며 친구는 옷소매를 걷더니 팔뚝에 장미꽃 타투를 보여주며 자기는 졸업하고 서너 달 빈둥거리는데 집안 식구들의 잔소리가 하도 듣기 싫어 무작정 이모 집을 찾아 서울로 왔는데, 외사촌 언니가 타투로 액땜을 하면 운수가 풀린다고 해서 과감히 타투를 했더니, 그 후에 알바를 하던 네일 가게 주인이 건강이 안 좋아져 손을 놓게 되자 재수 좋게 물려받아 이젠 꽤 자리를 잡았다고 자랑 질이었다. 그러면서 검지 손가락에 자동차 키고리를 끼어 빙빙 돌리며 세상을 다 움켜쥔 것 같은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 그 말에 혹해 비용이 얼마냐, 통증은 없느냐 지울 수도 있느냐 등 관심을 보이자 그럼 다음 주말에 자기와 만나서 가보자고 일방적으로 약속을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얼떨결에 수락을 하면서도 ‘이건 아닌데, 이러면 안 될 텐데’를 중얼거리며, 한참 만에 친구와 좌석으로 돌아오니 누군가 “너희 둘이 연애하냐 ‘하며 키득거려 한바탕 웃음이 쏟아졌다. 집에 돌아와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며 들어 누우니 별별 생각이 눈에서 머리로 온 정신을 휘청거리게 휘몰아갔다. 오직 친구의 팔뚝에서 꽃핀 가시 돋은 장미만이 천장을 꽉 채우고 있었다.
타투를 하면 보나 마나 완고한 유교적인 아버지와 주위에서 칭찬을 받는 모범적인 여성으로 처신하기를 바라는 어머니는 당장 집에서 나가라고 쫓겨낼 것 같고, 항공사 승무원이 되어 프랑스 등 이국의 문화 속으로 가고 싶은데 취직시험에 걸림이 되는 건 아닌지 등 괜한 친구의 억지에 거절을 하지 못한 자신이 너무도 미웠다.
그렇다고 기세가 등등한 친구의 약속을 어기기엔 그 친구의 거친 입으로 인한 후환이 두려웠다. 할까 말까 하며 망설이고 머뭇거리는 사이에 번민의 일주일이 흘러 타투숍에서 만나기로 한 날은, 애인과 같이 온 친구가 먼저 허벅지에 문신을 한다고 타투이스트와 상담을 하면서 나에게 두툼한 책을 건네주며 도안이나 이미지를 고르고 어느 곳에 할지를 정하라는 것이었다. 정말 평생에 이렇게 머리에 쥐가 난 적은 없었으며 쌀쌀한 날씨인데도 식은땀이 셔츠까지 적셨다. 친구의 애인은 흑거미 문양에 이상한 영문 문장을 넣으라며 자신은 군대를 갔다 온 후에 팔뚝에 새기겠다며 친구끼리 짝을 맞춰 같은 곳에 같은 문양을 하면 좋을 것 같다고 꼬드겼다.
아무래도 좀 더 생각을 해봐야겠다며 다음으로 미루자고 사정을 해도 친구는 너의 운세를 바꿔주려는 건데 왜 이리 겁쟁이냐고 나무라며 ‘그러니 요렇게 뛰어난 범생이 취직도 못하는 거지’라며 놀려댔다. 그러자 타투이스트는 학업이나 취직을 성취할 목적이면 지혜의 문수보살을 등이나 팔뚝에 새기라며 큰 손바닥 크기의 도안을 보여주기에 섬뜩 놀라서 자지러질 뻔하였다.
