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의사의 죄책감이 국내 최초의 두유를 만들다
자네, 우유를 못 마시는가?
매형은 어릴 적에 우유 때문에 고생했다고 대답했다. "흐음 그것 참 안타깝고만" 아빠의 말대로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낙농업에 종사한 우리 집은 아침에 물보다 우유로 시작하는 게 자연스러웠거든. 우리 매형. 그는 지구의 운명을 맡기고 싶을 정도로 든든한 사람이다. 하지만 아빠는 딸을 맡기는 것은 탐탁지 않아했다. 이유는 단 하나. 걔는 우유를 못 마셔.
조카가 태어나자 상황이 바뀌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조카에게 우유를 줬을 때 일이다. 뭐든 잘 먹던 아이가 설사를 시작했고, 기저귀가 빠른 속도로 조카의 엉덩이를 지나 쓰레기통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그제야 우유를 못 마시는 사람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믿게 되었다.
고민 끝에 아빠는 냉장고에 새로운 음료를 항상 두고 있다. 바로 콩으로 만든 우유 '베지밀'이다. 사실 이 한 잔의 음료는 나에게 맛보다 달콤한 감동을 준다.
조카가 우유를 못 마신다는 것. 지금이야 웃고 넘어갈 일이지만, 과거에는 위험한 일이었다. 1937년, 의사검정고시를 19살의 나이로 패스한 '정재원' 소아과 견습의사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그는 가난한 가정환경에서 천신만고 끝에 의사가 되었다. 의사공부를 한 것도 학교를 다닌 게 아니라 의학 강습소에서 교재를 복사하는 일을 하다가 어깨너머로 지식을 배웠기 때문이다.
의사가 되어 성공한 삶을 살겠다는 희망은 일주일 만에 깨졌다. 그의 눈 앞에는 팔다리가 앙상하고, 배만 볼록 튀어나온 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계속 설사를 하고 있었다. 진료차트에 적힌 병명은 '소화불량'. 하지만 어떤 처방도 아이를 낫게 할 수 없었다. 아이의 엄마는 어렵게 얻은 아이라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무력하게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그에게는 첫 시련이자 도돌이표 처럼 반복되는 기억이 되었다.
수십년을 연구했지만 병의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1961년, 정재원은 가방을 싸서 유학을 떠난다. 어느덧 나이는 마흔이 넘었고 슬하에는 6자녀가 있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아무도 그 병의 원인조차 밝히지 못했다. 처음에는 영국 런던대학원으로 갔고, 이어 미국 샌프란시스코 UC메디컬 센터에 갔다. 그곳에서 '유당불내증 연구'라는 논문을 찾아내게 된다.
'유당불내증(유당 소화장애)'이란 우유나 모유에 들어있는 유당을 분해하지 못하는 증상을 말한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한국인의 80% 남짓은 유당불내증에 시달리고 있다. 당시에는 이름도 몰랐던 이 증상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에게 나타나면 영양실조 내지는 죽음에도 이를 수 있던 것이다.
그는 유당이 없으면서 영양이 가득한 '우유 대용식'을 만들어야 함을 깨달았다. 그는 4년 만에 한국에 돌아와 평일에는 병원에서 일했고, 휴일에는 우유 대용식 개발에 몰두했다. 그러다가 생각이 닿은 것이 '콩국'이었다. 어릴 때 어머니가 만들어줬던 콩국. 이 음식에는 유당은 없지만 각종 영양이 가득했다.
1967년 드디어 유당과 콜레스테롤이 없는 우유 대용식이 만들어졌다. 국내 최초로 콩으로 만든 우유, 즉 두유를 개발한 것이다. 채소(Vegetable)와 우유(Milk)를 합쳐서 '베지밀(Vegemil)'이라는 이름도 지었다.
정재원은 유당불내증에 시달리는 어린 환자에게 베지밀을 처방했다. 그러자 눈에 띄게 아이의 몸이 호전되었고 곧 건강한 모습을 되찾았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이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다. 전국에 있는 엄마들이 정재원 원장을 찾았다. 그는 매일 밤 아내와 함께 콩을 갈아 베지밀을 만들었지만, 쏟아지는 환자에게 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베지밀만 마시게 해도 나을 수 있는 병이다. 결국 그는 결심한다. 의사를 그만두겠다고. 그리고 1973년 경기도 용인에 베지밀 생산공장을 설립한다. 그의 나이 56세의 일이다.
이어서 1984년에는 당시 세계 최대 규모를 갖춘 청주공장을 지었다. 다음 해인 1985년에는 연구소를 만들어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연구에 관심을 쏟는다. 베지밀 덕후라면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난 45년 동안 베지밀A와 B는 영양성분과 맛을 계속 업데이트 해왔다.
베지밀은 출시된 후 계속해서 두유시장의 1등을 지켜왔다. 하지만 정재원은 여전히 국민들에게 돌아가는 두유가 부족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경쟁기업에 제대로 만든 두유를 공급하는 회사를 만든 것이다. 이로 인해 국내에는 10개가 넘는 회사가 두유를 만들게 되었다.
정재원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도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매일 아침 EBS 영어를 듣는 것으로 유명하다. 영어를 배우는 이유는 콩에 대한 학술자료를 더욱 잘 이해하기 위해서라고. 심지어 2014년에는 경상북도 영주에 '콩 세계과학관'이 지어진다는 소식에 2억원을 기부금으로 내놓고 불편한 몸으로도 개관식을 찾았다.
누군가에게는 지독한 사랑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에게 콩은 기적이자 생명이었다.
그런 그가 지난해 세상을 떠났다. 향년 100세의 나이. 기업인 중에서도 굉장히 장수를 해서인지 건강에 대한 인터뷰도 참 많이 남겼다. 그의 비결은 매일 마시는 베지밀 3팩이라고 한다.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까지도 연구실에서 콩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고 한다.
조용하게 치러진 그의 장례식을 기록한 기사가 있었다. 독립공간도 아닌 일반실에서 치러진 조촐한 장례식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곳을 찾은 이들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수십 년간 가까이 지낸 이웃부터 대리점주들이었다고. 그와 대화도 나눠보지 않았을 제품 운송기사들은 직접 돈을 모아 화환까지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청바지를 입은 20대 학생이 자리를 찾았다. 친분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평소 그를 존경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회사에는 베지밀을 마셔왔던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연락이 이어졌다고 한다. 모두 그가 아니었으면 꽃 피지 못했을 어린 생명들이 아니었을까.
베지밀은 국내 두유시장의 50% 정도를 차지하는 음료다. 하지만 영향력에 비해 회사 규모는 적은 편이다(2,000억원대). 그동안 사업을 다각화 하기보다는 두유 자체의 연구와 생산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경영을 하는 입장에서는 바보 같은 일이지만, 창업자에게 두유란 사업보다 사명에 가까웠으니 당연한 일이다.
베지밀을 비롯하여 삼육두유, 매일두유 등은 이제 해외에 진출하고 있다. 특히 베트남을 중심으로 동남아 시장에서 두유에 대한 환호가 크다. 마치 그 옛날 베지밀이 나왔을 때처럼. 오랫동안 사랑받는 음료에는 만든 사람의 이야기와 마신 사람의 고마움이 들어가 있다. 나또한 고마움을 담아 소망을 빌어본다. 이토록 따뜻한 음료가 더 많은 어린아이에게 닿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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