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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시즘 Aug 18. 2023

전주의 맛집은
모두 '가맥'에 있습니다

#눈 뜨고 보니 맥주맛집이 된 슈퍼사장님들

인파가 가득한 여행지를 혼자 걷는다. 누구를 만나지도, 인사를 나누지도 않는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새로운 마실거리뿐이다. 색깔이 바랜 간판의 슈퍼마켓에 들어간 그는 말한다.


"사장님 여기 맥주 하나... 랑 황태, 제육볶음, 치킨 주세요."


독특한 음료문화를 찾는 마시즘. 오늘은 슈퍼마켓에서 맥주와 (최상급) 안주를 파는 곳. 전라북도 전주의 '가맥'에 대한 이야기다. 



전주의 독특한 음주문화

'가게맥주'

(시작은 슈퍼였지만, 끝은 맥주집이 되어버린 가맥)


가맥은 '가게(슈퍼마켓)에서 마시는 맥주'의 줄임말이다. 전주에 오면 관광객들도, 기자도, 음식평론가도 많은 식당들을 손꼽지만, 현지인들이 가장 많이 찾고 즐기는 맛집들 중에 하나다. 겉모습은 영락없는 슈퍼마켓인데 왜 내부에서는 맥주를 팔고 마시냐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그게 사실... 시작은 평범한 슈퍼마켓이었거든.


어쩌다 가게에서 맥주를 팔게 되었을까?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70, 80년대의 전주로 돌아가야 한다. 당시 슈퍼마켓에 들려 맥주를 사가던 손님들이 있었다. 술집을 가기에는 주머니가 가볍고, 집에서 마시자니 발걸음이 무거운 그런 손님들이 가게 빈 공간에 걸터앉아 맥주를 마시기 시작한 것이다.


"소, 손님.. 가게에서 맥주를 마시면 안 돼요!"


라고 했다면 가맥의 문화는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손님들의 사정을 아는 슈퍼 사장님들은 생각한다. 과자를 함께 (사서) 먹는다면 좀 더 맥주가 맛있지 않을까? 


(여전히 가맥집에서는 과자를 판매하고 있다(그것이 슈퍼니까))

뜻밖의 서비스는 전주에 있는 슈퍼마켓들의 운명을 바꾸게 되었다.



한때는 슈퍼 사장인 내가

눈 뜨니 맛집셰프?

(가맥 한쪽에 마련된 황태를 굽는 화로)

경제가 부유하지는 않았던 시기. 퇴근 후 술을 마시고 싶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가게에 모이기 시작했다. 가게에 테이블이 놓이고, 의자가 놓인다. 처음에는 가게의 과자를 먹기 시작했는데, 사장님이 계란말이 같은 간단한 안주를 내놓았는데.


이게 히트를 쳤다. 이제는 맛으로도 술집을 갈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손님들의 열화와 같은 반응에 점점 안주의 종류가 발전한다. 그런데 문제는 옆집의 슈퍼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결국 슈퍼 사장님들 간의 안주요리대결이 시작되었다. 무려 수십 년 동안, 그러다 보니 전통 있는 전주 가맥집은 맛도 맛이지만 자기 가게만의 시그니처 안주가 생기고 말았다. 



안주가 뭐길래

가맥을 만든 걸까

(가맥의 황태와 계란말이는, 중국집으로 치면 짜장면과 짬뽕이다)


일반적으로 전주가맥을 대표하는 메뉴는 '황태'다. 전일갑오(전일슈퍼)를 비롯하여 많은 가맥집은 불에 구운 황태포를 판매한다. 하지만 숨어있는 맛스틸러는 황태를 찍어먹는 '장'이다. 겉보기에는 간장에 청양고추, 마요네즈가 들어간 것 같은데 이게 너무 황태와 조합이 잘 맞는다. 심지어 가맥집마다 소스가 약간씩 다르다고.


(가맥마다 자신만의 시그니처 안주가 있다)

그 외로 발전하는 자신만의 시그니처가 있다. 통닭이 맛있는 가맥이 있고, 갑오징어가 맛있는 가맥, 계란말이나 전이 맛있는 가맥, 아예 제육볶음이나 골뱅이 소면을 내놓는 가맥이 있기도 하다. 맥주안주의 MBTI가 모두 여기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다양한 종류의 맥주안주가 가맥집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맥주 자체도 전주가맥이 가진 특별한 점이다.



가맥에서는 독일맥주가

못 비비는 이유

(하이트, 테라, 켈리...가 제일 맛있는 도시)

세상에 정말 다양한 맥주가 있고, 한국에는 특히 세계의 맥주가 한 매장에 있을 정도지만, 전주 가맥에 오면 세계맥주보다 한국맥주를 마셔야 한다. 맛적으로. 


그것은 '하이트진로' 공장이 전주가맥 근처에 있기 때문이다. 차로 30분 거리정도에 있는 하이트진로 공장에서 생산한 맥주를 빠르게 공급받는 곳이 전주의 가맥집이다. "맥주는 양조장 굴뚝 그림자 아래에서 마시는 게 제일 맛있다"는 독일의 속담처럼 아무리 대중맥주라도 신선한 상태에서 마시는 것은 느낌이 다르다.

(올해는 당일생산된 켈리로 축제를 벌인다고)

그러다 보니 맥주공장과 가맥집이 모여서 축제를 열기도 한다. 당일에 생산된 맥주를 깔아놓고, 날고기는 가맥집들이 한자리에 모여 안주를 파는 것. 전주만의 옥토버페스트라고 불릴법한 '가맥축제'는 처음에는 광장 한 공간에서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경기장을 빌려서 진행해야 할 만큼 현지인들이 좋아하는 축제라고. 


(가맥 도장깨기 12곳에 대한 리뷰는 영상으로 볼 수 있어요)

그 축제가 8월에 열리는데, 마시즘은 너무 먼저 갔다. 대신 여러 가맥을 돌며(전주에 가맥집만 300곳이다) 일종의 펍 크롤을 했다. 



전주의 밤은

낮보다 맛있었다


문화가 있는 도시 혹은 맛부심이 있는 도시에는 그들만의 맥주 문화가 있다. 전국 여러 지역에 멋진 크래프트 맥주 양조장들이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지만, 전주의 가맥은 비슷하면서도 결이 다르다. 맥주를 만든 게 아니고, 술집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맥주를 마시고 즐기는 사람들이 만든 독특한 맥주문화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전주에 올 일들이 있다면 한옥마을 외에도 마시는 문화, 특히 가맥문화를 즐겨보길 바란다. 전주가맥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맛과 분위기가 여러분을 새로운 맥주세계로 안내해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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