그래도 운수 대통했다는 친구를 보면 좋은 운수가 도래한다니 안 할 수도 없고
하자니 여러 가지가 악재가 뒤엉킬 것 같아 자꾸 미적거리자 친구가 눈을 부릅뜨고 닦달을 하여 어쩔 수 없이 사정사정하고 고심 고심한 끝에, 벌거벗어도 몸에서 눈에 띄지 않는 곳은 오직 발바닥이라고 하므로 한쪽 발바닥에만 영어로 Fighting!!! 을 새기기로 하였는데, 너무 민숭민숭하다고 파이팅을 북돋아 주기 위해 글자 주위에 찬양의 새 때를 타투하기로 했다. 한쪽 발에만 하면 복이 외톨이가 되어 오던 복도 나가버린다고 친구가 우기기에 어쩔 수 없이 양쪽 발바닥에 타투를 하였다. 발바닥 가득 찬 푸른색 타투가 걸어 나가면 온천지에 푸른 발자국이 찍힐 것 같았고 나도 새 때들과 함께 날아올라 세상이 온통 푸른빛으로 변해버린 것 같았다. 혹시 신발을 오래 신고 있으면 타투 자리가 덧나서 진물이 나는 등 탈이 날 수 있다고 하여 삼사일을 몸이 좀 불편하다는 핑계를 대어 방에 박혀 지내면서부터 양말이 내 삶에 있어 제일의 필수품으로 등극하는 역사적인 날이 시작되었다. 방안의 아이보리색 벽지가 푸른빛으로 변색이 되어 작은 방은 새 때들이 거침없이 날아다니는 드넓은 하늘이 되고 나는 뭉게구름처럼 두둥실 꿈이 부풀어 올라 파이팅! 파이팅! 다가올 운수대박과 만사형통에 도취되어 있었다.
그 까닭인지 몰라도 가을이 끝나갈 즈음에 우연히 길거리에서 마주친 학과 선배 분의 소개로 중견기업에 물류담당 업무로 취직을 하였다. 수치에는 밝은지라 큰 어려움 없이 직무에 잘 적응해 나갔으나, 회사 작업복에 묻혀 소위 프랑스적인 멋과 언어는 뒷주머니로 접어두었다고 하더라도 언제 다시 꺼내 쓸 일이 있을까 하는 아쉬움이 퇴근길 거리의 화려함에서 다른 세상에 온 듯 머리가 멍해지는 경우를 달래며 귀가하면 몰려오는 피곤에 발바닥을 볼 일은 아예 없이 잠자리로 빠져 들어갔다. 특히 동절기라 양말을 벗을 일도 별로 없기에 타투를 잊고 생활을 하면서도 가끔 발바닥에 푸른곰팡이가 피어있는 것 같은 착시를 느낄 때면, 아니야 타투는 나의 수호천사야 라고 얼버무리기도 하고, 내가 푸른 발로 하늘을 뛰어다니기에 하늘이 항상 푸르러지는 거야라고 위안을 하였다.
철저한 수치계산과 빈틈없는 신속한 업무로 상사의 칭찬과 주위의 부러움을 받기도 했지만 차츰 긴장이 풀려가자, 지금의 나는 어둡고 험준한 생계의 동굴 어느 쯤에 와 있는지, 어디가 입구이고 어디가 출구인지 고민하던 생각 자체가 사치스러워지고 무의미해졌다.
점점 기계의 부속처럼 조직의 톱니 역할을 하는 자신을 나무라기도 하지만 이런 것이 세상사고 인생사라는 걸 은행 계좌의 잔액을 보며 터득을 하게 되었다.
입사 5년 차에 주무 책임자로 승급도 하고 생활이 안정되면서 혼자의 집이 너무 썰렁하다고 느껴지는데, 고향 부모님께서는 결혼할 상대가 없으면 고향에서 구해보겠다고 보채는 게 나날이 심해져 갔다.
