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텔러_진주도가 "전통주가 칵테일이 되어야 하는 이유"
오랫동안 유지된 전통이 힙해지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시간'을 내세우는 것이 아닌 '재미'를 보여줬을 때다. 전국의 명인들이 맥을 잇고 있던 전통주가 젊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은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전통을 이름 붙인 술들이 특별해질 수 있다고?
어른부터 학생까지 많은 관광객들이 한복을 입고 거니는, 전주 한옥마을은 '전통주'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곳이다. 심지어 전주는 맛의 도시이자, 조선시대의 3대 명주가 있는 곳이 아닌가.
하지만 이런 곳이 있을 줄은 몰랐다. 멋진 전통주 칵테일을 오랫동안 선보이고 있는 '진주도가'다.
서울에서 떨어진 전주에 위치한 칵테일 바지만, 이미 업계 사람들 사이에서는 베테랑 바텐더로 유명하다. 진주도가의 이정헌 바텐더는 서울에서 오랫동안 바텐더 생활을 하다가 낯선 전주에 칵테일 바를 차렸다. 그것이 무려 10년 전의 일. 이제는 전주의 미식을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사람이 된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Q. 바텐더님은 서울에서 활동하시고, 이곳 전주에는 원래 연고가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계기로 전주에 칵테일 바를 차리시게 된 것일까요?
이정헌 바텐더 : 제가 좋아하는 술을 파는 바를 내고 싶었는데 서울은 너무 경쟁이 심할 것 같았어요. 이런저런 도시들을 시장조사를 하다가 전주로 결정했습니다. 음... 일단 조용조용한 도시였고, 음식들도 맛있고요. 고즈넉하다고 해야 할까요?
Q. 그렇게 이곳에서 10년 동안 바를 운영하실 줄은 몰랐던 거죠? (이정헌 바텐더 : 그렇죠) 그렇다면 진주도가를 찾아오신 분들에게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있나요?
이정헌 바텐더 : 왜 전주도가가 아니라 '진주도가'냐고 많이 물어보시죠.
Q. 맞습니다. 그걸 물어보려고 했습니다. 왜 진주도가라고 이름을 붙인 건가요?
이정헌 바텐더 : 전주에 '전주식당'이라고 있으면 이상하잖아요. 비슷한 맥락으로 전주도가라고 하면 너무 뻔하고 기억에 남을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진짜 술을 파는 곳'이라는 의미로 '진주도가'라는 이름을 붙였죠.
Q. 전주에 이렇게 좋은 바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 이곳을 찾는 분들은 어떤 분들인가요?
이정헌 바텐더 : 처음 왔을 때만 해도 바가 많이 없었는데, 이제는 이곳에도 많은 바가 생겼습니다. 진주도가를 찾는 사람들은 전주 분들도 많으시지만, 서울 분들이 오히려 더 많아요. 칵테일이나 위스키에 관심 있는 친구들, 혹은 다른 바텐더들이 이곳까지 찾아오곤 합니다.
Q. 서울에서 진주도가까지 술을 마시러 온다고요?
이정헌 바텐더 : 일단 그것을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로 저희 메뉴는 가성비가 있고요(웃음). 기차로도 금방 올 수 있고, 주변에 한옥마을 관광도 할 수 있고, 또 서울에 있는 바텐더 후배들이 서울의 바를 가기에는 마음이 편하지 않을 수 있잖아요? 이곳에 오면 더 편하게 술도 마시고, 물어볼 수도 있고 그런 거죠.
Q. 인터넷에서는 또 배우 '김태리'님이 다녀온 바로 유명하더라고요. 원래는 남주혁 배우가 촬영 때 자주 갔다고 하고요.
이정헌 바텐더 : 저는 그냥 손님으로 알았어요. 그 뒤로 김태리 님의 팬, 드라마 팬들이 이곳을 많이 오더라고요. 정말 감사하지만... 동시에 마음 편히 오던 다른 셀럽들이 이제는 진주도가를 조심해서 오시게 되었죠. 원래도 전주를 찾은 배우분들이 자주 오셨었어요. 좋은 술이 있고,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 공간이니까요.
그는 바에 찾아오는 손님들이 누구든 편하게 지내고 가는 것에 신경을 쓰고 있다고 말한다. 대화가 필요하고 칵테일이 궁금한 사람에게는 술을 앞에 보여주면서 대화와 함께 칵테일을 만들어 주고, 조용한 쉼을 원하는 분에게는 자리를 비켜준다고 한다. 우리는 술이 궁금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특히 진주도가에서 볼 수 있는 전통주 칵테일이 궁금했다.
