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 생일에 떠오른 어린 시절
딸아이의 생일이 다가오면 당일 아침에 제과점에서 케이크를 사 올 생각을 한다. 하지만 남편은 언제나 미리 특별한 케이크를 주문해 둔다. 부모님 생신도 아니고 아이 생일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며 나는 종종 반대하지만, 결국 남편의 말대로 된다. “애가 많지도 않고, 하나뿐인데.” 그의 말에는 쉽게 반박하기 어렵다.
왕관을 얹은 아이보리색 2단 케이크는 꽤나 우아하다. 꾸덕한 치즈 크림은 생크림보다 덜 느끼해 나름 괜찮지만 사악한 가격 탓에 남편을 향한 내 시선은 곱지 않다. 공주 드레스를 입은 아이는 여러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었고, 아이의 이모는 화려한 케이크를 보며 부러운 듯 말했다.
“하람이는 좋겠다. 이모는 어렸을 때 생일 케이크 한 번도 못 먹어봤는데.”
맞다. 그랬다. 어린 시절, 생일이면 미역국 한 그릇이 전부였다. 다섯 남매 중 유일한 아들인 막내만 케이크를 받았던 기억도 있었지만, 엄마는 아니라고 했다. 공평하게 아무도 못 받았다고. 그 시절엔 친구 생일에 초대받아 가도 케이크 있는 집은 드물었다. 초코파이에 초를 꽂거나 과자, 과일을 내놓는 정도였다. 진짜 케이크는 1년에 한 번, 할머니 생신 때만 맛볼 수 있었다. 그날이면 크림을 아껴가며 핥아먹고, 핑크색 가짜 꽃장식까지 오독오독 씹어 먹었다.
초등학교 4학년 어느 봄날, 여자아이들끼리 생일에 돌아가며 초대하기로 했다. 하지만 나는 걱정이 앞섰다. 우리 집에 내놓을 게 없었기 때문이다. 과자라고는 쌀을 튀겨 물엿으로 굳힌 ‘오꼬시’ 뿐. 아이들은 잘 먹지 않았고, 대용량으로 사놓은 그 과자는 먹어도 먹어도 줄지 않았다.
생일 당일에도, 부모님은 새벽부터 목장일을 나가셨다. 미역국은 끓여 놓고 가셨지만, 나는 애들이 올 텐데 줄 게 없다며 툴툴댔다. 그때 할머니가 찹쌀가루를 꺼내셨다. 찹쌀가루에 소금을 조금 넣고 뜨거운 물로 익반죽을 한 뒤 동그랗게 빚어 팬에 앞뒤로 지졌다. 여기에 뒷산에서 딴 진달래꽃을 얹어 다시 지져 만든 화전.
“케키가 어딨어. 이게 케키지.”
할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시고 다시 바깥일을 나가셨다. 케이크 타령을 하는 나에게 할머니는 케이크라며 화전을 부쳐줬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꽃을 얹으니 정말 케이크 같았다. 나는 내 손으로 생일상을 차려야 했다. 감주(식혜), 화전, 오꼬시로 상을 차렸다. 아이들은 감주를 맛있다며 잘 마셨고, 식어 굳은 화전은 다시 데워내려다 그만 팬에 들러붙어 떡처럼 되어버렸다.
“설탕에 찍어 먹으면 더 맛있겠다.”는 친구의 말에, 싱크대 아래 숨겨놓은 아카시아 꿀단지를 꺼냈다. 꿀을 흘리고, 뚜껑은 잘 닫히지 않았지만, 친구들은 웃으며 화전을 쭉쭉 늘려가며 꿀에 찍어 먹었다.
작은 선물들도 받았다. 공책이나 연필이 대부분이었지만, 꽃 농사를 짓는 친구가 가져온 빨간 튤립 화분은 특별했다. 진달래가 시골 소녀 같았다면, 튤립은 도시 아가씨 같았다. 누군가에게 꽃을 선물 받는 기분을 그때 처음 알았다.
핸드폰도 없던 시절, 우리는 들과 산을 누비며 놀았다. 샘에 가면 옷이며 신발이 다 젖도록 해가 질 때까지 있었다. 촘촘한 플라스틱 바구니를 들고 가서 샘 주변에서 뜨기만 하면 송사리, 고둥, 운이 좋으면 붕어까지 잡았다. 매번 주스 병에 넣어 키우다가 며칠 안 되어 다 죽었어도 같이 간 친구보다 많이 잡으려고 욕심을 부렸다.
놀다 배가 고파진 아이들에게 김치부침개를 해주었다. 집에 넉넉히 있는 것이라고는 김치 밖에 없었다. 잘 익은 김치를 잘게 썰어 넣어 반죽을 질지 않게 되직하게 하고, 설탕을 듬뿍 넣어 부치면 아이들은 맛있다며 허겁지겁 먹었다. 맛의 비법은 설탕. 아이들은 그것도 모르고 엄마가 해준 것보다 맛있다고 했다. 그 이후 친구들은 종종 “너네 집 가서 김치부침개 해 먹자”고 종종 말했다. 뒷정리를 한다고 해도 손끝이 여물지 못해 싱크대에 흘린 설탕 가루와 김치 국물 자국까지 닦지 못해 된통 혼났다. 그래도 그날 하루는 깔깔거리며 맛있게 먹던 친구들의 얼굴이 계속 떠올라 음식을 해주는 기쁨을 알게 되었다.
그 시절은 분명 가난했지만, 이상하게도 크게 불편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모두가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할머니가 지져주신 화전은 떡이 되었어도 지금의 케이크보다 맛있었다. 나는 이제 딸아이 생일에 케이크를 주문하는 엄마가 되었다. 진달래 화전과 김치부침개를 떠올릴 때면 어느새 어린아이가 되어 있다. 마음을 달래주는 음식, 마음을 키워주는 기억이 거기 있다.
작가 김영하는 『단 한 번의 삶』에서 생일 축하를 “삶의 부조리를 잠시 잊게 해주는 의식”이라 표현했다. 누군가가 내 생일을 기억하고, 상을 차려주는 행위는 그 자체로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다정한 확인이 된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벌써 5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꿈속에서는 할머니와 함께 어릴 적 그 집을 본다. 새집을 지은 지 10년이 넘었지만, 내 꿈속 ‘우리 집’은 늘 대청마루가 있던 그 옛집이다. 앞마당 수돗가에서 나물을 다듬던 풍경, 고소한 냄새로 가득하던 주방, 그리고 봄이면 어김없이 처마 밑에 둥지를 틀던 제비 가족까지. 그 집은 여전히 내 마음 깊은 곳에 살아 있는 ‘진짜 집’이다.
봄이면 산과 들을 물들이는 진달래꽃. 조선시대에는 양반가에서 삼짇날 진달래 화전을 부쳐 액운을 막고 풍년을 기원했다고 한다. 나에게도 화전은 그런 의미다. 올봄에도 진달래 화전을 부치며, 모두 건강하고 무탈하기를 조용히 기도한다. 그 따뜻하고 수수한 정겨움이 다시 내 마음을 물들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