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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누리 Aug 05. 2015

어린이의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이유

인생을 느리고 행복하게 보내는 법

가을학기 기숙사 입사 신청을 하려면 주민등록등본이 필요해서 얼마만에 11시경에 유리문 밖으로 나갔다. 딱히 바쁜 일이 있는 요즘은 아니지마는 한류가수 비 오빠야처럼 태양을 피하고 싶은 마음에 대낮 외출은 자제하고 있는 터였다.


11시의 보도블록에는 어린이가 많았다. 손바닥만한 찍찍이 샌달에 고사리 발을 얹고서 두세 명씩 무리 지어서 이동을 하고 있었다. 어쩜 하나같이 손에는 어른들의 말로 번역하면 토트백이나 숄더백쯤 되는 신발주머니 가방이 들려있었다. 아마 학교가 없는 방학이라 몇 권의 숙제 공책만을 넣은 학원 가방인양 보였다.


어린이들은 더위라는 것도 느끼지 못하는 지, 통통거리며 뛰어다니거나 반짝거리는 눈으로 바쁘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선그라스와 모자로 시야를 가렸음에도 불구하고 목덜미로 떨어지는 따가운 햇살에 미간을 있을 대로 찡그리고서 하냥 즐겁기 만한 어린이들을 신기해했다.


그런데 몇 발짝 걷다 보니, 나도 어린이로 불리던 시절에는 고다지 덥지 않았던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교 여름방학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때는 집집마다 에어컨이 있던 시절도 아닌데도 더웠던 기억이 별로 없다. 나는 틈만나면 튜브를 끌고 집 앞의 개천에 나가 소란스러운 몸 담그기를 하거나, 친구네 집에서 스티카 인형 옷 입히기를 하면서 짧은 여름방학을 야속해했던 어린이였던 것 같다.


신경과학적으로 어린이는 어른보다 도파민의 분비가 잦다. 도파민은 새로운 것을 학습하거나 보상이 이루어졌을 때 분비되는 신경 호르몬으로, 어린 시절에는 많은 도파민이 분비된다. 왜냐하면 어린이는 어른보다 도파민 분비체의 활성도 높을 뿐만 아니라, 학습과 보상으로 느끼는 이벤트가 잦기 때문이다.


어린이일 때에는 모든 경험이 새롭고 학습을 유발하는 일들이다. 엄마 뱃속에서 나와, 산소로 들숨 날숨을 한 지 고작 오륙년 남짓의 어린이들에게 세상은 어른이 상상할 수 없는 '엄청 신기함'으로 점철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도파민은 행복 호르몬으로 알려졌다시피 감정의 상태를 즐거움의 궤도로 높이는 역할도 하는데, 아마도 더운 여름에 대한 나의 감정 변화는 늙어버린 나의 뇌가 도파민 장난을 치는 바람에 일어난 것으로 추측된다. 나는 옛날보다 여름의 경험이 더 이상 새롭지 않고, 나의 도파민 샘은 푸석푸석 말라가는 것이다.


이러한 도파민의 분비는 시간의 길이에도 영향을 미친다. 도파민은 뇌의 시계의 진동수를 높여, 상대적으로 외부 시간을 길게 늘어뜨려 인지하게 한다. 도파민이 인간 뇌의 시간 인지 기제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코딱지들은 도파민 뽕의 홍수 속에서, 우리와 같은 시간을 길고도 즐겁게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어린이 시절에 보낸 5년은 최근의 5년보다 열 배는 길고도 행복하게 기억된다.


또한 인간의 뇌는 강렬하고 자극적인 경험을 보다 촘촘하게 기억한다. 가령, 뇌의 렌즈로 사진을 찍는다손치면, 강렬한 경험에 대해서는 일상적인 경험에 비해서 시간의 밀도가 높은 고화질 사진을 찍어내는 것이다. 따라서 인체 외부의 시간에서 같은 크기의 시간이라 할지라도, 인체 내부에서는 그것을 더 길게 늘어뜨려 기억하게 된다. 시간을 천천히 보내게 되는 것이다.


뭐 복잡한 신경이니 도파민이니 아는 척을 해댔지만, 결론은 나의 뇌는 이제 성숙해버려서 어린이처럼 즐겁고 긴 시간을 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울 조카와 같은 여름방학을 보내지만 나의 방학은 더 짧고도 언짢은 시간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번만 더 생각해보면 어린이처럼 살아간다면 길고도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즉, 지루하고 짧아져버린 인생을 더 풍부하게 보내고 싶다면 새로움의 역치가 높아져버린 나를 위해서 지속적으로 새로운 자극들을 찾아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여행이나 학습과 같은 새로움에 대한 도전은 어른을 어린이로 살 수 있도록 해준다. 낯선 해외에 가면 동네의 슈퍼마켓에 파는 과자봉지나 버스정류장 표지판마저 새롭고 신기하게 다가온다. 또한 어려운 책을 읽으면서 끄덕거리는 순간들은 강렬한 자극을 주어 우리의 뇌를 분주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나의 인생을 행복하고 길게 보내고 싶다면, 늘 새로운 것을 갈증 하는 것이 좋다. 만약 저 멀리 대중교통으로 여기저기를 갈 수 없는 상황이거나 학습에 울렁증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린이처럼 호기심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음식을 먹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조금 더 길고, 조금 더 즐거운 생애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 죽음이 있음은 지구 위의 어떠한 사실보다 명확한 진리이고,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죽음을 위해 삶을 산다. 더욱 기름진 죽음을 위해서 우리는 어린이처럼 늙어가야 한다. 호기심 눈동자를 장착하고서 바지런히 생각하고, 지구를 구경하고, 감정을 느껴야만 한다.

지금, 이 순간부터 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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