출퇴근이라는 변화가 없는 생활이 너무 무감각하게 물밀려 오는 일상에서 거래업체의 직원이 업무적인 일로 상의를 한다며 꽤나 자주 찾아오더니 이윽고 애정공세로 태도가 돌변했는데, 내심 싫지 않은 차에 만남의 횟수가 주 1내지 2회에서 거의 매일로 늘어났고 사내에도 소문이 돌기 시작하자 이참에 결혼이나 하자고 맘을 먹었다. 그러나 남자 친구가 4살이나 어리고 기독교 목회자의 장남이라는 난문제가 앞을 가로막게 될 것 같았다. 고향에 자리한 천년고찰에서 오직 부처의 자비를 구현하고 계시는 어머니는 ‘자식이라고는 너밖에 없는데 그럼 부모의 제사는 누가 지내 줄 거냐’라는 이유로 완강하게 반대를 하셨고, 이에 동조하시는 아버지는 더 나아가 동료 교사의 아들에 미련을 갖고 있었기에 결혼은 순간 사랑의 감정이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므로 냉정히 이성적인 판단을 하라면서 승낙을 유보하였다. 구습의 동굴에서 빠져나와 자유를 찾았는데 또다시 율법의 동굴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회의도 쉽게 결정하기에는 타투 때의 결단보다도 더 힘들었다. 또한 고결한 성직자의 집안에 타투가 있는 며느리가 뭇사람의 비난과 험담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무척 마음에 걸렸다. 긴 밤을 잠 못 이루며 고민을 할 때마다 남자친구의 새살거리는 얼굴이 마음의 결정을 몇 번이고 뒤집으며 항상 결론은 어떤 동굴에 갇혀 살게 되더라도 결코 헤어질 수 없다는 자기 위주의 확증편향 다짐에 묶여버렸다,
그래도 최종적으로 위안이 가는 건 남자 친구가 전혀 종교적인 예속 없이 비종교인으로 느낄 정도로 자유스럽고 모든 결정을 다 나에게 일임하는 너무 편한 관계가 결혼생활도 그러하겠지 하고 어설픈 아전인수를 하게 되었다. 사랑은 쟁취하는 것이며 만사에 도전만이 최선의 해법이며 한번 놓친 사랑은 절대로 돌아올 수 없다고 주위에서 귀 따갑게 조언을 하기에 안위를 하며 억지 결정을 내리고는 부딪쳐보는 것만이 상책이라고 큰마음을 먹었다. 몇 주가 지난 주말에 남자 친구가 자기 아버님의 생신이라고 집으로 초대를 한다고 하여 망설임 없이 설령 독이 깨져서 물이 쏟아져도 마르면 그만이라는 옹골찬 마음으로 부딪쳐보기로 했다. 시부모님 되실 분과 첫인사에서 성직자라고 보기에는 전혀 감이 오지 않는 온화한 분이었고, 이런 자유로움과 포용의 분위기에서 남자 친구의 활달한 성격이 형성되었구나 지레짐작을 하며 만사가 긍정적으로만 안기어왔다. 잔뜩 긴장을 하여 처음에는 고개도 제대로 들 수가 없고 커피 맛이 한약보다 더 쓰게 느껴졌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염려가 봄눈 녹듯 머리와 마음에서 씻겨나가자 현명한 결정을 내렸다는 안도의 한숨을 가슴 깊숙이 들이마셨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옷을 갈아입을 겨를도 없이 고향집에 전화를 걸어 시부모님이 될 분에 대한 칭송을 거듭 늘어놓으니 아버지는 묵묵히 듣기만 하였다.
이번 혼인을 허락하여주지 않으면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겠다는 말에 자식 고집을 꺾을 부모가 없다고 어쩔 수없이 상견례에 오게 되었으며, 남자 친구는 저희 부모님이 서울로 오는 것이 힘들겠다며 고향의 전통 음식점으로 자신의 부모님을 모시고 왔다. 상견례 장에 가는 길에 부모님께 자신을 계속 직장생활을 하게 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달라고 졸랐다. 상견례는 종교의 다름을 존중하고 딸을 전업주부로 묶어놓지 않겠다는 언약 등으로 화기애애하게 마무리를 하고 3개월도 지나지 않는 날짜에 결혼식 일정을 잡았다. 막혔던 둑이 터진 것처럼 일사천리로 모든 게 진행되어 나갔고 속도감이 붙자 오히려 숨을 좀 돌리며 나갔으면 하는 우려도 있을 정도였다. 시집이 직장에서 30여분의 거리에 있어 신혼생활을 눈 딱 감고 시집살이를 하기로 했다. 신랑은 나를 위해 집에 머무는 시간을 줄이려고 주일을 뺀 휴일이면 외식, 산행, 여행 등으로 시집의 동굴에서 벗어나게 해 주려고 애를 썼다.
