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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누리 May 31. 2022

파도 앞의 생

1. 다시 시작되었다.

오늘은 공휴일의 전날. 오월의 마지막날이기도 하다.

나는 9시에 출근하여 그렇게 꼬박 22시.

새로 온보딩한 서비스의 QA를 한차례 마치고, 다음 빌드(버전)를 기다리며 글을 쓴다.


다시 시작되었다. 아무렴 발버둥치고 고개를 짤짤대봤지만. 나는 다시 낮은 불 앞에 앉았다.



낮에 회사에서 W와의 대화.

> 우리는 어쩜 (프로젝트가) 쪼개져도 9시에 슬랙에 불이 켜지죠.

> 소야. 어쩔 수 없는 소야. 그래서. 오늘 야근하는 거?




아침에 읽은 문장을 보낸다. 사내 메신저로.

> 실수는 되풀이된다. 그것이 인생이다..

> 우이독경. 그래 우리는 진짜 소니까. 소의 귀는 당연하지.




그래. 내게 밀려오라. 아아 나의 아름다운 불행.

성장. 언제까지하나요. 새침하게 쏘아부쳐봤자. 귓등으로도 안먹히는 소리.

그래왔던 것처럼 나는 또. 등떠밀려 성장한다.

아무렴 어때. 전 야망이 없어요. 아무도 들어주질 않아. 괜찮아 그게 내게 주어진.



> 그래도 몸부림치다가. 합리화했어요. 제가 사실 손들어서 '커머스'는 절대 안할 것 같으니까. 심지어 '글로벌' 그런 단어도 그렇고. 그냥 이렇게 경험하는거지 뭐. 이렇게가 아니고서야 내가 '커머스'나 '글로벌'을 하겠냐고.


> '글로벌', '커머스'.. 그래. 어쩌면 사실은 자연스러워. 알잖아. 나는 어느것 하나 선택한 적 없었다는 거. 그저 흘러간 곳을 사랑하는거지. 나는 그렇게 사는건지도 몰라. 주어지는 것을 사랑하는 삶.

알면서도 끌어안는 삶.








2. 고맙게도, 문장도 시작되었다.

주어진 생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내겐. 문장이 필요하다. 그토록 거부했던 긴 글.


나는 얇아지고 싶었다. 몸서리치게 얇은 삶을 살고 싶었다. 어떤 생각의 씨앗도 움틀 수 없는. 그렇게 얄팍한 하루하루. 인스타그램을 보고 타르트를 깨작거리는. 주변 사람을 이야기하며 깔깔거리는.

나는 그렇게 살고싶었다. 그게 내가 꿈꾸던 어른인데.


학교를 마치면 내겐 그런 시간이 주어진다고. 그런 시간이 올거라고.

사실은 아무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래. 내가 방학이 있던 적이 있었냐고.

열 두살이 되던 해부터 내겐 방학이 없었다.

선택하지 않은 것들을 지독하게 품어내는 삶. 그때부터였다. 머리가 채 영글기도 전.

조용한 도서관. 유일한 나의 피난처. 책장 사이로 나는 숨어들었다.


그러나 이젠 거부하지 않으려고. 그건 내 몫이 아니야.

이젠 알 것도 같다.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을.

타의에 의해 성장하는 삶. 그리고 그것을 자의화 해주는 문장들.

그렇게 나는 다시 문장이 고마워지기 시작했다. 십년만이던가. 글에 닿는 감각.

그토록 밀어낸 두꺼워지는 삶을 다시 곁으로 데려온다. 이젠 미워하지 않으려고.


삐죽빼죽하고 기분나쁘게 뜨거운 감각.
어쩔 수 없다. 생긴대로 살기로. 내게 주어진 생이 그런 모습이구나.

다시 읽는다. 아침마다 나는 글을 읽는다.









3. � cafe PADO ☕️

> 여기선 닉네임을 써요. 하나 고민해봐요.


온보딩하고 일주일은 이름짓기를 셀프-KPI로 정했다.

오글거린다고 거부하던 판교식 닉네임 문화. 이번에는 달랐다.

내가 나의 이름을 고민해본 적이 있었던가.


안식휴가를 보내며 나는 스스로를 파도라고 생각했다.



금토천교의 족발집에서 투명하게 차오르는 소주잔을 바라보며 H에게 이야기했다.

> 나는 파도야. 둥근 지구를 빙글빙글 탐험하는.

본디 흔들리고 부유하는 존재. 어쩌다 그렇게 세상에 나왔을까.



H는 오백 맥주잔을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그렇지 않아. 인간들은 파도더러 불안정하다고 그러지. 알지도 못하면서.

파도는 씩씩해.

파도는 어디에서든 씩씩하다. 나는 파도를 바라보고 있으면 얼마나 강단이 느껴지는지 몰라.




그렇게 며칠. 나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 나는 늘 모래사장 위가 부러웠어.

정박된 반짝거리는 존재들.

이젠 받아들이려고. 나는 파도고. 내겐 고정된 물성은 없지만.

바람이나 햇살. 든든한 동반자가 있다.

살랑살랑 엷게 교감하며 서로를 서로이게 만드는 크고도 넓은 존재들. 내 마음의 좁은 사이사이에까지 껴안고 들어오는 형체가 없는 그것들.

나를 나이게. 어디에서건 나를 밀어올리는 그것들의 힘.









2022-05-00 xx:xx:xx update.



パド pado

내가 내게 쥐어준 이름.

서른해 꼬박 나를 괴롭히던 그것을 내 이름으로.


> pado에요. 잘 부탁드립니다.

> padoです。よろしくお願いします。



낡은 이름과 함께 낡은 이모지도 내려놓았다.

이젠. 파도를 거부하며 키워온 페르소나를 관두고.

나는 그냥 파도로. 파도대로 말한다. 파도대로 생각한다. 파도대로 생을 쓴다.


날아온 일정.

- 17:00-18:00 | � cafe PADO ☕️

- ㄴ 티타임해요!







> 왜 파도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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