클래식한 칵테일도 잘 만들지만, 전통주로 만든 칵테일의 밸런스가 클래식 칵테일 같다는 곳. 진주도 가는 전통주의 유행이 있기 전부터 전통주로 칵테일을 만들어오던 바였다. 세상에는 이미 맛있는 칵테일을 쉽게 만들기 위한 다양한 술들이 존재한다. 왜 전통주였을까?
Q. 전통주 칵테일을 이야기하기 전에 칵테일에 어떤 계기로 빠지셨는지 궁금합니다.
이정헌 바텐더 : 원래는 술 공부를 와인으로 시작했어요. 그런데 와인으로 공부를 시작하다 보면, 와인으로만 끝나게 되는 일이 많아요. 그것만으로도 엄청나니까. 그런데 저는 다른 술들도 궁금했어요. 위스키도 궁금하고, 데낄라도 궁금하고 말이죠. 그러다가 우연히 칵테일 바에 갔는데 그때 마셨던 칵테일이 굉장히 인상 깊어서 그 뒤로 바텐더의 길을 걷게 된 거죠.
Q. 어떤 칵테일이었는지 기억이 나세요?
이정헌 바텐더 : 롱 아일랜드 티요(홍차의 달콤한 맛으로 알콜을 숨긴 칵테일 줄여서 '롱티'라고 부른다). 한 잔으로도 이런 맛을 낼 수 있구나, 그리고 한 잔으로도 이렇게 취하는구나(웃음).
Q. 그렇게 와인, 칵테일, 그리고 전통주의 영역까지 오신 거네요?
이정헌 바텐더 : 그렇죠. 바텐더 일을 하면서 보니까 모두 서양 술 위주로 칵테일을 만들고 판매하는 거예요. 그쪽에서 시작했으니 당연할 수밖에 없죠. 하지만 이런 식으로 하면 우리가 독보적이거나, 독창적일 수 없겠다. 그럼 그 해답을 어디에서 얻을까 싶어서 전통주를 공부하게 된 거예요.
그리고 전통주를 사용한 바를 만들어볼까? 했던 결심이 진주도가를 만든 거죠.
Q. 지금은 전통주가 유행을 하면서 전통주 칵테일을 만드는 곳이 많았지만 (2012년) 그때는 없었죠. 전통주를 칵테일로 만드는 것은 어려움이 없나요?
이정헌 바텐더 : 사실 전통주도 그냥 술이라고 생각해요. 반대로 위스키는 서양전통주잖아요. 그런 의미로 술은 그냥 술이라고 생각해요. 대신 어려운 것은 칵테일에 사용되는 많은 재료들이 서양술에 맞춰져 있어요. 같은 생강을 쓰더라도 서양시럽과 한국시럽의 느낌이 달라요. 전통주를 공부하면서 여기에 밸런스, 궁합이 잘 어울리는 재료들을 찾고 만드는 게 어려운 일이죠.
때문에 쉽게 가려고 재료들의 맛을 강하게 만들어서 전통주 자체가 가진 술의 속성을 가려버리는 곳들도 있어요. 저는 오히려 기본이 되는 술의 특성을 더 살려주는 게 좋은 칵테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많이 공부하고 여러 재료들을 알아보고 구상하는 쪽을 택하고 있어요. 사실 이런 시도가 많아지고, 여러 전통주에 어울리는 칵테일 재료들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아쉬운데 즐겁다. 가능성이 무궁무진하지만 아직 멀었다. 이정헌 바텐더의 '당근과 채찍' 같은 전통주와 전통주 칵테일에 대한 이야기는 듣는 사람의 귀를 쫑긋 서게 만든다. 그런데 궁금해졌다. 이토록 전통주에 대해 깊이 공부하고 오랫동안 연구한 사람의 칵테일은 어떤 맛이 날까?
Q. 전통주의 특성을 살리는 칵테일을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이정헌 바텐더 : 예를 들면 이런 칵테일이죠. 전주에는 조선시대 3대 명주인 '이강주(이강고라고 불렸다)'가 있어요. 배와 생강, 꿀이 주 재료가 되는 술이죠. 여기에 플러스알파를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하다가 생강을 더해주면 좋을 것 같더라고요. 마침 근처 특산물인 '봉동 생강'이 이강주와 합이 맞았고, 그렇게 '한 잔'이라는 칵테일을 만들게 되었죠. 드셔보세요.
Q. 저는 생강이나 계피, 수정과 같은 '한국 스파이시'를 엄청 좋아하는데요. 와 이건 정말 고급 수정과 같은 맛이네요. 너무 달콤하고 맛있어요. 이강주는 이강주 자체가 독특한 맛이 있는 음료인데, 소주로도 칵테일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요?