첫 얘를 출산하고 육아를 시어머님께 의존하면서 시집생활이 친정생활처럼 맘 편하게 바뀌면서 손자를 보고 싶어 목이매인 친부모에게는 미안함이 많았으나 가정과 직장을 양립하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그즈음 남편이 2년여를 외국 지사로 나가게 되어 더더욱 육아 문제로 시집을 떠날 수가 없었다. 이삼일 걸러 친정에 전화를 하면 아버지는 애써 서울로 공부하라고 보냈더니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빼앗겼다고 하고, 어머니는 언제 얘를 데리고 친정에 들를 거냐고 푸념이었다. 시집생활이 반십년 여를 지나는 동안 무더운 여름도 대여섯 번을 보내면서도 잠을 잘 때도 양말은 벗지를 않았기에, 시부모님은 딱하게 보였는지 날씨도 더운데 편하게 맨발로 지내도 괜찮다고 하여도 어릴 적부터 집안에서 배운 여성의 예절이라고 에둘러댔다. 심지어 첫째와 둘째를 출산하면서도 분만실에서 양말을 벗기려 하면 발에 냉기가 들어온다고 변명을 하며 산고의 통증보다는 발바닥을 옴츠리는데 신경이 더 집중되었다. 더욱이 시부모님은 저의 고향집이 예법에는 완고하다는 걸 익히 알기에 오히려 딸 교육을 칭송을 하였다. 그 변명을 입증하기 위해 첫째 남자 애는 맨발로 지내는데도 둘째 여자 애는 꼭 양말을 신겼다. 오히려 남자 애가 자기는 왜 양말을 안 신겨 주냐고 앙탈을 부려 찜통 열대야의 한여름 밤에도 시부모님과 남편과 시동생을 빼고는 전부 양말을 신고 있는 반반의 집안이었다. 시집생활 7년쯤에 시동생이 출가를 하고 20여 년을 못 채운 시점에서 시아버님이 췌장암으로 소천을 하여 시어머님과 함께하는 조촐한 5인 식구가 되었다. 시아버님이 떠나신 후에 갑자기 노쇄해진 시어머님과 좀 더 많은 시간을 갖기 위해 저녁 산책도 같이 하고 다육이 화초를 키우기도 했는데, 대중탕에 같이 가서 등 밀어드리고 목욕 후에 재래시장에 있는 냉면집에서 점심을 드시고 집에 오셔서 낮잠을 주무시는 걸 가장 좋아하셨다.
그래서 토요일과 휴일의 오전은 대중탕이 주요 일정이 되었고, 그 대신 남편은 오전 내내 집안 청소와 빨래를 도맡아야 했다. 목욕이 일주일의 직장 과로도 풀고 휴일 날에 점심 준비하는 번거로움이 없어 더없이 좋은데, 목욕탕에서 발바닥의 타투가 드러날까 봐 여간 걱정이 되지 않았다.
남편도 모르는 타투인데 시어머님께 발각이 될까 봐 대중탕 입구를 들어서는 순간부터 긴장의 시간이었다. 시어머님의 등을 밀어드리고 머리를 감겨 드려도 온통 정신은 발바닥에 짓밟혀 있었기에 시어머님은 좀 더 세게 등을 밀라고 거듭 얘기를 하였다.
목욕탕 내에서는 발을 들어 걷지를 않고 질질 끌며 걷는 걸 시어머님이나 목욕탕 내 주위 분들은 미끄러지지 않으려 조심성 있게 걷는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목욕을 하고 나면 장딴지에 뭉친 근육이 풀어져야 하는데 오히려 알이 배겼다. 그래도 그 핑계에 씻고 외식을 하는데도 남편은 오히려 시어머님을 모시는 지극한 효심에 나에게 절절매며 저녁 외출로 기분을 달래줬다.
소슬바람이 불 때쯤에 입사를 하여 얼마 되지 않은 직원이 천연염색을 배운다고 파랗게 염색한 스카프를 선물하기에, 순간 그 색에 현혹되어 같이 배우자고 하여 일주일에 한 번은 퇴근 후에 천 염색 수업에 나갔다. 특히 쪽 염색은 발바닥 색과 너무 비슷하여 위장색으로는 그만이었기에 발바닥도 쪽물에 물든 것처럼 보였다.
