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동창회, 연 2회 쌉가능

작은 학교라서 더 특별했던 학창 시절

by 무지개 연필

중학교 졸업앨범을 앞에서부터 아무리 넘겨봐도 아는 얼굴이 없었다. 한참을 넘기다 뒷부분으로 가서야 ‘대호지 분교’라는 작은 코너가 눈에 들어왔다. 전체 앨범의 10분의 1이나 될까 싶은 분량. 마치 부록처럼 제일 뒤에 끼워 넣은 듯했다. 앨범을 괜히 샀나 싶어 씁쓸했다.


내가 다닌 초등학교는 졸업과 동시에 폐교됐다. 집 근처 언덕 위에 있는 조그마한 학교였고,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늘 한 반, 전교생 11명에서 13명이 전부였다. 당연히 초등학교 친구들이 중학교에서도 그대로 함께했고, 우리는 또 3년을 같은 반에서 지냈다. 세 개 초등학교에서 모인 아이들, 40명 남짓의 학생이 중학교 한 학년을 구성했다. 인원은 늘 41~43명 사이를 오갔고, 반을 나누기엔 늘 몇 명이 부족했다.


선풍기 두 대로 여름을 버티던 교실, 찌는 듯한 더위 속에서 맴맴거리는 매미 소리, 선풍기의 삐걱대는 소리, 그리고 아이들의 땀 냄새가 뒤섞였던 그 시절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촌뜨기들이 고등학교에 올라가며 시내 아이들 사이에서 ‘굴욕’을 맛보기도 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면 첫 질문이 있었다.


“어디 중학교 나왔어?”

“대호지.”


“대... 오지? 대오지! 오지 중의 오지네, 큭큭.”

“아니거든. 대호지(大湖地), 호수 호!”


“설마 배 타고 등교한 건 아니지?”

“죽을래?”


그땐 그저 웃어넘겼지만, 분교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그동안 대호지면(大湖地面) 지명에 대해서 ‘호수 호(湖)’가 지닌 의미대로 호수로만 알고 있었지만 찾아보니 ‘호’는 ‘호지’를 줄인 것으로 근원형은 ‘곶’이라고 한다. ‘대호지’는 바다를 향해 쑥 들어간 큰 지형, 즉 ‘큰 곶’이라는 뜻이다. 지명의 어원은 몰랐으나 우리는 ‘대호지’라는 이름 아래 꽤 단단한 연대감을 나눴다.


“야, 물 좋고 산 좋고 공기도 좋고, 일진도 없고 얼마나 좋아. 한 반이라 다 친하고.”

우리는 나름의 장점을 내세워 시내 애들에게 반격했다.


중학교 동창들과 1년에 두 번씩 정기적으로 만난다. 회칙까지 만들었고, 26명이 가입한 동창회는 지금 10년 넘게 유지하고 있다. 짧게는 3년, 길게는 초등학교부터 9~12년을 함께한 친구들이다. 시골의 코찔찔이들이 어느덧 멀끔한 어른이 되었고, 동창회만큼은 어느 모임보다도 편안하다. 굳이 꾸미지 않아도, 긴장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다. 불혹이 된 우리는 ‘대호지’라는 이름이 은근한 애정으로 남아 있음을 안다. 동창들은 만날 때마다 좁은 면 단위 안에서도 자기 동네가 더 낫다고 도토리 키재기를 하며 티격태격한다.


“네가 국어책으로 내 머리를 찍어서 뇌세포 다 죽었다니까.”

“진짜 기억 안 나는데…….”


분해서 울었던 기억만 어렴풋이 난다. 내가 장난이 심한 남자애에게 국어책 모서리로 응징을 했었다고 한다.


그 시절, 몇 사건들이 조각처럼 기억이 난다. 어느 날, “불이야!”라는 외침에 놀라 전 교실이 복도로 뛰쳐나간 적도 있다. 소각장 옆 잔디밭에서 시작된 불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번지더니 뒷산까지 화르르 타올랐다. 빨간 불길이 뿜어내는 화염은 무서웠고, 매캐한 연기에 울음이 터졌다. 소방차와 의용소방대, 마을 사람들이 달려왔다. 어수선했던 학교 분위기, 그 당황스러운 하루가 지금도 선명하다.


그리고, 어쩌면 가장 아픈 기억. “너희는 어차피”로 시작되던 어떤 선생님의 말들. 무서운 어른의 말과 손이 세상의 질서를 가르쳐줬던 날들을 이야기하며 지금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종종 그 시절을 이야기를 한다. 그래도 그 때 기억이 전부 나쁜 건 아니었다.


국어 선생님 덕분에 국어 시간이 재미있었고, 역사 교생 선생님이 떠날 땐 편지를 써서 울며 건넸다. 토요일 수업이 끝나면 버스비를 아끼려고 1시간 반을 걸어 집에 갔고, 그 돈으로 사 먹던 과자의 맛은 잊을 수가 없다.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과자는 그때 먹었던 것들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으로 급식이 생겼지만 중학교에 올라가선 도시락을 싸야 했다. 보온도시락 뚜껑을 열면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고, 익숙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반찬 뚜껑이 열리는 순간 젓가락 전쟁이 시작됐고, 조금만 늦으면 맨밥을 먹기 일쑤였다.


“야, 이제 사재기 없기 하자.”

“그래, 다 가져가면 맨밥만 먹는 애 있잖아.”


이야기 끝에 우리는 평화를 이루었고, 맨밥을 먹다 체하던 날들도 추억이 되었다.


동창회 10주년을 맞아 우리는 작은 초등학교 운동장에 천막을 치고 체육대회를 열었다. 6월의 초여름, 땀이 줄줄 흐르던 날. 긴 줄넘기, 카드 뒤집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이어달리기, 피구, 베드민턴.


“산책 중이니?”


이어달리기하는 내 모습을 보고 친구들이 놀렸다. 왕년에 운동 좀 했던 녀석들은 여전히 실력이 녹슬지 않았다. 온종일 뛰어놀다 사흘을 앓았다.


이제 우리는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동창회 이름으로 연락이 끊긴 친구들의 경조사 소식이 들려오면 챙기자는 이야기를 했다. 연락하고 지내지는 않지만 '우리'라는 이름은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 그 시절이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었지만, 분명 같이 울고 웃었던 순간이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함께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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