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위해 쓰는 글
어쩜 나의 시간은 나를 제외한 외부 상황에 구걸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나의 시간이 온전히 내가 조율할 수 없는 상황 앞에 서면, 갑자기 무기력해진다. 예민하게 발광하고, 소리치고, 격하게 울어버리는 게 어쩌면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일지 모른다. 하지만 외부의 모든 자극에 기력을 잃고, 반응을 하지 않는다면, 과연 어떤 상태일까?
남편이 일을 끝내고 집에 온 시각은 저녁 7시였다. 그때 나는 아이들 저녁 준비에 한창이었다. 그런데 피곤한 첫째가 침대에서 쓰러지고, 감기 걸린 둘째만 거실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때 남편이 들어오자 나는 순간 말을 잃어버렸다. 오늘 하루라는 시간은 내게 분할의 의미가 있었다. 반은 육아, 반은 일하기. 이를 알고 있던 남편은 저녁 7시에 들어오면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했다. 본인의 일이 바빴기에 먼저 일을 하고 오라고 했지만, 저녁 7시에 들어와 다시 밤 10시에 나가야 하는 일정 앞에서 나는 무기력해졌다.
예전 같으면 화를 냈을 텐데 화를 낼 힘도 없었다. 남편도 연이은 고된 업무에 지쳐가고 있었다. 나는 일 때문에 점점 더 예민한 남편을 볼 때마다 말을 잃어갔다. 결국 남편이 집에 머물 시간이 없다는 것 , 그 자체가 나의 시간이 분실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시간은 내가 만들어가는 것 같지만, 엄마의 시간은 가족들에게 좌우된다. 첫째가 방과 후 돌봄에 추첨으로 뽑히느냐 안 뽑히느냐, 둘째가 오늘은 어린이집을 가줄 것인가 안 간다고 떼를 쓸 것인가, 남편이 야근을 하냐 안 하냐 등. 나의 시간은 그 사이에서 외줄을 타고 있다. 여기서 나란 엄마라는 책무를 달고 있는 인간사람이다. 그 엄마사람은 과도하게 육아로 점철된 시간을 보내고 나면, 점점 더 무기력해지고 있다. 예민함 너머, 신경증 너머, 그 위 단계인 무기력증에 접어든 것이다.
온몸에 화를 품고 사는 어떤 엄마가 있다. 아이가 셋인데 처음 이곳에 이사 왔을 때 그 엄마가 아이들을 대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었다. 길에서도 서슴치 않고 아이들에게 화내는 모습을. 그 모습을 보면서 남같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그런 신경증을 탑재하지 않고, 고고한 척 아이를 키우고 싶었는데, 나 역시 쉽지 않았다. 육아 스트레스를 표현하는 방식만 달랐다. 나는 기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기력이 없으면 말이 사라진다. 음소거가 된 일상이 나의 삶이다. 엄마로서 나는 이런저런 얘기와 잔소리를 늘어놓지만, 나란 존재는 일상 속에 매몰돼 고개를 들지 않고 있다. 그때 무기력이 찾아온다.
무기력이 그래서 더 무서운 것 같다. 말하지 않고, 더는 꼼짝하지 않을 때 찾아오는 무기력, 그것은 우울증으로 연계된다. 나의 우울감에 대해서는 익히 익숙하지만, 아직은 우울증의 단계까지 진입하지 않았기에 나는 무기력이 두렵다. 나의 무기력을 경계한다. 나의 무기력이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무기력은 무거운 이불을 덮어쓰고, 땀을 뻘뻘 흘리는 것이다. 안락하지도 않으면서 그 안에서 도저히 빠져나올 힘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머리와 몸이 따로 놀다가 결국 부동자세로 안착하는 순간이다. 그래서 무기력은 한 번 진입하는 순간, 발을 떼는 게 힘든 것 같다. 그 어떤 에너지도 쓰지 않고, 숨을 쉬는데만 사용한다면, 일상의 중력이 나를 비켜가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기력을 즐긴다. 그러다 결국 몸이 아니라 머리가 무거워진다. 머리가 정지되면, 몸도 멈춘다. 그렇다 결국 시간은 흐르지 않고 멈추는 것. 일상도 인생도 결국 무기력증에 걸리는 것. 그래서 무기력은 무섭다.
그럼에도 시간을 내 것으로 끌어당겨야한다. 억지로 의식적으로 노력한다기보다 자연스러운 물길을 만들어야한다. 나는 그것을 루틴이라 부른다. 좋은 습관을 루틴화하면 의식하지 않아도 몸이 따라오는 거니까. 내가 새벽 기상을 고집하는 이유도, 아이들 다 보내고 걷기운동을 하는 이유도, 아침마다 명상을 하는 이유도 그렇다.
물은 흘러야 하고, 구름은 떠돌아야 하며, 하늘은 맑고 흐림을 반복하며 산다. 나를 정지시킨다는 건 어쩌면 자연의 순리에 역행하는 것. 순리대로 살아가려면 시간의 흐름 속으로 진입해야한다. 그 시작으로 나는 일단 걷기로 했다. 그러다보면 자연이란 심폐소생술로 다시 살아간다. 이를 통해 생은 연결되고, 자연스럽게 흘러간다고 믿는다.