짐짓 쪽물에 물든 것처럼 보이려 양말에 쪽물을 묻히기도 하고 손바닥도 파랗게 물들여보기도 하였지만 표면적인 색은 결코 오래가지 못하였고 심지어 근무 중에는 손바닥까지 주먹을 쥐어 가려야 할 이중의 고행이었다. 나의 푸른 색감이 남에게는 전혀 폐해가 아닌데 왜 나만 이렇게 소심해야 하는지, 푸른 하늘과 바다 그리고 쪽빛 스카프에 어느 누구도 시비를 하지를 않는데, 푸른색 앞에서는 무엇 때문에 움츠려드는 걸까.
시댁에 매달리다 보니 식구도 없는 친정에는 점점 소원하게 되어 미안함이 차오를 때, 아들이 재학 중에 병역을 마치고 유학을 간다며 고향 쪽에 있는 군부대에 지원을 하여 훈련을 마친 후에 다행히 자대에 배치를 받게 되었다.
어머니는 외손자를 한 번이라도 더 만나려는 마음보로 수시로 군부대의 법당에 자원봉사를 하였고, 아들도 주말 외박이나 특박, 심지어 휴가의 반 이상을 외갓집에서 보내는 진정한 지극 효심으로 친정에 훈훈한 봄바람을 불어넣어 노부모님께 참삶의 의욕을 북돋아주었다. 그 덕에 아버지는 외손자의 유학에 첫 학비는 본인이 납부를 해주겠다고 미리 선약을 하고 있었다.
나의 가슴 한쪽에 항상 응어리로 뭉쳐있던 불효를 아들 얘가 씻겨 내려줬으며 또한 남편도 회사의 보직이 지방 대리점을 관할하는 업무를 맡게 되어, 고향 쪽에 업무가 있으면 일부러 자원하여 출장을 가서 잠깐이라도 시간을 내어 부모님을 뵙고 사위의 소명을 다하려고 노력을 하였다.
그럭저럭 큰 풍파 없이 딸도 대학을 졸업하면서 중등교사로 바로 취직을 하였기에 맘속으로 딸의 신체에는 타투가 없어도 만사가 형통하는구나 나만의 비밀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취업 준비 시절의 암울함을 깨끗이 닦아내었다.
2명의 자식을 키우며 자식 교육이라는 것이 자신의 꿈과 모자람을 채우기 위하여 자신의 삶을 대신하여 입시 전선에 내몰았다는 자아성찰의 시간을 가질 때면 철학자의 머리와 성직자의 마음이 되기도 하지만 역시 어머니의 모성이라는 사랑이 제일이었음을 나의 어머니와 자식을 통해 배우게 되었다.
평안한 시간은 그 이면에 험난한 고행을 동반한다는 얘기가 있듯이, 연일 혹한이 몰아치는 동절기에 시어머님은 재래시장 나들이에 빙판에 미끄러지는 낙상사고로 고관절이 손상이 되어 입원하셨는데 퇴원 후에 얼마 되지 않아 급성폐렴으로 또다시 입원을 하게 되었으며, 이 길이 돌아올 수 없는 마지막 갈림길이었다.
시어머님은 입원 중에도 빨리 쾌차하여 뜨끈한 목욕물에 몸을 담글 생각을 잊지 않으며 유독 등이 가렵다고 하셨다. 세밑으로 가내외가 분주해지는 싸락눈비가 내리는 엄동 날 한밤에 은하로 올라가시며 가족의 손들을 잡아 마지막 남은 체온까지 다 전해주시고 떠나셨다. 시어머님이 퇴원을 하시면 제일 먼저 목욕탕에서 등을 밀어드려야겠다고 맘을 먹었는데, 정말로 발바닥에 신경을 쓰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목욕을 시켜드리리라 사죄를 하였다. 발바닥의 새 때를 시어머님과 함께 목욕탕 가득, 온 산야로 훨훨 날려야겠다고 속맘으로 거듭 맹세했는데, 회한의 눈물에 날개깃이 흠뻑 젖은 새 때는 저승의 길을 인도하는 길벗으로 날려 보내야만 했다.