이정헌 바텐더 : 저희 바에서 잘 나가는 시그니처 중 하나는 '안동뮬'이라는 칵테일인데요. ‘모스코 뮬’이라고 불리는 보드카로 만드는 칵테일이 있어요. 이게 보드카에서 버번위스키로 바꾸면 '켄터키 뮬(켄터키는 버번위스키의 도시다)', 데낄라로 바꾸면 '멕시칸 뮬', 예거 마이스터로 바꾸면 '베를린 뮬'이 되는데요. 안동소주로 만들어보면 느낌이 다르지 않을까 싶어서 만든 것이 '안동 뮬'입니다. 소주 특유의 화한 맛과 진저에일, 라임의 따뜻하고 상큼한 맛이 잘 어울리죠.
Q. 기존의 칵테일 레시피들에서 전통주로 베이스를 바꾸어 시도하는 것도 참 재미있고, 맛있는 시도네요.
이정헌 바텐더 : 맞습니다. 기주만 달라져도 완전히 다른 칵테일이 돼요. 사실 같은 레시피와 재료로 만들어도 바텐더에 따라 맛이 달라지죠. 이 칵테일은 아직 이름은 짓지 않았는데요. 외국에 '네그로니'라는 이탈리아 칵테일이 있어요. 살짝 씁쓸하면서 달콤한 맛이 나는 칵테일인데. 이걸 '송화백일주'라는 전통주로 만들어 봤어요. 맛도 향도 굉장히 독특해요.
붉은빛이 감도는 이 칵테일에서는 네그로니 특유의 맛이라는 씁쓸하면서 달콤한 맛은 물론, 송화백일주가 가지고 있는 장미향과 솔향이 어우러졌다. 칵테일의 기본이 되는 전통주를 열심히 분석했기에 이렇게 특성을 살릴 수 있었을 거라고 짐작이 가는 맛있음이다. 그제야 '전통주도 그냥 같은 선상의 술'이라고 말했던 이정헌 바텐더의 이야기가 이해가 갔다.
정성스럽게 만든 술을 마시면, 술에 대해 이야기를 하게 된다. 또 술에 대한 이야기에 빠지다 보면 여러 관련 이야기를 나눈다. 대화의 창을 열어버리는 진주도가 칵테일과 함께 전주의 밤은 어두워져 갔다.
Q. 진주도가의 참 좋은 점은 맛있는 술 말고도, 바텐더님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추천을 받기도 했습니다. 인터뷰를 하다 보니 굉장히 잘 말씀하시고, 또 잘 들어주시는 것 같아요.
이정헌 바텐더 : 좋은 술에는 좋은 대화가 당연히 따르죠. 잘 만든 칵테일을 통해서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대화가 필요해 보인다 하면 스윽 가서 이야기해 주고, 또 자연스럽게 스윽 빠져서 할 일 하는 거죠. 그런 게 경험에서 오는 노하우 같아요.
Q. 진주도가를 운영하면서 가장 보람이 있을 때가 무엇인가요?
이정헌 바텐더 : 뭐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곳에 자리하면서 오랫동안 많은 사람을 봐왔던 말이죠. 여러 어린 친구들이 호기심으로 오곤 했는데. 20대 초반에 왔던 친구가 이제 결혼을 하고, 자기 아내와 와요. 또 아이까지 데려오는데 그럴 때 저는 '아 뭔가 내가 저 애를 키웠다(웃음)' 이런 생각도 들고.
저희 집에서 소개팅을 또 많이 하는데. 나름 소개팅하기 좋은 곳이거든요? 잘 되고 나중에 청첩장을 주고 간 손님이 있을 때가 기억나네요.
Q. 그렇다면. 전통주 칵테일을 만드는 입장에서 바텐더님의 꿈은 무엇인가요?
이정헌 바텐더 : 아직 가야 할 길이 많죠. 개인적으로도 술은 아마 평생 공부를 해도 다 못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요. 대신 술을 공부하면서 이 술에 대해 알고 마실 때는 가능하지만, 일반 소비자들이 여러 술, 특히 전통주를 마시기에는 어려운 점들이 있잖아요. 독하기도 하고. 그 사이에서 매력을 느낄 수 있도록 특성을 살린 맛있는 전통주 칵테일을 계속해서 만들고 싶죠.
진짜 술을 사랑하는 바텐더와 그가 만든 전통주 칵테일에 반해서 오는 손님으로 가득한 진주도가. 이곳의 의미 있는 여정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