천상의 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시도록 영결예배 중에 마지막으로 시어머님께 발바닥을 보여드려야겠다고 양말을 벗으려고 신발을 벗고 양말에 손을 집어넣자 옆에 앉아있는 동서가 신발에 잡티가 들어가서 그러는 줄 알고 얼른 무릎을 툭 치면서 눈짓을 보이며 귓속말로 이따 밖에 나가서 신발을 털라고 하였다. 속으로 동서는 이런 어마어마한 사실을 알리가 없지, 내 인생의 특급비밀인데.
장례 절차 내내, 그동안 시어머님의 등을 밀어드린 게 아니라 눈길이 닿지 않는 등에 화인처럼 푸른 발자국을 찍어놓았으나, 이런 화인을 사랑으로 승화시켜 용서와 포용의 큰 그릇에 담아주셨으니 더욱 커지는 죄의식에 마음은 가시덤불을 헤매고 있었다. 시어머님께 발바닥을 보여드려 용서를 빌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머리는 더욱 복잡하게 뱅뱅 맴돌기만 하였다. 하관을 하고 봉분을 쌓아 주변을 정리할 때 얼른 양말을 벗고 맨발로 봉분 주위를 돌면서 탄탄하게 밟아나가자 주위의 가족과 지인들은 이 엄동설한에 왜 맨발이냐고 신발을 신고 밟으라고 하는데, 어떤 분은 효심도 갸륵하지 어머님의 봉분에 신발 신고 밟는 걸 불경(不敬)으로 생각하는 며느리가 대단하다고 하는 칭찬의 소리도 들려왔다.
이 장례의 시간이 다른 가족에게는 회한의 시간이지만 나에게는 뼈저린 참회의 시간인 것은, 타투의 비밀을 진즉 알고 계셨지만 인자한 미소로 사면을 내리셨을 거라고 생각하니 눈물이 눈에서 흐르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 얼어붙은 빙하를 녹이면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로 빙토의 찬물이기보다 마그마와 같은 뜨거운 물이었다.
시어머님이 누워서 이제 나의 발바닥을 보았겠다는 안도가 장례의 마무리를 부담 없이 털어냈다. 그러나 귀가하여 몸을 씻고 나오면서 여전히 제일 먼저 양말을 신는 건 고칠 수 없는 습관이 되어 있었다.
겨울이 혹독할수록 새봄은 더욱 화창하듯 예년보다 이른 개화가 시어머님의 덕분일 거라 여기며 유품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정리하다 보니 내가 시어머님으로 환생한 것 같은 추억에 잠기기도 했다.
집안의 대사를 치르고 평상시로 돌아온다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지만, 시어머님 없이 혼자만 대중탕에 가는 것이 좀처럼 내키지 않아 집에서 간단히 샤워로 3개월 정도를 지내다 보니 등이 몹시 가렵기 시작하였다. 시어머님의 빙의가 내 몸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아 이젠 대중탕을 혼자 가도 시어머님과 동행한다는 위안을 갖게 되었으며, 목욕이 서로에게 쌓인 오해와 미움의 때를 씻어내기도 하지만 실은 피부 깊숙이 서로의 이해와 포용의 정이 목욕물보다 더 뜨겁게 스며들었음을 알게 되었다.
텅 빈 평일 목욕탕의 욕조에서 발로 물장구를 치고 때수건으로 발바닥도 밀고 예전에 없던 행동으로 평안을 즐기고 대중탕 문을 나서는데 벚나무 가로수의 꽃잎이 톡 떨어지더니 콧등에 달라붙는다. 효심이 지극한 사람에게는 새봄엔 하얀 나비가 망자의 혼을 전하려고 머리나 어깨에 앉는다고 하던데 시어머님은 하얀 꽃잎으로 오시는 건가 하고, 콧등에서 귀한 작은 별 만큼한 꽃잎을 때어 지갑의 주민증 사진 옆에 붙여놓았다. 꽃잎 주민증을 보니 시어머님과 일심동체가 된 듯 세상에서 가장 예쁜 별나라의 신분증이 만들어졌다.
가을하늘 못지않은 파란 하늘에 발을 높이 올려 헤엄치고 싶은 춘삼월의 가로를 걷는 걸음이 왜 이리도 가벼운지 평소에 결코 느껴보지 못한 고양된 기분이다.
그래, 이젠 꽃비 내리는 5월엔 푸른 발바닥이 누렇게 물이 들도록 맨발로 황토 길을 마음껏 걸어보고, 개울가에서 물웅덩이가 푸르러지도록 물장구질도 실컷 해야지.
드디어 올여름엔 당당히 양말을 벗고 맨발로 집안을 서슴없이 돌아다니고 맨발을 이불 밖으로 드러내고 잠을 잘 거야. 어쩜 잔별이 자지러지게 빛나는 밤엔 발코니에 의자를 갖다 놓고 가장 맘에 포근히 다가오는 별을 향해 맨발을 발코니 펜스에 올려놓아 봐야지. 그럼 푸른 새 때들이 노란 별을 등에 태우고 서천꽃밭으로 날아가 환생의 꽃을 물고 오겠지. 그리고 그동안 가장 소외되었던 천더기 발을 사랑하기 위해 새빨간 페디큐어를 하고 굽 높은 샌들을 신고 바람에 살랑거리며 꽃길을 걸을 거야.
이런저런 설레는 상상을 그칠 수 없어 꿈길을 헤매며 집에 돌아오는 도중에 카페에서 진한 커피를 마시며 양말을 벗고 신발을 신었다. 약간은 차가움을 느끼지만 맨발에서 맛보는 상쾌한 자유 그리고 마음의 평화! 이제 평생을 억압했던 동굴의 관념에서 참된 해방을 맞게 된 것이야 절로 입에서 말이 튀어나왔다.
누가 억지로 나를 동굴에 집어넣은 것도 아닌데 나 스스로 선택하여 들어간 동굴이 완력에 의해 끌려간 동굴로 느끼며 살아온 세월이 얼마나 자가당착이었는지를 새삼 깨닫게 하는 새봄이 분명 내 인생의 전환기가 되어 여생은 참삶으로 살게 될 것이다.
동굴 밖에서 무한한 세상을 가림막 없이 보는 것도 자유의 향유겠지만, 동굴 안에서 바라보는 주어진 외부 세상은 한정된 공간을 보다 유심하고 자상하게 성찰할 수 있는 이점도 있었다.
이제 동굴을 나서며 눈의 장막이 아닌 마음의 장막이 동굴을 만들고, 오히려 짐짓 동굴 속에 피신하여 안주하려는 삶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타투라는 가상의 동굴에 매몰이 되어 허우적거린 짧지 않은 세월을 시어머님은 소천하면서 그 미로의 동굴을 풀고 가셨기에 멍에의 틀을 벗어날 수가 있게 되었다.
눈앞의 동산이 뒷 태산을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고 뒷산이 낮아졌거나 사라지는 것이 아니듯, 물리적으로 외양을 가려도 영적인 마음까지 가릴 수 없음을 성찰할 수 있음에 감사를 하며 기회를 내려준 시어머님은 아마 상견례 때 이미 나의 발바닥 타투를 보고 있었을 거라는 예감이 전율을 느끼도록 고개를 숙이게 하였다.
아파트 현관의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며 복도 창밖으로 보이는 우듬지에 걸린 쪽달이 애 섧게 느껴지는 걸 보니 나도 세상사의 바람에 깎이며 많이 다정다감해진 것 같다.
운수라는 건 주어진 상황이나 처지에서 최선을 다할 때 찾아오는 것이지 먼 하늘만 쳐다보며 마냥 기다린다고 갑자기 이마에 별이 떨어지는 게 아님을 각성하며, 반백년이 지나는 요즘에야 참삶이란 자신에게 거짓이 없는 진솔 하며 열혈 한 생활인이라는 걸 깨닫는데 까지 참으로 길고 긴 시간의 동굴이었다.
아마 오늘 밤엔 은하수의 잔별 중에 유독 하나가 별똥이 아닌 큰 별로 더욱 다정히 빛을 뿌리며 우리 가족의 마음에 자리를 잡을 것 같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